[노무현 대통령과 함께하는 가을①]
대통령의 책장을 들여다보다
노무현 대통령이 경남 진해에 위치한 '기적의 도서관'을 방문하여 편하게 앉아 서가를 훑어보고 있다.
독서의 계절,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습니다. 망망히 높은 하늘 아래 포근한 햇볕과 향긋한 차 한 잔을 곁들이며 읽어 내려가는 한 줄 한 줄이 마음의 결을 정연히 가다듬어주는 요즘입니다.
책은 노 대통령 생의 굽이굽이에서 때론 나침반으로서, 때론 친구로서 대통령과 함께한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천여 권의 대통령 소장 도서들 속 밑줄과 메모들은 책과 끊임없이 대화하려 했던 대통령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실천을 책으로부터 시작한 노 대통령이었습니다. ‘우리들’, ‘이지원’ 같은 행정 데이터베이스를 직접 만들 정도로 컴퓨터에 조예가 깊었던 대통령, 모두 책을 보고 독학하며 얻은 지식이 바탕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책을 고민할 때도, 골프를 배울 때에도, 봉하마을 생태농업을 추진할 때도 모두 여러 권의 책을 탐독하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사법고시 준비 중이었던 1974년 직접 제작하고 이듬해 특허를 출원한 개량 독서대와 독서대 도면(등록번호 20-0012411-0000). 바른 자세로 독서를 할 수 있도록 받침대의 높낮이와 각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특허청 제공 사업에는 실패했으나, 독서와 관련한 진중한 고민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소중한 인연을 맺어준 가교이자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유주현 작가의 <대원군>을 빌려준다는 핑계로 권양숙 여사와의 만남을 이어갔고, 그렇게 반딧불이 수놓인 화포천 밤길을 걸으며 권 여사와 나눴던 책의 밀담은 평생의 약속으로 이어졌습니다. 탄핵기간 동안 독서로 하루하루를 꼬박 채우며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분야와 깊이를 따지지 않고 책 삼매경에 평생을 빠져 있던 노무현 대통령. 그의 책 사랑은 소장했던 도서들에 고스란히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메모를 하고 밑줄을 그어가며 정독했던 대통령의 독서 흔적들, 봉하마을 대통령의 집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박물 사료들과 함께 소개드립니다.
▲ 미래를 말하다(2008. 서울: 웅진싱크빅. 예상한 외 역) = 폴 크루그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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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던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저서 <미래를 말하다>. 크루그먼은 오늘날 악화일로의 경제와 불평등은 국가가 사회와 복지 영역으로부터 후퇴함으로써 나타난 결과라고 분석하면서, 이러한 문제의 대안으로서 1930년대의 복지국가 동맹을 부활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시합니다.
<미래를 말하다>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 직전까지 읽었던 도서입니다. 평소 폴 크루그먼의 책에서 경제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는다고 하였던 대통령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 책을 권했다고 합니다.
책에는 대통령이 마지막까지 가졌던 고민의 흔적들이 나타납니다. 경제 발전 초기 단계에서 나타나는 불평등 이후 분배가 확대되고 중산층이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한 ‘쿠즈네츠 곡선’의 원리가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현상을 분석한 대목에 긴긴 밑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그 외에도 노동자들의 임금, 불평등, 조합 문제와 관련된 부분들에 그어져 있는 밑줄들은 대통령이 서거 이전까지 안고 갔던 문제의식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김대중의 21세기 시민경제이야기(1997. 서울: 산하) = 김대중 지음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특별한 인연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연관 사료이야기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인연] 바로가기).
김대중 대통령은 1980년대 초 미국 망명 당시 하버드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초빙연구원으로 지내며 <대중참여경제론(Mass Participatory Economy)>이라는 논문을 책으로 출간하는 등 학술 분야에서도 전문성을 쌓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철학이 모든 면에서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책의 대부분에 걸쳐 남아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학습 흔적에서 정치 선배에 대한 존경과 학구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사용자와 노동자 그리고 정부 사이의 이해관계 조절과 관련된 부분에 특별한 관심을 쏟은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책에 남아 있는 필기 흔적들로 미루어보아 경제 주체 간의 신뢰·평등·협력을 특히 중시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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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낭 브로델(2006. 파주: 살림) = 김응종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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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해설서인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물질문명과 자본주의>입니다.
페르낭 브로델은 연구를 통해 역사를 연속된 사건들의 나열로 서술하는 것을 거부하고 역사를 관통하는 장기적 구조를 파악할 것을 제시하였습니다. 또한, 정치나 외교와 같이 거대한 이야기들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세계의 미시적 모습들을 분석에 포함시키며 역사 연구의 풍부함을 더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서적을 특히나 즐겨 읽었다고 하는데요. 대통령 재임 당시 많은 연설에서 역사에 대한 본인의 철학을 논했던 바탕에도 역사 서적 독서가 큰 몫을 했습니다.
페르낭 브로델의 저서들은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어 해설서를 통해 입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 해설서 여러 곳에 밑줄을 그어가며 브로델을 이해하려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신(新)국가론(2001. 서울: 한국선진화연구회) = 유종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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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책은 제30대(1998~2002) 전라북도 도지사를 역임한 유종근의 저서 <신(新)국가론>입니다.
2001년 12월 10일 당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이 <노무현이 만난 링컨> 출판기념회 및 후원회에서 진행한 연설 중 인용했던 저서입니다. ‘낮은 사람, 겸손한 권력, 강한 나라’라는 대통령의 유명한 문구가 탄생했던 날이기도 합니다.
당시 연설에서 대통령은 “오늘 아침에 저는 유종근 전북지사가 지은 유종근의 신국가론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라며 책을 소개 한 뒤, 신뢰와 협동이라는 사회적 자본이 선진 한국으로 나가는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책 곳곳에 메모를 하고 밑줄을 긋고 별표와 물음표로 표시를 해 두는 등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10월 27일(월)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하는 가을] 2편, '농민들에게 전하는 못다 한 말'이 업데이트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