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의 무덥던 날, 전남 광양에서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봉하마을을 방문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대화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풀밭을 뛰어다니는 방아깨비와 귀뚜라미에 관심이 쏠린 아이들에게 대통령은 뒷전입니다. 함께 곤충을 관찰하던 노 대통령이 마침내 “이 중에 대통령 되고 싶은 사람 있어?”하고 ‘본론’을 시작하자 몇몇이 손을 들었습니다. 방아깨비를 괴롭힌 친구를 향해 “잔인한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어!” 외치는 어린이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소개드린 내용은 올해 5월 문성필 님이 기증해주신 영상 일부입니다. 이날 방문을 계획하고 영상을 직접 촬영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문성필 님은 영상 외에도 제16대 대통령 취임식 초대장 및 취임사 소책자와 입장배지, 그리고 청와대방문 기념품 등을 함께 기증해주셨습니다. 사연을 여쭙자 200자 원고자 32장 분량의 답신이 돌아왔습니다.
조중동과 맞서던 정치인, 그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다
문성필 님이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조중동과 맞서는 정치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언론개혁에 관심 많던 대학생에게 주류언론에 굴복하지 않는 정치인 노무현의 존재는 신선한 감동과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2002년, 국민은 노무현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듬해인 2003년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제16대 대통령 취임식에는 사전신청을 통해 초대된 2만여 명의 국민이 함께했습니다. 참석 인원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였습니다. 기증자인 문성필 님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취임식 당일은 무척 추웠습니다. 취임식장까지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이동했는데 들뜬 사람들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입구 검색대를 통과할 때 지금 가지고 있는 취임식 연설문 책자와 플라스틱 배지를 받았습니다. 제자리는 대통령 연설무대와 가까웠고 식전행사로 안숙선 명창의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후 양희은 씨의 상록수 노래도 있었고, 본 행사 때 애국가는 임형주 씨가 불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를 언급하였으며 이후 동북아 정세, 남북관계 등 여러 현안들에 대해 대국민메시지를 전했습니다.
2008년, 봉하에서의 두 번째 만남
취임식 이후 문성필 님은 여느 국민처럼 TV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을 접했고, 기사를 읽음으로써 대통령의 생각을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2004년 2월 학생들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하기도 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다시 만난 건 앞서 소개한 2008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날 대통령과의 만남을 앞두고 문성필 님은 2003년 취임식에서 받았던 자료들을 따로 챙겼습니다. 대통령기록물 반환 문제로 봉하마을과 청와대 간 공방이 오가던 무렵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을 만나 취임연설문 책자를 보여드리고 ‘여전히 많은 지지자들이 있으니 힘내시라’는 응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봉하마을 도착 후 약속장소에 다다라서야 이를 버스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돌아갔다 오기에는 시간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빈손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마주했습니다.
무척 긴장한 저는 먼저 대통령께 악수를 청했고 대통령은 흔쾌히 악수를 받아 주셨습니다. 당시는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일반 휴대폰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따로 챙겨갔는데 저장 메모리는 128MB였습니다. 적은 용량 탓에 사진 촬영은 포기하고 동영상모드로 전환하여 대통령의 말씀을 영상으로 기록하기로 하였습니다.
너무 더운 날씨 탓으로 대통령이 오기 전 아이들은 이미 지쳐 자리 정돈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대통령은 곤충과 같은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셨고 이후 꿈에 대해 잠시 이야기 했습니다. 당신의 판사 시절 이야기도 하시면서 판사를 그만두게 된 소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방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신 대통령은 결국 선생님들에게 웃으면서 “이래서 아이들에게 무슨 설명을 할 수 있겠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대통령은 모둠으로 나누어진 아이들과 기념촬영을 한 후 사저로 향했습니다.
인간적 매력 있던 정치지도자…오래도록 널리 기억되길
영상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아이들에게 “너희들 중구난방이 뭔지 알아? 너희들이 버스 안에서 떠드는 모습 그게 중구난방이다.”라고 말합니다. 훌쩍 자랐을 이 아이들이 ‘중구난방’이라는 단어 앞에서 오래전 함께 방아깨비를 잡던 대통령 할아버지를 떠올릴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제가 노무현 대통령과 맺은 추억과 인연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분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인간적인 매력과 정치지도자로서 그의 견해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기에 지지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 취임식에 초대받을 수 있었고, 퇴임 후 아이들과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우연이고 행운입니다.
오래 간직하셨던 소중한 사료를 노무현재단에 기증해주신 문성필 님께 감사드립니다. 남겨주신 말씀처럼 이 사료들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면모를 알게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