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에 관하여 이야기를 꺼내놓고 보니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어떤 생각이나 이치는 말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전달할 수밖에 없는데, 생각이라는 것도, 말이라는 것도, 그 경계를 분명하게, 그리고 앞뒤의 모순이 없게 설명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관용의 한계’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관용의 한계는 누가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시민이 민주주의를 위하여 독재 권력과 투쟁할 때, 시민은 권력의 정당성에 대하여 관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합법적인 절차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를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권의 행사로 정당화 합니다. 관용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관용의 가치를 위하여 관용의 한계를 주장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권력은 민주주의와 다수결의 원리, 그리고 조용한 다수를 말하고 법치주의를 들고 나옵니다. 스스로 관용하지 않는 권력이 관용의 원리를 내세우고, 동시에 관용의 한계를 내세워 관용의 원리를 짓밟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1980년대 전반, 우리나라의 공안 검사실과 법정에서는 일상적으로 이런 우스꽝스러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87년 6월 항쟁으로 그 논쟁은 일단락되었으나 그 후에도 국가 보안법을 둘러 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결국 관용의 원리는 누가 해석하고 누가 한계를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는 논리만으로 해결이 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라마다 다른 민주주의의 현실과 문화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과 문화는 오랜 세월 그 나라 시민이 축적해 온 결단과 선택의 역사 위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관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문제들은 바로 민주주의의 본질과 한계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냥 민주주의의 본질과 한계로 설명하면 될 문제를 왜 굳이 ‘관용’이라는 어려운 말을 꺼내서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마 ‘관용’이라는 사상의 역사와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가 민주주의 사상의 요체를 보다 뚜렷하게 이해하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던 중에, 그 말이 필요하다 싶은 상황에 부닥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든 관용이라는 말이 느낌으로 딱 와 닿지도 않고, 실천하기도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만, 시민이든 권력자이든, 가치와 이해관계, 사고방식이 충돌하는 모든 경우에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관용의 원리를 적용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가 사회적 갈등을 원만하게 극복하고 보다 통합되고 효율적인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큰 밑천이 될 것입니다.
이제 관용에 관하여 해명이 필요한 이야기는 대강 다 한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마감을 하려고 합니다. 모두들 그 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2009.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