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어느 여름날,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재선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을 다시 시작한 노무현은 아들 건호 씨에게 뜻밖의 질문 하나를 받는다. 질문은 “우리 집 가훈은 무엇이냐”는 것이었고, 그의 대답은 어쩌면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짧은 “없다”였다. 그럴듯한 문구를 지어주어도 되었지만, 없는 것을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뒤 노무현은 아들의 질문을 다시 떠올리고는 상념에 젖는다. ‘과연 우리 집에는 가훈이 없는가.’ 노무현은 이 일화를 월간 <좋은생각> 98년 9월호에 ‘우리집 가훈’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다.
1998년은 노무현 정치사의 상징적 전환점이었다. 1992년 14대 총선(부산 동구),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6년 15대 총선(종로)까지 연달아 낙선했던 그는, 종로에서 자신을 꺾었던 신한국당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사퇴하자 재보궐선거에 다시 출마, 한나라당 정인봉 후보를 54% 대 43%로 누르고 마침내 당선되었다. 주위에서는 “노무현의 종로 시대가 열렸다”며 기대와 희망에 부풀었다.
국회 복귀 직후 노무현은 당 ‘노사정문제해결을 위한 특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IMF 외환위기 이후 최대 노동 현안이던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사태를 경찰력 투입 없이 8월 24일 노사 대타협으로 이끈다. 이 일로 ‘노사분쟁 해결사’라는 평가를 얻으며 다시 전국적 주목을 받고,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국민회의 부총재직에도 오른다.
물려받은 처세훈(處世訓)에 대한 냉소
다시 1998년 여름 그날로 돌아가 본다. 노무현은 숙제 같았던 아들의 질문에 “가훈이 없다”고 대답했다. 당시 노무현이 떠올린 건 가훈이 아니라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간곡히 당부하고 타이르곤 했던 ‘체념의 말’이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살아라.” 그것은 가훈이라기보다 약자가 살아남는 데 필요한 처세훈(處世訓), 폭력의 시대를 살았던 민초들이 배운 순응의 기술이었다.
그런 경험 때문일 것이다. 노무현은 한때 누군가가 가훈이 뭐냐고 물어보면 “우리집 가훈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갈대처럼 살아라”라고 냉소적으로 말하기도 했다(「노무현평전」 40쪽). 한편으론 이런 냉소적인 대답은 그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는 삶의 반증이기도 했다. 그는 1990년 3당 합당을 거부했고, 1992년·1995년·1996년 연달아 낙선하면서도 지역주의에 맞선 외롭고 힘겨운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모난 돌’로 살아왔고, 정을 맞아온 사람이었다. 1998년의 <좋은생각>에 냈던 기고문은 그 정 맞은 자리에 대한 씁쓸한 자기 응시였다.
“남에겐 봄바람, 나에겐 가을 서리”
4년 뒤 노무현은 가훈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을 받는다. 2002년 10월 6일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은 경향신문 창간 56년 특집 인터뷰에서 가훈이자 좌우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번에는 “나에겐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게”라고 답한다. 이 문장은 1998년의 가훈에 얽힌 말과 정확히 대구를 이룬다. 어머니가 내어준 가훈이 “모나지 말고 둥글게, 흐르는 대로 살라”는 것이었다면, 이때 노무현의 가훈은 둥글어지는 게 아니라, 날카로움의 방향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세상이 그에게 순응을 가르쳤을 때, 그는 굴복하는 대신 칼끝의 방향을 바꿨다. 모난 채로 남되, 그 모남으로 남을 찌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벼리는 데 쓰겠다는 것이다.
신영복의 손으로 다시 쓰인 ‘노무현 원칙 혹은 가훈’
노무현의 가훈은 16대 대통령 재직 중 신영복 선생의 액자 선물로 그에게 돌아온다. 액자에 담긴 글귀는 ‘춘풍추상(春風秋霜)’, 중국 명나라 말기 문인 홍자성(洪自誠)이 지은 처세·수양에 관한 잠언집 <채근담>의 한 구절이다. 원문인 ‘대인춘풍(待人春風), 지기추상(持己秋霜)’은 2002년 노무현이 인터뷰 설문에 적은 가훈과 결이 같다. 남에게는 봄바람,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 노무현의 신념이 옛 문장과 다시 만난 순간이다.
맞닿은 말들, 노무현의 가훈과 삶의 키워드
노무현의 가훈과 거기 얽힌 일화들은 그의 삶의 가치와 철학이 깃든 여러 키워드와도 저마다 맞닿아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머니 세대가 체념 속에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 부르던 그 싸움을, 약자도 정 맞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뒤집으려는 지향이다. 1998년의 처세훈(處世訓)이 겨냥한 세상과, 노무현이 평생 만들려고 한 세상은 정확히 반대편에 있다.
‘원칙과 상식’은 “나에겐 엄격하고”의 실천이다. 지역주의에 맞서 재선에 유리한 종로 지역구를 떠나 부산에 다시 출마한 2000년의 선택, 3당 합당이라는 대세 앞에서 홀로 “이의 있습니다!”를 외치며 잔류를 택해 이후 십 년 가까운 정치적 고립과 낙선을 감수한 1990년의 결단, 그리고 측근 비리로 지지율이 추락하자 국민에게 재신임을 직접 묻겠다며 대통령직 자체를 걸었던 2003년의 승부수가 그것이다.
‘대화와 타협’은 “남에게는 관대하게”의 실천이다. 경찰력 대신 대화로 풀어낸 1998년 현대차 정리해고 중재, 지역주의를 깨겠다며 야당에 내각 구성권까지 내놓은 2005년 대연정 제안, 그리고 검찰 개혁을 지시가 아닌 생중계 토론으로 풀려 한 2003년 ‘검사와의 대화’. 노무현은 2004년 탄핵소추로 정치적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도 ‘화합과 상생의 정치’를 강조했다.
시대의 질문으로 남은 노무현의 다짐
민주주의, 시민과 참여, 특권과 반칙 없는 세상, 지역주의 타파, 균형발전, 권위주의 극복, 연대 등 노무현 정신으로 대변되는 갖가지 키워드에는 ‘나에겐 엄격하고, 남에겐 관대하게’라는 그의 가훈이 관통하고 있다. 개인의 다짐이 정치의 언어가 되고, 다시 시대의 질문으로 남은 것이다.
노무현의 가훈사(家訓史)는 단순한 개인 신조의 변천이 아니라, 그의 정치 인생 전체의 목표와 지향을 꼭꼭 눌러 담고 있다. 1998년 여름의 정치적 재기-같은 시기의 사적인 자기 고백이 겹쳐 있다는 점도 우연이라기보다, 그가 공적 영역에서 원칙을 세워나가던 시기에 사적으로도 같은 질문, ‘나는 어떤 사람인가’와 마주하고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