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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가 / 정치인
 
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전교회장에 출마하며 
"작은 고추가 더 맵심더"
1962년
 
부림 사건의 변론을 맡던 날 밤 권양숙 여사에게 한 말 
"끔찍하다. 우리 아들도 머지않아 대학가는데 이런 사회는 안 된다"
1981년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아 고문당한 상처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온 몸에 시퍼런 멍 자국이 남아 있었고, 변호사인 나조차 믿지 못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다"

1981년
 
대우조선 파업으로 구속되어 면회온 자녀에게 

"아버지는 죄지은 게 아니다"

1987년
 
부산지검 정현태 검사 취조를 받으면서 너무 정치적이거나 지나치다는 질문에 

"나는 개인적으로 정치적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시민으로서 정치적 권리는 보장돼야 하고, 그 행사는 시민의 의무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법조인이라면 법률적 방법으로 대응해서는 스스로의 권리는 물론 시민의 권리조차 옹호할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1987년
 
청문회에서 정주영 증인이 "나는 시류에 따라 산다"라는 답변을 하자 이에 대해 반박 질문 

"시류에 순응하는 것이 힘이 있을 때는 권력에 붙고 힘이 없을 때에는 권력과 멀리하여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가치관의 오도를 가져오게 하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킨다고 보지 않습니까"

1988년
 
3당 합당을 반대하며 

"야권을 분열시키고 군부독재에 면죄부를 주는 정치야합은 결코 용납할수 없다"

1990년
 
통일민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3당 합당에 대해 ‘이의가 있느냐’고 묻자 홀로 이에 대해 반대하며 

"이의 있습니다"
                                                                          

1990년
 
신동아 ‘김영삼, 김대중 총재님께 드립니다’ 중에서 

"소리 없는 국민다수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진짜 정치인이라는 생각 때문에 싸워갈 것입니다"

1990년
 
14대 총선에 출마해 낙선한 이후 

"사람은 자기가 설 자리에 서야 합니다. 남자는 죽을 자리라도 가야 할 땐 가야 합니다"

1992년
 
부산지역정책연구소를 여는 것을 계기로 부산서 정치승부를 걸겠다며 

"정치하는 사람은 명분이 있어야 하며, 명분 없는 정치는 결국 감투싸움밖에 안 된다. 부산에서 명분을 지키는 것이 정치인의 도리"

1994년
 
부산역 광장유세에서 정치인들의 변절과 변신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정치인도 우리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 우리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역사를 한번 만들어보자"

1995년
 
민주당 탈당설을 일축하며 

"손해를 본다고 해서 보따리를 싸는 철새정치인은 될 수 없다"

1995년
 
15대 대선 TV찬조 연설중에서 

"야당하다 여당으로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야당없는 민주주의는 없고 정치를 동서로 가르면 나라도 동서로 갈라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 배지만 바랐다면 14, 15대 언제라도 줄서서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지 않았습니다. 세 번이나 연거푸 떨어지고도 김정길의원과 저는 아직 가능성 있는 정치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의와 명분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1997년
 
또 다시 현대차 사태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현장을 방문해 중재
하겠다

"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1998년
 
현대자동차 파업 중재에 성공했을 때 '정치를 해오면서 특별하게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원칙이나 신념'을 묻는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화살을 잘 피하고 물살을 잘 타는 사람의 묘기를 지켜보면서 재미를 느끼지만 아주 거대한 흐름에 굽히지 않고 부딪쳐 나가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비바람을 뚫고 나가는 꿋꿋한 모습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그 사회의 희망과 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회에 그런 기상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사회적으로 큰 위기가 왔을 때 그것을 돌파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통성, 선명한 노선을 강조하면서 정치를 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원칙을 지키면서 정치를 할 것입니다"

1998년
 
기자회견 이후 말지 인터뷰에서 어떤 논리로 지역민심을 설득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 답은 희망입니다. 사람은 희망이 있으면 당장의 현실은 어렵더라도 정서가 결집될 수 있습니다"

1999년
 
기자회견을 통해 16대 총선에 부산 경남에 출마해 망국적
지역감정을 극복하겠다며 

"지역갈등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맙니다. 똑같은 사실도 지역을 오가면 백이 흑이 되고, 흑이 백이 됩니다. 이 상황에서 진보와 보수가 어디 있으며 정당간의 정책경쟁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런 지역 갈등은 정치의 존립 근거는 물론이고 결국은 나라를 망칩니다"

1999년
 
"대결과 투쟁의 시대를 마감하고" 제105회 임시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당선 직후 바로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당장 노동자들로부터 IMF가 요구한 정리해고제를 받아내야 하는 절박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대화와 타협에 기초한 노사협력관계를 구축하겠다는 대통령의 철학이었습니다. 제1차 노사정위원회의 합의, 그것은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져도 좋을 만한, 그런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1999년
 
 "21세기 한국정치의 과제와 전망", 팍스코리아나 21포럼에서

"꿈이 역사를 만듭니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고 있는 무렵, 콘래드 아데나워라는 젊은이가 독일 북부의 작은 교회에서 "유럽은 하나로 합쳐야 한다"라는 자신의 꿈을 주제로 연설을 한 것이 있습니다. 그 젊은이는 그 이후 1952년 서독의 수상이 됩니다. 수상이 되면서부터 구주석탄동맹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이 발전하여 구주공동시장이 되었고 현재는 단일통화까지 사용할 정도로 유럽이 통합되었습니다"

1999년
 
뉴스메이커 인터뷰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아서 불리한 점이 있냐는 질문에 

"살아온 경험에서 만들어진 사고와 정서, 가급적 풍부한 경험과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자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1999년
 
평소 정치철학을 묻는 질문에 

"자신의 안일과 입신을 위해 대의를 저버리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은 타협하고 조정할 수 있지만 원칙과 신념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1999년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투명하게 가급적이면 넓게 정보를 공유하는 방법을 이용한다며 

"정보를 공유할 때 가장 일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지고 또 커뮤니케이션의 오해도 없고 일하는 사람이 가장 높은 의욕을 가진다"

2000년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다른 어떤 수단보다 목표가 정당하다고 느낄 때 함께 할 수 있으며, 조직에서 함께 한다고 마음을 모으면 어떤 어려운 일도 잘 풀어낼 수 있다며 

"목표가 정당할 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2000년
 
해양수산부 취임식에서 일을 추진하다 생긴 실수는 내가 책임지며, 일을 하지 않으면 직원들이 져야 한다며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2000년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자리를 놔두고 부산으로 내려가 출마하여 낙선한 후에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습니다"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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