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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노무현 ②
평범하고 사소한 노무현 이야기



<노 후보 Life Story> 원고를 타이핑했다는 당시 직원에 대한 정보는 부림사건을 계기로 노무현 변호사와 연을 맺은 송병곤 씨의 아내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유명인물도 아니고, 마땅히 기억하는 사람도 찾기 어려워 단지 원고와 관련한 사실관계들만 확인하고자 그를 찾았다.

부산에서 만나본 당시 여직원 임영미 씨는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한 질문들에 연신 ‘너무 사소한 것’이라며 민망해했다. 실제로 평범한 한 사람이 옆에서 지켜봐 온 평범한 노무현의 일상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어느 인류학자의 “대단치 않아 보이는 사소한 것들에 실제로는 본질이 담겨있다.” (Marcel Mauss. 『Manual of Ethnography』(1967) 中)는 말처럼, 임영미 씨가 전해준 ‘사소한’ 이야기 속에는 어떤 묵직한 너울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밤새워 받아 적은 <노 후보 Life Story>




지금은 한 가정의 어머니이자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였지만, 30여 년 전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했던 시절을 떠올릴 때는 다시금 꿈 많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저는 옛날에는 타이프(타자기)가 있었어예. 그러니까 법원 사무실의 모든 직원들이 준비서면이라고 변론 준비를 하면 변호사님부터 이래 원고지에 글씨를 이렇게 써가지고 저를 넘겨주거든예.... 옛날에는 먹지를 넣어서 법원에 하나 원고 하나 피고 하나 우리 하나 이라면, 항상 넉 장 씩 이래 끼워서 돌려서 이래 치면 사본 네 부가 나오면 이제 법원에 한 통 뭐 이런 식으로.... 그런 작업을 많이 했지예.”

1984년 여름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에 입사한 임영미 씨는 1988년 노무현 변호사가 부산 동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될 무렵까지 ‘타이피스트’로 일했다고 한다. 선거가 다가오며 그의 일정도 함께 바빠졌다. 1988년 봄 어느 날 밤을 세워가며 <노 후보 Life Story>를 타자기 위로 옮겨 담았다고 한다.



“동부 인제 선거가 나가게 되었잖습니까? .... 댁으로 가서.... 그날 집에서, 새벽에.... 타이프를 갖추고 쳤던 기억이 있어예. 있고, 이제 내가 너무 지쳐가지고 저 작은 방에서 자고 있는데…… 노크를 하면서 칠 게 있다고, 그래서 다시 제가 나와가지고 새벽까지 타이프를 친 기억이 있거든예....  저희들한테도 이런 술자리에 한 번씩 앉으시면, 이런 사소한 고민 같은 것도 얘기를 많이 하셨던 그런 기억이 있네예.... 항상 고민하는 그런 변호사님이었던 것 같아예. ”

밤새워 타자기를 쳤지만,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원고의 내용이 평소 노무현 변호사가 자주 되뇌던 말들이라 익숙한 덕이었다. 그 내용들이 가식이나 위선 없이, 지극히 진솔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소한 것’이라는 말과 달리, 노무현 변호사와의 추억들에 대한 그의 기억은 꽤나 또렷했다. 오히려 사소하지 않았기에 또렷했던 것은 아닐까, 노무현 변호사와의 첫 만남부터 국회의원 선출까지의 이야기를 더 요청했다.


‘촌사람’ 같던 노무현 변호사와의 첫 만남




온통 회색 빛깔 사무실이었다. 대리석을 모방해 만든 테라조 타일, 철제 책상과 철제 캐비닛, 수북이
쌓인 서류뭉치들까지. 회색 풍경 끄트머리의 원목 책상이 그나마 화사한 축에 속했고, 책상 유리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아래에 깔아놓은 초록색 부직포는 유난히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 위에 ‘辯護士 盧武鉉(변호사 노무현)’이라는 글씨가 파인 검은색 자개명패가 어질러진 책상 위로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잿빛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임영미 씨는 안 그래도 ‘입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고 했다. 상고를 갓 졸업하고 잘 다니던 회사를 돌연 그만두라고 했던 어머니는 친척 집안으로부터 일자리 주선이 들어왔으니 그 곳에서 일하라고 고집했다.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이 어디 있는데예!” 라며 대들었지만, 돌아오는 건 어머니의 호된 꾸지람뿐이었다. 뾰로통해진 그는 마지못해 부민동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촌사람 같아예, 촌 아저씨. 예, 촌 아저씨 같아예. 그날따라 양복도 제가 딱 기억이 나는 게, 밤색 양복을 입으셨더라고예……. 밤색 양복을 그날 제가 갔는데 입고 계시니까 더 촌 아저씨 같은 느낌, 조금 그런 느낌이었거든예. 그러니까 생김새도 왜 시골사람처럼 생기셨잖아예. 그러니까 아 저분이 노 변호사님이구나…….”




‘촌사람’ 같던 노 변호사의 첫인상과 위아래 없는 사무실 분위기에 새초롬했던 마음이 금세 누그러졌다. 사무실 가구배치를 가지고 하루걸러 하루씩 부리는 변덕에 ‘아! 우리 노변은 말이야, 뭐 금방 이랬다 금방 저랬다’라며 면박을 줘도, 출근 한 시간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민법 강의 도중 ‘변호사님! 이 뭐 이 공부 뭐 필요합니꺼’라고 볼멘소리를 해도 아무 문제없던 사무실이었다.

“항상 이렇게 이래 허리를 낮추어서 인사하는 그 모습이 항상 기억에 남습니다. 변호사라하믄 왜 조금 어깨에 힘도 주고 막 이럴 건데 진짜 노 변호사님은 진짜 그런 건 없었습니다.”



평범한 일상들, 그 안의 큰 울림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에서의 기억은 임영미 씨에게 꽤나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은 듯했다. 시대를 앞서 나간 듯한 노무현 변호사의 일화를 들려줄 때는 특히나 눈이 반짝였다.


“우리 시절에는, 그 시절에는 기본적으로 아가씨가 취직을 하면, 이래 청소, 커피 타는 거는 다 기본인 걸로 알던 시대였어예. 저희 친구들도 다 이렇게 들어갔는데 보니까 다 뭐 이렇게 기본 하는 게 청소부터 커피 타는 것, 손님.... 그런데, 저는 이 사무실에 있으면서 한 번도 커피를 탄 적이 없어예.... 변호사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예.”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어머니’들과 관련한 기억은 특히 애틋하게 남아있는 듯했다. 누구의 아들도 아닌 ‘우리’ 아들들을 위해 거리로 나섰던 어머니들은 그야말로 ‘장난 아니었던’ 어머니들이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들을 진심으로 대했던 노 변호사라고 기억했다.

“민가협 어머님들이 오시면 변호사님이 다른 사업자들하고 상담을 많이 하시잖아예. 하시다가도 ‘변호사님 민가협 어머님들 오셨습니다’ 이래하면 정말 한 치의 주춤도 없이 바로 일어나셔서 나오세요.... 항상 90도로 이래 인사를 하시면서 어머니들 어서 오시라고.... 어머님 차례가 아니신데도 정말 정중하게 어머님들을 모시세요.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시든지 항상 이렇게 진심으로 들어주시고, 그게 항상 고마웠다고 저희 어머님이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볼 때도 어느 손님보다, 돈 되는 손님보다, 민가협 어머님들 돈은 안 되시잖아....”




임영미 씨는 20대 초반 노 변호사 사무실에서 보낸 시간들은 그 스스로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줬다고 했다. 누군가의 회유나 강요가 아닌, 노무현 변호사와 사무실 직원들의 일상을 지켜보고 곱씹으며 스스로 만들어간 변화였다.

“제 기억으로는 중 2때,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거든예, 79년도에. 그 앞에 육영수 여사님이 돌아가셨고. 제가 중학교 때 그 모든 게 있었는데, 학교에서 막 이렇게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생각은, 아 내가 이 대통령, 이 훌륭한 대통령님 밑에 있으니까 내가 이걸 열심히 해서 진짜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이렇게 치료를 해줄 수 있는 간호사, 간호부가 되어야지, 이런 마인드, 그런 게 진짜 많았었거든예....

그런데 여기를 또 왔는데 완전히 다르게 해석을 하고 다르게 이해를 하고 다르게 말을 하시니까 혼란은 조금 있었어예. 막 이 사람들이 그래 전두환 대통령이 말하는 그런 빨갱이, 빨갱이인가 간첩인가, 진짜 그런 생각 많이 했었거든예.... 그런데 이제 책을 보고 사람을 이렇게 대하고 보니까 누구보다도 진실하고 착하고 순수하고....  그런데 이제 결정적으로는 노 변호사님이 거기에 모든 거를 지원을 하고 동참을 하셨기 때문에, 저는 백 프로 의심 이런 거 없이 그냥 쏙 빨려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인생에 가져다 준 선물,
노무현이라는 사람




<노 후보 Life Story>에서 ‘청년’ 송병곤 씨는 노 변호사뿐 아니라 갓 사무실에 입사한 임영미 씨의 마음도 움직였다. 임영미 씨가 변호사 사무실에 입사하던 첫 날, 3개월 입사 선배인 송 씨는 퇴근 길 갑자기 내리는 비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첫 설렘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함께 밥을 먹고,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어느 날인가는 경찰에게 트집잡혀 함께 파출소에 끌려갔다가 노발대발 하며 파출소 문을 박차고 들어온 노 변호사 덕분에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이렇게 노무현 변호사와의 인연을 계기로 만난 둘은 동고동락하며 사랑을 키워갔고, 결국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노 변호사가 그들에게 남긴 결혼 선물은 30년 동안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퇴색될 만도 한데 오히려 더 찬연하게 반짝이고 있는 예물이었다.

1990년 둘의 결혼식 주례를 맡게 된 국회의원 노무현은 예정된 시간 보다 한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식장에 도착했다. 부부는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빴던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시작한 노 의원의 주례사는 한 시간 쯤 지각이야 없던 셈 쳐도 좋을 만큼 부부에게 소중한 선물로 남았다.

“노 변호사님이 주례를 하면서 하신 말씀 중에, 둘만의 사랑을 하지 말고,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신랑 신부에게 말씀을 하셨거든예. 그래서 그 의미는, 우리 둘만 좋아하지 말고, 양쪽에 가족, 더 크게는 양쪽에 노동자, 내가 아는 모든 노동자, 이렇게 아는 사람들을 많이 도울 수 있고 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항상 본보기가 돼야 되겠다. 아이들에게,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한테, 그런 모습은 보이고 살아야 안 되겠다. 큰일은 하지 몬해도,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저는 살았거든예. 그래서 송병곤 씨가, 그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또 우리 노 변호사님이 주례하시면서 부탁하신 말씀대로 내가 잘 하고 살아야 되겠다, 잘 살아야 되겠다, 라고 항상 저는 그렇게 하고 한 30년을 살았습니다.”


1988년 그리고 2021년




결혼식에서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당부를 여전히 간직하고 사는 임영미 씨. 지금은 그 선물을 다른 사람과도 나눠가고 있다고 한다. 슬하의 아이들과도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를 자주 나눠왔고, 성년이 된 아이들은 봉사활동과 사회공헌 활동을 종종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영미 씨는 회한이 가득한 듯했다. 2021년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특히나 크게 느껴지는 미안함이었다.

“우리는 항상, 송병곤 씨나 저는 젊은 세대한테 진짜 미안해요.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 젊은 세대가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어떻게, 치열하게 산다고 살았는데 그러면 더 나은 사회가 되어야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젊은 세대가 이렇게 힘들어할까.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 보면 항상 미안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기성세대가 잘 몬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젊은 세대가 있는 거....”

1988년의 시민 노무현, 그리고 그를 지켜봐 온 또 다른 평범한 시민. 2021년 노무현이 없는 오늘을 향해, 그 평범한 한 사람이 ‘사소한’ 이야기를 끝맺으며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대신 전해주는 듯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님이 항상 넉넉하신 분이라고, 그런 느낌을 많이 받고 한 4~5년 같이 생활을 했었거든예. 그래서 우리가 이제 코로나에 진짜 몸과 마음이 완전 이렇게 쫄아, 쪼들려 있잖아예. 근데 이거를 조금 넉넉한 마음으로, 조금 더 마음을 조금 이렇게 더 넓혀서 사람을 바라보고 대화를 해야 되지 않을까. 저는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예. 살면서 보니까. 배타적으로 배척을 하지 말고. 제가 젊었을 때 받은 노무현 변호사님의 그 느낌은, 지금 같으면 그렇게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까 생각이 듭니다.” ■



※ 2021년 2월 2일 노무현재단 유튜브 채널을 통해
<1988; 노무현> 영상콘텐츠가 공개될 예정입니다.




  • 강성민 / 사료콘텐츠팀
  • 2021.01.25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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