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여름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에 입사한 임영미 씨는 1988년 노무현 변호사가 부산 동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될 무렵까지 ‘타이피스트’로 일했다고 한다. 선거가 다가오며 그의 일정도 함께 바빠졌다. 1988년 봄 어느 날 밤을 세워가며 <노 후보 Life Story>를 타자기 위로 옮겨 담았다고 한다.“저는 옛날에는 타이프(타자기)가 있었어예. 그러니까 법원 사무실의 모든 직원들이 준비서면이라고 변론 준비를 하면 변호사님부터 이래 원고지에 글씨를 이렇게 써가지고 저를 넘겨주거든예.... 옛날에는 먹지를 넣어서 법원에 하나 원고 하나 피고 하나 우리 하나 이라면, 항상 넉 장 씩 이래 끼워서 돌려서 이래 치면 사본 네 부가 나오면 이제 법원에 한 통 뭐 이런 식으로.... 그런 작업을 많이 했지예.”
밤새워 타자기를 쳤지만,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원고의 내용이 평소 노무현 변호사가 자주 되뇌던 말들이라 익숙한 덕이었다. 그 내용들이 가식이나 위선 없이, 지극히 진솔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동부 인제 선거가 나가게 되었잖습니까? .... 댁으로 가서.... 그날 집에서, 새벽에.... 타이프를 갖추고 쳤던 기억이 있어예. 있고, 이제 내가 너무 지쳐가지고 저 작은 방에서 자고 있는데…… 노크를 하면서 칠 게 있다고, 그래서 다시 제가 나와가지고 새벽까지 타이프를 친 기억이 있거든예.... 저희들한테도 이런 술자리에 한 번씩 앉으시면, 이런 사소한 고민 같은 것도 얘기를 많이 하셨던 그런 기억이 있네예.... 항상 고민하는 그런 변호사님이었던 것 같아예. ”
“촌사람 같아예, 촌 아저씨. 예, 촌 아저씨 같아예. 그날따라 양복도 제가 딱 기억이 나는 게, 밤색 양복을 입으셨더라고예……. 밤색 양복을 그날 제가 갔는데 입고 계시니까 더 촌 아저씨 같은 느낌, 조금 그런 느낌이었거든예. 그러니까 생김새도 왜 시골사람처럼 생기셨잖아예. 그러니까 아 저분이 노 변호사님이구나…….”
“항상 이렇게 이래 허리를 낮추어서 인사하는 그 모습이 항상 기억에 남습니다. 변호사라하믄 왜 조금 어깨에 힘도 주고 막 이럴 건데 진짜 노 변호사님은 진짜 그런 건 없었습니다.”
“우리 시절에는, 그 시절에는 기본적으로 아가씨가 취직을 하면, 이래 청소, 커피 타는 거는 다 기본인 걸로 알던 시대였어예. 저희 친구들도 다 이렇게 들어갔는데 보니까 다 뭐 이렇게 기본 하는 게 청소부터 커피 타는 것, 손님.... 그런데, 저는 이 사무실에 있으면서 한 번도 커피를 탄 적이 없어예.... 변호사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예.”
“민가협 어머님들이 오시면 변호사님이 다른 사업자들하고 상담을 많이 하시잖아예. 하시다가도 ‘변호사님 민가협 어머님들 오셨습니다’ 이래하면 정말 한 치의 주춤도 없이 바로 일어나셔서 나오세요.... 항상 90도로 이래 인사를 하시면서 어머니들 어서 오시라고.... 어머님 차례가 아니신데도 정말 정중하게 어머님들을 모시세요.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시든지 항상 이렇게 진심으로 들어주시고, 그게 항상 고마웠다고 저희 어머님이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볼 때도 어느 손님보다, 돈 되는 손님보다, 민가협 어머님들 돈은 안 되시잖아....”
“제 기억으로는 중 2때,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거든예, 79년도에. 그 앞에 육영수 여사님이 돌아가셨고. 제가 중학교 때 그 모든 게 있었는데, 학교에서 막 이렇게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생각은, 아 내가 이 대통령, 이 훌륭한 대통령님 밑에 있으니까 내가 이걸 열심히 해서 진짜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이렇게 치료를 해줄 수 있는 간호사, 간호부가 되어야지, 이런 마인드, 그런 게 진짜 많았었거든예....
그런데 여기를 또 왔는데 완전히 다르게 해석을 하고 다르게 이해를 하고 다르게 말을 하시니까 혼란은 조금 있었어예. 막 이 사람들이 그래 전두환 대통령이 말하는 그런 빨갱이, 빨갱이인가 간첩인가, 진짜 그런 생각 많이 했었거든예.... 그런데 이제 책을 보고 사람을 이렇게 대하고 보니까 누구보다도 진실하고 착하고 순수하고.... 그런데 이제 결정적으로는 노 변호사님이 거기에 모든 거를 지원을 하고 동참을 하셨기 때문에, 저는 백 프로 의심 이런 거 없이 그냥 쏙 빨려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노 변호사님이 주례를 하면서 하신 말씀 중에, 둘만의 사랑을 하지 말고,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신랑 신부에게 말씀을 하셨거든예. 그래서 그 의미는, 우리 둘만 좋아하지 말고, 양쪽에 가족, 더 크게는 양쪽에 노동자, 내가 아는 모든 노동자, 이렇게 아는 사람들을 많이 도울 수 있고 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항상 본보기가 돼야 되겠다. 아이들에게,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한테, 그런 모습은 보이고 살아야 안 되겠다. 큰일은 하지 몬해도,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저는 살았거든예. 그래서 송병곤 씨가, 그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또 우리 노 변호사님이 주례하시면서 부탁하신 말씀대로 내가 잘 하고 살아야 되겠다, 잘 살아야 되겠다, 라고 항상 저는 그렇게 하고 한 30년을 살았습니다.”
1988년의 시민 노무현, 그리고 그를 지켜봐 온 또 다른 평범한 시민. 2021년 노무현이 없는 오늘을 향해, 그 평범한 한 사람이 ‘사소한’ 이야기를 끝맺으며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대신 전해주는 듯했다.“우리는 항상, 송병곤 씨나 저는 젊은 세대한테 진짜 미안해요.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 젊은 세대가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어떻게, 치열하게 산다고 살았는데 그러면 더 나은 사회가 되어야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젊은 세대가 이렇게 힘들어할까.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 보면 항상 미안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기성세대가 잘 몬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젊은 세대가 있는 거....”
“저는 노무현 대통령님이 항상 넉넉하신 분이라고, 그런 느낌을 많이 받고 한 4~5년 같이 생활을 했었거든예. 그래서 우리가 이제 코로나에 진짜 몸과 마음이 완전 이렇게 쫄아, 쪼들려 있잖아예. 근데 이거를 조금 넉넉한 마음으로, 조금 더 마음을 조금 이렇게 더 넓혀서 사람을 바라보고 대화를 해야 되지 않을까. 저는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예. 살면서 보니까. 배타적으로 배척을 하지 말고. 제가 젊었을 때 받은 노무현 변호사님의 그 느낌은, 지금 같으면 그렇게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까 생각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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