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
“무슨 말씀을 드릴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오늘은 문제의 본질에 정면으로 한번 부닥쳐 보고 싶습니다.”
2005년 8월 25일 오전, 임기를 딱 절반 앞둔 노무현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이날 밤 10시부터 100여 분간 KBS TV를 통해 방송된 ‘참여정부 2년6개월, 노무현 대통령에게 듣는다’ 녹화를 위해서였습니다.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때이자, 8·31부동산 종합대책 발표를 목전에 둔 시기였습니다.
녹화는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 전문가와 시민의 물음에 대통령이 답하는 방식으로 2시간 30분가량 진행됐습니다. 소개드리는 6장의 메모는 이 질의과정에서 노 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것입니다. ‘말 잘하는’ 대통령의 노하우가 여기에 담겨있을까요? 메모 대부분은 질문을 받아 적은 것입니다. 내용이 많지도 않습니다.
답변하는 동안 노 대통령의 시선은 메모 대신 질문자들을 향했습니다. 부동산정책과 경제전망, 양극화, 대연정까지… 이미 수많은 논의와 검토를 거쳐 머릿속에 잘 정리된 주제였을 겁니다. 무엇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고 솔직하게 대화하고 싶어했습니다. 메모 속 단어들을 실마리 삼아 노 대통령이 우리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본질’을 들여다봤습니다.
“시장실패 영역, 정책으로 보완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
첫 질문은 부동산정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금리’, ‘지역개발’, ‘뒷북행정’, ‘힘들어간 정책’, ‘사유재산권·정상적 거래·서민 부담’ 모두 질문자가 언급한 단어입니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질문의 전제부터 우선 동의하지 않는다”며 부동산 가격 인상 요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내성입니다. 부동산정책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부동산정책은 어렵습니다. 역대 정부가 계속해서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느냐하면 저항 때문입니다.”
이어 노 대통령은 부동산 부자 편에 선 언론이 ‘세금폭탄’, ‘시장원리 위배’ 등을 내세우며 여론을 만들고, 그 결과 증세와 관계없는 대다수의 국민들까지 정부 정책에 반대하게 만드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국가의 역할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설명도 뒤따랐습니다.
“국민생활을 위해서 시장이 존재하는 것이지 시장을 위해서 국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국민경제가 먼저 있고, 그 국민경제를 운용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 시장이기 때문에 시장인 것이고, 시장에서 실패한 것은 국가가 정책으로 시장의 실패를 보완해 주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부동산이야말로 시장이 완전히 실패한 영역입니다. 양극화나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가장 첫 번째 정책이 부동산정책입니다.”
‘경포대’, 그리고 ‘29%의 사랑’
문답에 없는 내용을 메모한 것도 눈에 띕니다. ‘양극화’ 관련 질문에 ‘세계’까지 쓴 뒤 줄을 긋고 써넣은 ‘8.15경축사’가 그렇습니다. 녹화 열흘 전이던 8월 15일 광복 제60주년 경축사를 떠올렸던 걸까요? 이날 노 대통령은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은 나라의 장래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며 “양극화가 이대로 진행되면 감당하기 어려운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되고 지속적인 성장기반 마저 무너질 수도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25일 답변은 ‘세계적 현상’과 ‘세계최악은 아니다’는 메모대로 양극화 심화 원인과 우리나라의 현실, 그리고 정부의 대응방안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참여정부 들어와서 생긴 일이 아니고, 우리 경제가 세계화된 90년대 초반부터 매우 심각하게 그렇게 변화해 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참여정부 책임 없다’ 이렇게 말씀드리지는 않습니다. 참여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응해 나가겠습니다.”
방청석에서도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안산-시화’에서 온 시민의 말을 받아 적은 메모 끝부분에는 ‘경포대’라고 썼습니다.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라며 당시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이 노 대통령을 공격하던 말로, 역시 질문에 없는 단어입니다. 강조하듯 동그라미까지 그려 넣었지만 노 대통령이 이를 직접 언급한건 한참 뒤였습니다. 참여정부의 성과를 묻는 질문에 정부혁신을 꼽으며 전산시스템인 ‘이지원’을 이야기하던 중이었습니다.
“여러분 ‘경포대’란 말 들어보셨죠?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 이렇게 경제를 매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자랑삼아 한번 얘기를 해보고 싶고, 이 시스템만 생각하면 아무리 골치 아픈 생각을 하다가도 기분이 좋습니다.”
‘29%의 사랑’은 “29% 지지도를 가지고 국정을 계속해서 운영하는 것이 과연 책임정치의 뜻에 맞는 것인가에 대한 원론적인 고민이 있다”는 노 대통령 모두발언에 한 시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29%의 국민들은 아직도 사랑과 관심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용기 있게 계속해서 국정 운영해 달라”고 응답한 것을 메모한 것입니다. 부동산정책에 관해 ‘정부만 믿었던 내가 한심’하다던 중산층 주부의 말은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썼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는 “모두 피부에 와 닿는 아주 실감나는 문제”라며 순서대로 하나하나 정부 입장을 설명하고 국민 앞에 이해를 구했습니다.
연정으로 분열의 시대 건너야…“신하로서 과감한 거역하고 있는 것”
‘삼봉 정도전’은 대연정 질문에서 등장했습니다. ‘백성은 군주의 하늘’이라는 정도전의 말을 들어 국민과 야당의 반대에도 대통령이 연정에 집중하는 이유를 물은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대통령이었습니다. 메모도 두 장에 걸쳐 이어집니다.
“왜 연정문제를 들고 나왔느냐, 한국사회 발전을 위해 극복해야 될 가장 큰 장애요소가 바로 불신과 적대의 문화입니다. 지금 갑자기 생각한 것이 아니라 1990년 3당합당에 참여하지 않고부터 생각한 것입니다. 독재의 시대가 지난 다음에 분열의 시대라고 하는 이 질곡을 하나 더 넘어야 비로소 합리적인 발전이 보장되는 사회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게다가 우리 정부가 약체정부입니다. 여소야대가 구조화돼 있습니다. 지역구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약체정부가 구조화돼 있는데 이 구조를 고치지 않고 대통령한테 결과만 내놓으라고 합니다. 답은 나와 있습니다. 새로운 것도 아닙니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답은 그것인데 못한 것 아닙니까? 약체정부로서는 중요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역구도와 분열 극복을 위한 노 대통령의 고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약 한 달 전이던 7월 28일 대연정을 제안하며 노 대통령은 “지역주의 극복은 정치생애를 건 목표이자 대통령이 된 이유”이며 “그것은 역사에 대한 저의 의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답변을 마무리하며 노 대통령은 다시 ‘백성은 군주의 하늘’이라는 처음 화두로 돌아갑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철학과 연정 제안에 담긴 진정성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명쾌하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다른 사람들하고 왜 자꾸 다른 얘기하냐?’ 그런데 옛날부터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 그렇게 하면 정치 못한다고 했는데, 저는 대통령이 됐지 않습니까?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정면으로 부닥쳐야 되는 문제는 정면으로 부닥쳐야 됩니다. 이것으로 인해 제가 곤경에 빠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곤경에 빠질 것을 두려워해서 할 일을 다 못하면 대통령으로서 무슨 보람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이 문제를 놓고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제왕의 자리인가, 신하의 자리인가 정말 골똘하게 고민해 왔습니다. (중략) 신하는 쫓겨날 때는 쫓겨나더라도 그 시기에 올바로 말하고, 충직하게 간언하고, 정직하게 소신에 따라서 일하는 것이 올바른 신하 아닙니까? 저는 대통령을 국민의 신하로 생각하고 지금 과감한 거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 다하고 싶었던 노 대통령의 ‘진심’
마지막 장에는 언론과의 관계, 그리고 과거사 정리에 대한 질문을 각각 메모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광복절 경축사에서 노 대통령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세 가지 분열적 요인으로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분열의 상처”, “정치과정에서 생긴 분열의 구조”, “경제적·사회적 불균형과 격차로부터 생길지도 모르는 분열의 우려”를 든 바 있습니다. 과거사 정리와 대연정 제안, 그리고 양극화 극복은 이에 대한 노 대통령의 해답이었습니다.
“어느 나라나 역사는 정리를 해둬야 됩니다. 과거사 얘기를 제가 다시 한 이유는 피해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반드시 치유해줘야 됩니다. 국가권력의 도덕성은 무한대라야 합니다. 거기에 시효가 있을 수 없습니다. (중략) 국가권력의 남용에 의해서 저질러진 범죄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제도를 개선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고, 또 교육해서 역사에 뚜렷한 교훈을 남기자, 이것이 역사를 정리해야 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이날 방송은 9.6%의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동시간대 해당 방송국의 프로그램 시청률보다는 높은 수치였습니다. 야당과 언론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 ‘자기합리화와 책임전가’, ‘과거사공화국’ 등의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특히, “권력을 통째로 내놓으라면 검토할 수 있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집중포화의 대상이었습니다. 유시민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은 방송 다음날인 26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대통령의 존재나 임기 등이 걸림돌이 되면 그런 것까지도 다 논의하겠다는 뜻”이라며 ‘하야선언설’을 일축했습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이 전부다 야합으로 비춰지고 대통령의 직무유기로 비춰지고 국민과의 약속 위반으로 비춰지는 현재 우리의 언론보도와 정치문화에 대한 답답함을 대통령이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고 노 대통령의 발언을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날 대화 처음부터 끝까지 노 대통령이 이야기한 것은 결국 ‘책임’이었습니다. “정직한 대통령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으로,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철저한 민주주의자로서 “29%짜리 대통령과 함께 우리의 미래를 걱정해도 되는가에 대해 국민적 토론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대상을 가지고 속셈을 숨겨 놓고 점잖게만 얘기한다고 우리가 이 문제를 다 풀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노 대통령의 진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KBS 특별방송 ‘참여정부 2년6개월, 노무현 대통령에게 듣는다’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