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1절 연설메모, 북 백화원 방명록 등 친필 68건도 첫 선
노무현사료연구센터, 상반기‘온라인 노무현사료관’정례업데이트
1987년 2월 7일 ‘고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에서 연행된 변호사 노무현과 문재인의 진술조서가 처음 공개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시기 남긴 68건의 친필기록도 새로 확인할 수 있다. 노무현사료연구센터는 9일 노무현사료관을 통해 두 변호사의 진술조서를 비롯, 노 대통령의 친필메모 56건과 방명록 글 12건을 공개했다. 노무현사료연구센터는 노무현재단에서 노 대통령 사료편찬사업을 전담하는 기구다.
1987년 노무현, 문재인 두 변호사의 진술조서는 경찰조사에 대처하는 두 사람의 대조적인 태도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자료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2월 7일 전국적으로 ‘고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가 열리는데 이날 부산에서 집회에 참여한 노무현, 문재인 두 변호사가 모두 경찰에 연행됐다. 진술조서를 보면, 노무현 변호사는 불법연행에 항의하며 경찰 조사에 일체 응하지 않고 서명날인도 거부한다. 질문에 대해 ‘묵묵부답’이나 “말 할 수 없다”고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태도는 부산 북부경찰서에서 작성한 1차 진술조서, 부산시경찰국(현 부산지방경찰청)으로 넘겨진 2차 조서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부산시경찰국 조사에서는 경찰이 ‘진술대신 사담 형식으로 대화를 하자’는 요청에 응했다가 그 내용을 바로 조사대상으로 삼자 노 변호사가 거세게 항의하는 대목도 나온다.
문재인 변호사의 진술조서는 노 변호사의 것보다 빼곡하다. 조사에 응하며 추도회의 정당성, 공권력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술조서에 문 변호사가 “이번 추모제는 국민들의 정당한 요구인데 그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하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노무현사료연구센터는 노 대통령의 친필기록 68건도 함께 공개했다. 여기에는 노 대통령이 북한 백화원에 남긴 방명록 촬영본도 포함되어 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방북한 노 대통령이 2박3일 동안 머문 백화원 영빈관을 나오면서 작성한 것으로 ‘아름다운 백화원에서, 따뜻한 환대에 감사합니다. 2007.10.4.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이라고 적혀있다. 아울러 2004년 제85주년 3·1절 기념사와 관련, 보좌진의 착오로 주요 메시지가 연설문에 반영되지 않아 노 대통령이 당일 직접 내용을 정리한 연설메모,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기각 결정으로 직무에 복귀한 이후 첫 외부강연이었던 2004년 5월 27일 연세대 특강을 위해 작성한 친필메모도 볼 수 있다. 이밖에 노 대통령이 각종 회의와 행사에 참석해 현장에서 기록한 친필메모를 통해 대통령의 메모가 어떻게 발언이 되고, 연설이 됐는지 확인할 수 있다.
노무현사료연구센터는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 연 2회 노무현사료관을 통해 노 대통령 사료를 추가 정리·공개하는 정례 업데이트를 시행하고 있다. 이번에 새로 공개한 사료들은 검색창을 활용하거나 노무현사료관 ‘형태별 사료’의 하위메뉴 ‘문서’, ‘시청각’ 등에서 ‘최근 등록순’으로 정렬해보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2011년 출간 <문재인의 운명>에 기술된 ‘2·7추도회’ 연행사건
나중의 일이지만, 1987년 고(故) 박종철군 추모집회로 같이 연행됐을 때도 그랬다. 잡혀가서 조사를 받게 됐다. 나는 조사에 응하면서 정당성을 주장하는 식으로 임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노 변호사는 아예 진술을 거부했고 서명날인조차 거부했다. 연행돼 조사받는 자체가 불법·부당하므로 일체 조사에 응할 수 없다고 버틴 것이다. 처음 겪는 상황이고, 더구나 변호사로서 조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뜻을 고수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후일 정치인이 된 노무현의 원칙주의라고 생각한다. 대의를 위해 자신에게 불리한 길까지 선택하는 것이 그의 원칙주의라는 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 그뿐 아니다. 대의를 위한 실천에 있어서도 한계를 두지 않고 철저한 것. 이것이 그의 또 다른 원칙주의이다. (49-50쪽)
❚ ‘2·7추도회’와 노무현 변호사에 대한 검찰의 ‘영장발부 종용사건’
1987년 2월 7일 부산지검은 경찰에서 송치한 노무현 변호사에 대해 하루밤새 무려 네 차례에 걸쳐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초유의 일을 벌인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차장검사 등 간부들을 동원, 부장판사를 법원으로 다시 나오게 하거나 자택까지 찾아가 영장 발부를 종용했고 법원은 이를 모두 기각했다. 대한변호사협회와 부산지방변호사회 등은 검찰의 ‘영장발부 종용사건’을 중대한 사법권 침해라고 판단, 진상조사에 착수하는 등 파문이 이어졌다. 자서전 <운명이다>에는 이 사건으로 “부산에서 ‘노변’으로 통했던 내 이름이 처음으로 부산 지역 밖으로 알려졌다”(91쪽)고 기술되어 있다.
○ 문의 : 노무현재단 노무현사료연구센터 본부장 김상철 070-7931-0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