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1981년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일을 “내 삶에서의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돈 잘 벌던 변호사는 인권변호사, 재야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겪은 충격과 변모과정은 노 대통령도 적지 않게 언급했습니다. 이에 대한 고호석 씨의 구술은 그 과정을 직접 지켜본 인사로서 일련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1981년 9월 부산에서 발생한 부림사건은 당시 반독재투쟁의 중심이었던 학생들을 용공혐의로 대거 구속함으로써 이들을 대중들과 격리시키기 위해 조작한 대표적인 용공사건이었습니다. 부산지역 민주인사들이 이적 표현물을 학습했다는 이유로 정부전복집단으로 매도되어 총 22명이 구속됐고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습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3>). 고호석 씨는 22명의 구속자 가운데 한명이었습니다.
고호석 씨는 구술 인터뷰에서 어느 날 변호인 접견으로 시작된 일련의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변호사 노무현은 발톱이 썩어 빠져버릴 정도의 모진 고문을 당한 청년들을 목도하며 엄청난 충격을 받고 이들의 공소장에 나오는 책들을 하나하나 다 읽으며 공소사실의 터무니없음을 절감합니다. 구술의 한 대목입니다.
"노무현 변호사님은 우리와 재판을 시작하고부터는 우리와 한 편이었어요. 거의 공범 수준이 돼가지고 변론을 한 거지요. 그러다보면 우리는 비교적 차분한데 노 변호사님이 검사의 공소사실, 질문 이런 거에 대하여, 또는 판사의 언급에 대하여 ‘어떻게 그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러면서 감정적으로 격앙이 되면서 막 큰 소리를 내기도 하고 그래서 판사한테 제지를 당하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정말 한 번씩은 막 이렇게 열변을 토하다가 자기감정을 삭이지 못해서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잠시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그런 장면들도 있었어요."
세속의 변호사는 그렇게 함께 분노하고, 행동했습니다. 나중엔 피해자 가족들이 노 변호사 때문에 판사에게 밉보여 형량을 더 많이 선고받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노 대통령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변화의 순간, 고호석 씨의 구술을 통해 직접 접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