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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안 보일 때, 노무현이 펼친 책

- [노무현의 독서 목록 ①] 연암 박지원의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 이광이/ 작가, 노무현아카이브 편집위원

노무현 대통령은 책으로 길을 낸 사람이었습니다. 상고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기까지 삶의 나침반이 되어준 스승은 대부분 책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참모들에게 읽은 책을 권했고, 책의 문장을 두고 함께 토론하기를 즐겼습니다.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는 민주주의와 진보의 미래를 묻는 책들을 읽으며 함께 공부하는 공간을 꿈꿨습니다. 그에게 독서는 시민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일, 곧 민주주의를 연습하는 일이었습니다.

같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같은 고민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노무현 아카이브에서 그 마음을 이어 보려 합니다. 대통령이 즐겨 읽던 책, 곁에 두고 아꼈던 책, 한 구절 한 구절 밑줄을 그으며 마음에 담으려던 책 이야기 ‘노무현의 독서 목록’을 연재합니다.

 


‘서화담(徐花潭, 서경덕) 선생이 출타했다가, 집을 잃어버리고 길가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더랍니다.

“너는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서 지금 20년이나 되었답니다. 오늘 아침나절에 밖으로 나왔다가 홀연 천지 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서로 어슷비슷 같아 저의 집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습지요.”’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가려 뽑은 책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학고재), 1장 ‘마음으로 보라’에 나오는 첫 글이다. 이렇게 이어진다.



‘선생은 “네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깨우쳐 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곧 너의 집이 있을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답니다. 그래서 소경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은 걸음걸이로 걸어서 곧장 집에 돌아갈 수 있었더랍니다.’

소경이 갑자기 눈을 뜨니 광명의 세상이다. 그동안 눈 못 뜨고 살아온 어두운 세상과는 딴 판이다. 만물이 생소하니, 어디로 가야 집으로 향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소경이 아닌 사람은 낮에 집 못 찾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하겠지만 소경에겐 낮도 밤이고 밤도 밤이다. 그런데 개안하여 낮이 처음 보는 낮이 되어버렸으니, 서화담 말대로 눈을 감고 가거나, 밤이 되기를 기다리거나, 당리 방도가 없다.



이 대목, 서화담의 실화인지, 오래 내려온 구전인지, 연암의 창작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삽화를 읽으면서, 의술이 부족한 그 옛날에 어떻게 소경이 갑자기 개안을 하느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치부한다면, 그는 빈곤한 사람이다. 그 시대, 심 봉사도 딸 덕에 눈을 뜨지 않았는가! 부처님이 깨달음 후에 갠지스강가에 도착했는데 뱃삯이 없어 승선을 거절당하자 이 언덕(此岸)에서 저 언덕(彼岸)으로 훌훌 날아가신 장면이나,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땅에 묻힌 뒤 사흘 만에 부활하여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장면을 그저 허구라고 치부한다면, 우리는 문학의 원천인 신학에 접근할 상상력을 읽어버리고, 눈 뜬 소경이 되고 만다.

연암의 글은 이어진다.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색깔과 모양에 정신이 뒤죽박죽 바뀌고, 슬픔과 기쁨에 마음이 쓰여서 이것이 곧 망상이 된 것입니다.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숙한 걸음걸이로 가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의 본분을 지키는 이치요, 집으로 돌아가는 증인(證印)입니다.’

한 페이지에 불과한 이 짧은 글의 첫 문장은, 글의 제목이기도 한 ‘자신의 본분으로 돌아가라(還他本分)’이다.



책 중간쯤에 ‘공작관문고자서(孔雀館文稿自序)’라는 글이 나온다. ‘공작관’은 연암이 살던 탑골 근처 당호다. 여기에 이명과 코골이에 대한 기가 막힌 묘사들이 나온다.

‘어떤 아이가 뜰에서 놀다가 귀에서 갑자기 윙윙 소리가 나자 벙긋벙긋 좋아하면서, 이웃집 아이에게 말했다. “내 귀에서 소리가 나는데 마치 앵앵거리는 소리 같고, 비파를 뜯고 피리를 부는 것 같고, 그 소리 둥글기가 별 모양 같구나.” 옆 아이가 귀를 대하고 들어보았으나 끝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일찍이 촌사람과 같이 자는데 어떤 사람이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았다. 토하는 듯, 휘파람 부는 듯, 탄식하는 듯, 숨을 내뱉는 듯, 불이 타는 듯, 물이 끓는 듯, 빈 수레가 엎어지는 듯하여 숨을 들이쉴 때는 삑삑 톱 켜는 소리가 나고 내쉴 때는 씩씩 돼지가 씨근거리는 것 같았다. 옆 사람이 흔들어 깨우자 그는 성을 벌컥 내며, “내가 언제 코를 골았단 말인가?”’



앞은 이명(耳鳴)이고, 뒤는 코골이(鼻鼾)다. 글을 쓰는 사람의 자세에 관한 은유와 상징. 혼자만 듣고 남은 못 듣는 이명을 자기 글을 몰라주는 예로, 남은 듣고 자기는 못 듣는 코골이를 자기 글에 대한 비평의 예로 들고 있다. ‘글은 오직 진실해야 할 뿐, 꾸미거나 세평에 흔들리지 말라’는 주문이 이어진다.

1997년 출간된 이 책에는 연암 특유의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 철학적 사유가 가득한 산문 95편이 실려 있다. 주제에 따라 △마음으로 보라 △학문과 문학의 길 △조선의 현실과 북학 △복어알 같은 벼슬살이 △나의 벗들 △제비바위의 정경 등 6장으로 묶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2004년 여름휴가 때 청와대에 머물면서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때가 노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2개월 직무 정지를 당한 직후여서, 휴양지로 떠나지 않고 관저에 머무를 때다. 또 한 권은 미국의 저명한 학자 테드 할스테드와 마이클 린드의 공저 「정치의 미래」. 미국의 싱크탱크 ‘뉴 아메리카’를 공동 설립한 두 사람은 이 책에서 ‘세상은 농경, 산업을 거쳐 디지털 시대로 진화하고 있는데 정치 사회제도는 과거의 틀에 갇혀 있다’고 지적하면서 좌우를 넘는 ‘혁신적 중도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두 달 침잠과 사유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돌아와 읽었을 이 두 책의 공통점은 ‘중도(中道)’다. 도로 눈을 감고 가라는 말은, 중도의 회복, 멈출 때를 아는 ‘지지(知止)’와 같은 말이다. 인디언들이 말을 타고 초원을 질주할 때 문득 멈춰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곤 하는데, 내 영혼이 잘 따라오는지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우리가 삶이 빡빡하고 헛헛할 때 봉하마을에 가서, 그 너럭바위 앞에서 “요새,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이 잘 안 보입니다”라고 물으면, “허허,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게”라고 말할 것 같은 상상이, 그해 봄 자전거 타고 논둑길을 달리던 그 모습과 겹친다. 그는 이렇게 우리의 상상 속에서 때 없이 부활한다. 

  •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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