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띄기
상단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노무현사료관 로고

사료이야기 유의미한 주요 사료를 소개하고 그 배경과 맥락을 정리해 제공합니다.

 

“지역등권론에 무너졌지만 부산에서 희망을 보다”

노무현 대통령 2001년 자전구술 육성④ 부산시장 선거 출마


노무현 대통령은 1995년 민주당 후보로 부산시장 선거에 나섭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경기도지사 후보로 손꼽히고, 서울시장 러닝메이트로 거론됐지만 끝내 부산에 출마합니다. 출마 결심은 동서분열 구도 극복과 부산의 야당 건설이란 명분 때문이었습니다. 선거는 초반까지 우위를 달렸으나, 정계를 은퇴했던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민주당 후보 전북 지원 유세에서 내세운 지역등권론이 지역주의 바람을 불러와 막판에 뒤집어졌습니다. 노무현 후보는 비록 낙선했으나 민주당으로서는 사지나 다름없던 부산에서 37%를 득표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당시 부산 시민들이 보내준 지지 때문에 부산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 2001년 자전구술 육성 음원 

                                                                                    ▶수동으로 재생하기◀


구십이(92)년도의 십사(14)대 총선 부산에서 물을 먹었잖아요? 먹었고, 부산시장 문제를 놓고 가끔 기자들한테 질문을 받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시장(선거)과는 관계없이 부산에 정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부산지역정책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어서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분소 같은 위치를 두고, 부산시장 출마는 생각이 없었어요. (왜냐면) 다들 안 되는 게 뻔하고, 안 된다고 하고 (그랬죠).

구십오(95)년 초부터 김대중 대통령(이사장)이 은퇴해 있다가 슬슬 정치적 발언을 하기 시작하고 정계 전면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거든요. 그 등장이 구십사(94)년 말에 여야 관계 속에서 이기택 대표가 등원 거부 결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등원 거부 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등원 거부 문제와 관련해서 김대중 총재(이사장)가 ‘그건 적절한 판단이 아니다’ (그랬죠). 저도 등원 거부를 반대하고 있었구요. 그 당시 반대하고 있던 터였고, 그렇게 되니까 완전히 동교동과 이기택 (대표의) 싸움이 붙고 나는 동교동 편이 된 셈이에요. (웃음) 정말 본의 아니게.

‘개발론자 시장후보’ 반대만 할 수 없어 직접 나서

1995년 부산시장 시장 선거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명함

그러니까 부산에서, 안 그래도 시장(이 될) 가능성도 없는데 그런 상황이 조성되니까, 말하자면 김대중 총재(이사장) 복귀라는 상황과 내가 등원 거부 투쟁에 대해서 이 대표와 반대편에 서 있다는 그런 상황, 이런 것이 겹쳐서 더 나쁜 상황이 된 거지요. 그러니까 더욱더 시장 나갈 엄두도 내지를 못했고. 근데 어쨌든 여론조사를 하면 제가 또 일(1)위였어요. 부산시장 여론조사를 하면 제가 십구 퍼센트(19%) (지지), 박관용 씨가 십칠(17), 서석제 십사(14), 문정수 구(9), 이렇게 나왔어요. 근데 세 사람 걸 다 보태면 제 십구 퍼센트(19%)보다 곱이잖아요. (웃음) 계산상 보면 명백히 떨어지는 거죠. 안 나간다고, 안 나간다고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어쨌든 걱정은 걱정이지요. 어쨌든 공당에서 부산시장 후보를 못 낸다는 게 얘기가 안 되고. 내야 된다, 걱정은 하고 사람은 찾고 하는 와중에 노력을 했지만 사람 구하질 못하고 있는데, 이기택 대표가 안상영 씨를 교섭을 했어요. 교섭이 됐다 안 됐다 말들이 오락가락하고 이랬었어요.

‘부산의 야당 재건’ 버리지 못한, 버릴 수 없는 명분

부산에서 재야 활동하고 있을 때 한때 공해문제연구소 이사를 했거든요. 그 당시 안상영 시장이 부산에 있으면서 인공 섬을 추진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아주 위험한 개발주의라고 해서 그 당시도 반대를 많이 했고 그 이후에도 옳지 않다, 이렇게 해서 반대가 많았던. 그 양반이 다시 우리 당의 후보로 거론되고 이렇게 하면서 내가 그걸 반대하게 됐죠. 안 된다. 결국 우리 민주당의 부산시장 후보가 관료적 성향, 아까 얘기했다시피 환경에 대한 전혀 마인드가 없고, 마인드가 없는 개발론자여선 안 되고 기회주의가 좀 강하다, 이렇게 반대를 했었죠. 반대를 하다 보니까 결국 내가 나설 수밖에요. 반대를 하다 보니까 대안이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대안이 없으니 내가 나서야지요. (웃음) 그래서 내가 나가겠다, 내가 하겠다, 나서게 됐어요. 그래서 나서야 한다, 나선다, 안 나선다, 이렇게 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내 발목을 잡는, 내가 마음에 갈등이 생긴 일이 두 가지가 있었어요.

하나는 경기도지사 여론조사에서 내가 몇 번 일(1)위로 나온 적이 있었어요. 매력 있잖아요, 경기도지사. 누가 좀 나가라고 권해주면 좋겠는데, 여론조사 일(1)위면 일(1)위이고. (상대방은) 이인제 씨고 이렇게 비교하면 역시 그 경우에도 그 당시 여론조사로서는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여론조사 결과도 나 혼자만 이길 수 있는 것으로 나왔어요. 권해주면 좋겠는데, 권해주질 않아요. (웃음) 권할 형편도 아니고. 당 싸움하느라고 정신이 없고. 그래서 차마 내가 나서자니 명분도 좀 그렇고, 내가 나선다고 해볼까 말아볼까 이런 게 있었는데 결국 그 당시 부산시장 후보 문제에 개입하다 보니까 도리 없이 경기도는 마음을 낼 수가 없었죠. 나설 수도 없었고.

부산시장 후보로 논의를 하고 있는데 후보 등록하는 날까지 조순 시장이 그 당시에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는데, 박찬종 씨가 좀 우세하고 하니까 만회하기 위해서 서울부시장 러닝메이트로,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정무부시장으로 해서 짝으로 한번 밀고 나가보자, 라는 제안이 있었어요. 그건 시장의 득표를 올리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 나는 그렇게 진출하는, 조순 시장이 나이도 많고 하니까 정무부시장, 말하자면 서울의 다음 차기 시장을 바라보는 그런 정치적 행보를 한 번 가닥을 잡아볼 방향으로 겨냥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고 해서. 그것도 그냥 침이 꿀꺽 넘어가는 일인데, 대답을 못하고. 하여튼 그쪽에서 빨리 대답을 요구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에 부산시장 당내 경선 등록 날이 와가지고 결국 부산시장 등록하고 말았죠, 시장후보로 등록을 하고 말았었지요. 경기도에 내가 무슨 연고가 없으니 명분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우물하다가 결국 우리 당에서 부산에 대책은 있어야 되고 부산 몫은 내 몫이고, 그렇게 돼버린 거지(요).

1995년 6월 부산시장 선거 홍보물 제작을 위해 부산시내를 배경으로 촬영하고 있는 노무현 후보 

그러니까 맨날 저 보고, 제가 안정감 없는 정치인으로 돈키호테, 더러 돈키호테라고 얘기하잖아요. 경기도지사 같은 거는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말을 꺼낼 수가 없었어요. 물론 그럴 때 내가 하겠다고 막 휘젓고 다니면 어떻든 간에 누구든지 경선하면 되는 거니까, 다니면 어찌 됐을지 모르겠고. 그때 내가 나갔더라면, 그렇게 해서 내가 후보가 됐더라면 이인제 씨가 오늘 위치가 어떻게 돼있을지도 모르고.

말하자면 그때 내가 부산과의 인연을 딱 눈감고 외면할 수 있었던 그런 계기였지요. 경기도지사도 우리 당에 그 당시 대안이 마땅치 않았던 상황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딱 눈감고 했더라면 지금 (어떻게 됐을지 모르고). 근데 또 지금 생각해보면 또 그래그래 견뎌낸 덕분에 지금 부산의 연고권을 좀 주장할 수 있는, 그때 그렇게 해서 부산으로 갔기 때문에 나름대로 지금 부산에 연고권을 얘기할 수 있는, 동서통합의 적임자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어떻든 그때도 동서, 이런 문제가 있었죠. 결국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끊임없이 부산에 야당을 건설해야 된다, 그 당시 부산에도 야당을 만들어야 된다. 그것이, 김영삼 대통령의 삼(3)당 통합 이후에 부산에 야당을 재건한다는 것이 나한테는 지상의 과제였습니다. 그리고 민주당을 전국 당으로 만든다, 정치의 동서분할 구도는 반드시 극복한다, 이런 것이 내 명분이었기 때문에 그 명분을 벗어던지질 못했던 거라고 봐야죠.

당내 경선과 여론조사, 지지도와 당선가능성의 벽

막상 후보가 딱 되고 나니까, 등록을 딱 하고 보니까 황백현 위원장이 부산시장 후보 당내 경선에 등록을 해버렸어요. 누가 보더라도 그건 뭐 경쟁상대가 아닌데 (웃음) 본인도 그런 의향이 있었던 거 갔고. 그래가지고 경선하면서 얘를 먹었어요. (웃음) 우리가 가끔 상향식 공천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때 내가 겪었던 고생을 생각해보면, 그때 그래가지고 경선이 붙었는데 막상 내가 이기택 대표를 배신했다고 해서 부산의 대의원들이 노무현 후보 물 먹이자, 라는 흐름이 확 돌아버렸어요. 지금 손태인 의원이 부산 와가지고 ‘그렇게 하면 당이 망신을 당한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하고 대의원들을 설득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깨졌을지도 몰라요.

이 이야기를 굳이 한번 끄집어내본 것은 상향식 민주주의 우리 얘기하지 않습니까? 당내에 상향식 공천제도, 상향식 공천제도가 갖는 위험성이 이런 게 있어요. 말하자면 이해관계나 감정적 선동이나 실제로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대의원들한테 표결로 맡겨 놓았을 때 이런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 수가 있습니다. 정치문화라는 게 제도가 아닌 거 같아요. 본선 득표력에서 비교가 되질 않거든요? 비교가 될 수 없는 일이었는데, 혼났어요. 손태인 의원이 와가지고 막 선동하는 사람들 손목잡고 말리고 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웃음)

1995년 부산시장 선거 3일 전인 6월 24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박재동 화백의 만평

근데 막상 내가 후보로 선출되고 나니까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조선일보에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문정수 후보하고 일(1) 대 일(1) 조사에서 내가 훨씬 앞서는 결과가 나왔어요. 몇 대 몇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그때 한 삼십칠 퍼센트(37%) 나왔지, 아마? 이십 퍼센트(20%) 이상 차이가 나는 우세로 나와 가지고. (웃음) 선거를 쭉 하는데, 그 뒤에 부산일보에서 조사를 했는데 ‘누구 지지하느냐.’ 역시 내가 앞섰어요. 훨씬 앞섰는데, ‘누가 될 거 같으냐’ 이러니까 문정수 씨가 훨씬 앞서요. 부산일보가 첫판에는 ‘누구 지지하느냐’라는, 내가 우세한 것을 표제로 뽑아놓더니, 재판(再版)인가, 재판 이후에는 ‘누가 당선될 거 같으냐’로 해가지고 그걸 주 제목으로 뽑아놨어요.

그래 부산일보하고 그때 또 대판 싸웠네, 또. 말하자면 부산일보 누구 사주 뭐 이런 것보다 부산의 정서가, 부산일보사 간부들의 정서가 부산의 정서이고, 부산의 정서가 그렇게 표현돼 나오는 (거죠).

그렇게 우여곡절 겪으면서 했는데 그래도 열심히 희망을 가지고 한 번 여론조사 결과가 내가 앞서니까 한 번 해보겠다고 이랬는데, 그때 이제 김대중 대통령(이사장)께서 정계 복귀 선언은 하지 않았지만 지역등권론을 가지고 전라북도에서부터 지원 유세를 시작했어요.

지역등권론이 부른 지역주의 역풍에 낙선, 그러나…

제 생각에는 전라북도가 지더라도 부산이 이기면 도움이 될 텐데, 이기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클 텐데, 그러나 서울에서 보기엔 부산은 어차피 안 되는 것으로 봤는지도 모르죠. 어쨌든 지원 유세에서 지역등권론을 들고 나오면서 지역등권론이 큰 논쟁이 됐습니다. 어느 한 지역만이 권력을 오래 누려서는 안 된다, 권력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어느 한 지역이 권력을 독점해선 안 된다, 어느 한 지역만을 계속적으로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 지역등권론이라는 것이 부산에서는 지역주의로 바로 그냥 (이해된 거죠).

근데 그것도 우리 방송 구조가 중앙뉴스가 아홉 시부터 나오고 부산시장 선거는 중앙뉴스 다 끝난 다음에 지방뉴스에 따라 나오지 않습니까? 나오니까 매일 저녁 아홉 시만 되면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중앙뉴스 나와서 한 번 고함질러 버리니까 이미 정계 복귀는 기정사실화 돼버렸고. 따라서 민주당은 ‘김대중 당’으로 완전히 다시 돌아가버렸고. 그래, 김대중 당 노무현이 부산에서 표가 떨어질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요. 그러면서 서서히 이십칠(27)일이 그건(선거)데, 이십이(22)일날 여론조사 해보니까 역전돼버렸죠. 역전돼버리고 졌지요. 문정수 시장이 오십일 퍼센트(51%), 내가 삼십칠점육 퍼센트(37.6%). 그 덕분에 영남지역에서 나온 여론조사에서 부산 경남을 대표하는 정치인 일(1)위를 했었죠. 명성이 좀 더 높아진 계기가 됐죠.

그땐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지역등권론 반대 발언을 내가 했었죠. 나도 지역등권론, 그 당시 선거 와중이라 자세한 내용이 뭔지도 모르겠고, 어떻든 지역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될 일도 아니고. 복잡한 계산 이전에 우선 선거에 불리하니까. 지역등권론에 대해서 나중에 선거 다 마치고 올라와서 그런 걸로 당내에서 내가 욕을 먹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 당시 기억나는 몇 가지 에피소드 중에 한겨레신문을 보면 박재동 화백이 만화를 그려놨는데 서울에서 디제이(DJ)가 지원사격을 했는데 ‘지원사격 받았나’ 이래 물으니까 제가 그 포탄을 맞고 ‘내가 맞았다, 오버.’ (웃음)  

노무현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가 1995년 6월 '소신있는 시장'이라는
선거 포스터가 붙은 사무실에서 활짝 웃고 있다.


37%의 지지…매력적인 곳, 포기할 수 없는 부산

그 당시 내가, 그때 선거 때 초기 우세를 지켜낼 만한 조직이 역부족이었어요. 초기 우세를 상당 부분 밀고 나가니까, 전부 민자당 조직 아닙니까? 민자당 조직이 전부 나서서 흑색선전을 뿌려대기 시작(했어요). (김대중 이사장의) 정계 복귀를 계속 강조하고, 주간조선에 실렸던 돈 얘기(1991년 10월 주간조선의 ‘통합 야당 대변인 노무현 의원 과연 상당한 재산가인가?’  기사를 말함-편집자), 하루는 집사람이 나한테 오더니 당신 진짜 숨겨놓은 여자가 있냐고. (웃음) 당신 진짜 부산에 숨겨놓은 여자가 있느냐고, 아주 정색을 하고 물어요. 결과로서 유명인사가 된 건 사실입니다.

그때나, 이번이나 당에 올라오면, 서울에 올라오면 우리 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부산 사람들이 그럴 수 있느냐’고 비난을 많이 하지요. 부산에서는 생각이 또 다르지요. 호남은 백 퍼센트(100%) 아니냐,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이야기하는데, 부산 사람들이, 어느 지역에서도 부산 사람 아닌 그 지역 당, 자기 지역 당 아닌 사람한테 삼십칠 퍼센트(37%) 표 찍어준 곳 있느냐, 나는 오히려 그렇게 반문했지요. 당선이야 못 시켰지만 자기 지역 당 아닌 반대 당 후보에게 삼십칠 퍼센트(37%) 찍어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부산 아니냐. 희망이다. 실제로 그 표 힘으로 내가 명성을 더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이구요. 당선이야 안 됐지만 여론조사에서 앞섰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한테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 것이고 그 덕을 봤지만, 실제 그런 점에서 부산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든 거지요. 그 이후 어떻든 부산에 야당을 한 번 심어볼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거죠). 참, 부산이 매력 있는 곳입니다. (웃음) (다음에 계속)

  • 노무현사료연구센터
  • 2013.02.04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전글조선일보 사원들에게 보낸 초선의원 노무현의 편지 다음글'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

    목록

    목록
    위로

    노무현사료관 로고

    디지털유산어워드 2018 선정 사이트

    (03057)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73 전화 82-2-1688-0523 팩스 82-2-713-1219 이사장 정세균 사업자번호 105-82-176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