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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인다: 노무현의 수사학 ③

- 2008년 대창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사실을 전달하는 말과 사람을 움직이는 말. 노무현의 말은 후자였다. 그는 정책을 나열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고 논리로 설득하기보다 청중이 스스로 답을 찾도록 질문을 던졌다. 낙선의 밤에도, 청문회의 분노 앞에서도, 국정운영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의 말에는 일관된 구조가 있었다. 이것은 타고난 언변이 아니라 진심이 만든 수사학이었다.
이 연재는 노무현의 연설과 글을 한 편씩 짚어가며 그가 어떤 지점에서 국민과 청중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수사학적으로 분석한다. 내용의 힘, 표현의 기술, 구성의 전략,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만들어내는 감동의 순간들. 정치의 언어이자 인간의 언어였던 그의 말을 다시 읽는 일이 될 것이다. 매월 한 편씩 그 말들을 다시 세워본다.

- 백승권


1. 가장 낮은 곳으로 돌아온 전직 대통령의 축사

2008년 5월 2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대창초등학교 운동장. 봄볕 아래 흙먼지가 풀썩이고 청군과 백군의 함성이 뒤섞인 그 자리에 흰 셔츠 차림의 노신사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불과 석 달 전 청와대를 나와 고향 봉하마을로 돌아온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 2008년 5월 2일. 퇴임 후 처음으로 모교인 대창초등학교 운동회에 참석하다.

국가 수반으로서 전 세계를 무대로 연설하던 정치인이 자신의 모교 후배들, 그리고 이웃 주민들 앞에 섰을 때 꺼내든 첫 문장은 거창한 국가 비전이나 훈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일곱 번 선거를 해서 네 번을 졌거든요. 그런데 대통령도 했어요.”

화려한 수식어를 덜어낸 단 두 줄의 고백. 그러나 이 짤막한 말 안에는 노무현이라는 한 인간의 전 생애와 굴곡진 현대사, 그리고 그가 평생을 바쳐 구축해 온 정치철학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소박한 구어체였지만, 그 어떤 정치학 강의보다 명쾌하게 민주주의의 본질을 짚어낸 이 연설은 노무현 특유의 ‘공감과 반전의 수사학’이 지닌 결정적 장면을 보여줍니다.


2. ‘돌콩’ 소년의 결핍과 흙먼지 묻은 기억

이 연설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세기 전, 1950년대 대창국민학교 시절의 소년 노무현을 먼저 마주해야 합니다. 당시 봉하마을은 큰비만 오면 낙동강물이 넘쳐 농사를 망치던 가난한 빈촌이었습니다. 키가 작아 ‘돌콩’이라 불리던 소년은 매일 십 리 길을 걸어 읍내 학교로 통학했습니다.


▲ 1956년 봄 대창초등학교 4학년 봄소품. 은사인 김종대 선생님 왼편이 어린이 노무현

그러나 학교는 따뜻한 보금자리만은 아니었습니다. 읍내 아이들과 시골 아이들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빈부의 격차가 가로놓여 있었고 때 묻은 옷차림과 몽당연필은 소년의 자존심에 깊은 생채기를 냈습니다. 사친회비를 내지 못해 교실 밖으로 쫓겨나고 읍내 부잣집 급우의 번쩍이는 가죽 책가방을 면도칼로 찢어버렸던 기억, 규정을 어기고 종이를 바꿔 써서 1등을 가로챈 급우에게 반발해 붓글씨 대회 2등 상장을 내던져버린 사건까지.

공부는 누구보다 잘해 ‘노천재’라 불렸지만 지독한 가난은 승부욕 강한 소년에게 우월감과 열등감이 뒤엉킨 반항심을 심어주었습니다. 그 깊은 그늘에서 소년을 건져 올린 것은 신종생 은사의 따뜻한 손길과 전교 어린이 회장 선거였습니다. “내가 이래 고추가 작아도 맵습니다”라는 익살로 좌중을 휘어잡으며 당선되었던 그 운동장 연단은 훗날 그가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 나아가 ‘패배한 자에게도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게 만든 출발점이었습니다.


▲ 삶의 결핌과 패배, 회복의 역사가 담긴 모교 방문. 노 대통령 대창초등학교 35회 졸업생이다. (1959년 졸업)

2008년 5월 칠순을 바라보는 전직 대통령이 다시 서서 바라본 그 운동장은 단순한 체육대회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결핍과 패배, 그리고 회복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삶의 원형이었던 셈입니다.


3. 패배의 솔직한 고백, 수평적 연대의 출발점

권위주의적 화법의 전형은 ‘성공한 자의 훈계’입니다. 흔히 교장 선생님이나 정관계 인사의 축사는 ‘열심히 노력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반드시 승리하라’는 식의 당위와 성공 신화로 채워집니다.

하지만 노무현은 반대로 자신의 패배를 정면에 배치합니다. ‘일곱 번 싸워 네 번을 졌다.’ 절반이 넘는 실패의 기록입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권좌에 올랐던 인물이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낙선 경력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는 순간 연단과 운동장 사이의 수직적 위계는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 대통령 퇴임 석 달 뒤에 이뤄진 모교 방문에서 전직 대통령의 첫마디는 훈화가 아니라 고백이었다.

그는 성공의 비결을 설파하는 영웅이 아니라 흙바닥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무릎이 깨져본 ‘인생의 선배’로 내려섭니다. 자신의 취약성을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청중의 방어기제를 해제하고 진 사람의 서러움과 불안에 깊이 가닿는 공감의 통로를 열어젖힌 것입니다.


4. 승패를 넘어선 대칭의 미학, 연대와 겸손의 수사학

연설 중반부에서 노무현은 이긴 아이와 진 아이 모두를 아우르는 정교한 대칭 구조의 문장을 구사합니다.

“오늘 이긴 사람도 다음에 질 수 있기 때문에 기분은 좋지만 겸손하고 또 친구를 격려할 줄 알고, 오늘 진 사람은 다음에 또 이길 기회가 있기 때문에 이긴 친구들을 축하하고 또 앞으로 더 열심히 연습해서 또 이기고.”


▲ 이날 노 대통령은 승패의 이분법을 ‘순환과 공존’으로 바꿔 말했다. 승자는 조롱하지 않고 패자는 원망이나 비난하지 않는 것, 선숙한 민주주의 의 윤리다. 

이 문장은 단순한 권선징악이나 위로가 아닙니다.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순환’과 ‘공존’의 틀로 바꾸어버립니다.

승자에게는 승리가 영원하지 않음을 상기시켜 오만을 꺾고 겸손과 격려를 가르칩니다. 패자에게는 이번 패배가 끝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어 비굴함 대신 축하와 재도전의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승자가 패자를 조롱하지 않고 패자가 승자를 저주하지 않는 태도. 이는 운동회의 규칙을 넘어 그가 평생 동안 갈망했던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의 핵심 윤리입니다. 승패가 갈리는 잔혹한 현실 속에서도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는 말의 품격이 여기에 있습니다.


▲  가난했던 소년이 숱한 낙선과 좌절을 딛고 일어나 마침내 도달했던 역사의 결론은 패배한 자에게 다시 손을 내밀어 주는 세상이었다.


5. 다원적 가치의 확장, “착한 사람 겨루기에서 또 이기고”

이 연설의 백미는 단연 마지막 대목에 등장하는 ‘가치의 다변화’입니다.

“달리기에서 못 이기면 공놀이에서 이기고, 공놀이에서 못 이기면 착한 사람 겨루기에서 또 이기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죠?”

한 줄 세우기식 경쟁에 익숙한 사회에서 우리는 달리기를 꼴찌로 통과한 아이를 낙오자로 규정하곤 합니다. 하지만 노무현은 그 프레임을 단번에 깨뜨립니다. 달리기에서 졌다면 공놀이를 잘하면 되고 몸을 쓰는 운동을 다 못한다면 ‘착한 마음’으로 빛나면 된다고 말합니다.


▲  “진 사람도 다시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죠”


이는 어린 시절 가난과 학력의 차별을 온몸으로 겪어냈던 노무현 자신의 생애적 통찰에서 비롯된 언어입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하나의 잣대에 갇혀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라는 다정한 응원이자 모든 인간은 저마다 다른 재능과 고유한 빛을 지니고 있다는 인본주의적 선언입니다.

특히 마지막에 덧붙인 “그렇게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죠?”라는 친근한 반문은 청중 스스로가 그 다원적 가치에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하게 만드는 절묘한 참여의 화법입니다.

“진 사람도 다시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사회. 그 사회가 좋은 사회이고, 한 번 겨루기 해서 진 사람도 다음 겨루기에서 또 이길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 아니겠어요?”



비 내리는 날이면 물이 차오르던 가난한 시골마을의 ‘돌콩’ 소년이 숱한 낙선과 좌절을 딛고 일어나 마침내 도달했던 역사의 결론. 그것은 바로 패배한 자에게 다시 손을 내밀어 주는 세상이었습니다. 권력을 내려놓고 흙바닥으로 돌아온 그의 짧은 연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긴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언어가 기술이 아니라 온몸으로 살아낸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필자 : 백승권
- 前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 행정관
- 現 (주)CCC 대표 : 글쓰기 강사
- 공공·기업 대상 누적 3,000여 회 강연
-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문서의 신’ 출연


  •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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