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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사실을 전달하는 말과 사람을 움직이는 말. 노무현의 말은 후자였다. 그는 정책을 나열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고 논리로 설득하기보다 청중이 스스로 답을 찾도록 질문을 던졌다. 낙선의 밤에도, 청문회의 분노 앞에서도, 국정운영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의 말에는 일관된 구조가 있었다. 이것은 타고난 언변이 아니라 진심이 만든 수사학이었다.
이 연재는 노무현의 연설과 글을 한 편씩 짚어가며 그가 어떤 지점에서 국민과 청중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수사학적으로 분석한다. 내용의 힘, 표현의 기술, 구성의 전략,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만들어내는 감동의 순간들. 정치의 언어이자 인간의 언어였던 그의 말을 다시 읽는 일이 될 것이다. 매월 한 편씩 그 말들을 다시 세워본다. 

백승권


마음을 움직이다 ― 노무현의 수사학①

《노무현이 만난 링컨》 출판기념회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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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설의 판을 짜는 대전제

2001년 12월 10일, 《노무현이 만난 링컨》 출판기념회는 단순한 책 소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2002년 제16대 대선을 앞두고 사실상 출사표를 던지는 기념비적인 현장이었죠.

노무현은 대권에 도전하는 대전제로 먼저 비전을 던집니다. 전두환 정부의 ‘정의로운 사회’, 노태우 정부의 ‘보통 사람의 시대’, 김영삼 정부의 ‘신한국·세계화·정보화’, 김대중 정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생산적 복지·남북 화해’를 차례로 나열해요. 역대 정부의 가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연속성 속에서 수용하는 큰 품을 보여준 겁니다.

그리고 청중의 가슴을 때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수많은 비전이 공허한 말장난에 그치지 않으려면 결국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나서야 한다는 대전제를 깔아놓고 자신이 왜 그 일을 해낼 적임자인지 증명하기 위한 설득의 무대로 청중을 안내합니다.


2. 마음의 문을 열고 몰입시키는 설득의 기법들

이 연설이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이유는 거친 듯 보이지만 세련되고 정밀한 수사학적 장치들이 곳곳에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① 억양법 : 마이너한 이야기로 진짜 메시지를 도드라지게 만들기
노무현은 《유종근의 신국가론》을 인용하며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조건들을 짚어냅니다.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기술을 혁신해야 한다. 지식기반사회로 가야 한다.” 라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항목들을 나열하죠.

하지만 이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사전 작업, 즉 억양법이었습니다. 뒤이어 진짜 핵심 메시지를 던집니다. 경제 발전이나 기술보다 더 결정적인 토대는 바로 ‘신뢰와 협동’이라는 사회적 자본이라는 점을 밝혀내는 것이죠. 먼저 부차적인 이야기로 시선을 모은 뒤 진정으로 강조하고 싶은 본질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청중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기술입니다.

② 문답법: 묻고 스스로 답하여 청중을 끌어들이기 “사회적 신뢰를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이냐? 원칙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이냐? … 거기에 대한 해답이 마땅히 없었다는 거죠.”

연설자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내리는 문답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청중에게 단순히 정보나 주장을 주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질문을 통해 청중의 호기심과 집중도를 극대화한 뒤 해결책을 제시하여 말에 대한 몰입감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립니다.

③ 점층법과 여운: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완성하는 방법 연설의 가장 유명한 대목인 ‘조선 600년 역사’를 언급할 때, 노무현의 어조는 감정의 정점을 향해 치닫습니다.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비리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부정과 불의의 수위를 단계적으로 올려가며 표현을 점점 세게 가져가는 점층법을 사용해 청중의 울분을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문장을 완전하게 끝맺지 않고 “우리 600년의 역사.” 라는 짧은 명사형 단어로 툭 던지듯 마감하죠. 이 여운과 절제의 마무리는 청중의 가슴속에 600년 잔혹사의 한과 부끄러움을 묵직한 돌덩이처럼 남겨놓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저는 할 수 있습니다”, “해냅니다”, “이깁니다” 처럼 짧고 단정적인 문장으로 연설의 밀도를 높입니다.

3. 전환을 만드는 안내판정치 인생을 돌이켜보며 3김 청산을 외치다 ‘새정치국민의회의’에 입당했던 순간을 고백할 때 그는 자신이 겪은 자존심의 상처와 정치적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내가 추구했던 가치보다 더 큰 역사적 과제를 위해 결단했음을 밝히는 이 대목은 연설의 흐름을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길목이 됩니다.

갑작스러운 주제 전환으로 청중을 당황하게 만드는 대신 소회와 질문을 던져 “이제 더 크고 본질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라는 전조 신호를 보낸 것이죠. 들을 준비를 마친 청중은 비로소 연설자가 이끄는 역사의 깊은 바닷속으로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가게 됩니다.

 4. 웃음이 터지는 지점, 자기 낮춤의 타이밍 이 연설에서 웃음이 터지는 대목도 흥미로워요. “저도 머리에 후까시 좀 넣겠습니다”라는 자기 비하적 농담, “노무현이 말은 제법 잘하는데 진짜 정권 잡겠나?” 하고 스스로 청중의 의심을 대신 말해버리는 대목에서 웃음이 나옵니다.

그런데 노무현은 이 웃음을 웃음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곧바로 “저 부산상고밖에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하는 것마다 저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로 이어 붙입니다. 웃음 뒤에 반드시 확신의 문장을 배치하는 이 패턴은 연설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웃게 만든 다음 그 이완된 순간에 가장 단단한 주장을 밀어 넣는 것입니다.

5. 링컨을 빌려 자기 신념을 말하다노무현은 자신의 삶 위에 링컨 이야기를 겹칩니다.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연방 하원 의원 경력 딱 2년밖에 없고 11년 동안 계속 떨어지고 놀다가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이 양반이 빗질을 잘 못해가지고 항상 머리에 새집을 짓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항상 링컨을 비웃는 언론이 ‘빗질 좀 하고 다녀라.’ 그리고 별명이 시골뜨기 대통령이었습니다… 저도 이제 대통령 되면 링컨처럼 해낼 수 있습니다.”

이 연설의 중심축은 링컨의 재선 취임사입니다. 노무현은 남북전쟁 승리를 눈앞에 둔 링컨이 ‘적을 섬멸하자’는 말 대신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지난 4년 동안 전쟁에 시달렸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남과 북이 함께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각기 하느님에게 상대방을 응징해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어느 쪽의 기도도 들어주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 용서해야 됩니다.”

이 인용은 링컨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지역주의를 넘어서겠다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화해를 말하는 링컨의 언어를 빌려 발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용은 권위를 빌리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비추는 거울로 쓰일 때 가장 강력합니다. 화자가 “이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겹쳐 보여줄 때 청중은 그 인용을 화자 자신의 말처럼 받아들입니다.

Tip. 말하기와 글쓰기를 위한 핵심 포인트


이 연설 분석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의 말하기나 대중을 향한 글쓰기를 할 때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팁을 몇 가지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핵심을 도드라지게 하려면 비교 대상을 먼저 배치하세요(억양법).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던지기보다 그에 대비되는 요소나 전 단계의 이야기를 차분히 나열한 뒤 본론을 꺼내보세요. 메시지의 선명도가 훨씬 높아집니다.

일방적인 전달 대신 질문을 던지세요(문답법). 상대방의 몰입을 끌어내고 싶다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세요. 청중은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가 됩니다.

감정의 높낮이를 조절하고 절제하며 마무리하세요(점층법 & 여운). 메시지를 전달할 때는 표현의 강도를 단계적으로 높여 감정의 몰입을 유도하세요. 그리고 클라이맥스에서는 길게 늘어놓기보다 짧고 간결한 문장이나 단어로 여운을 남길 때 울림이 더욱 깊어집니다.

주제 전환 시에는 반드시 안내판을 세우세요. 새로운 주제나 파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듣는 사람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질문이나 솔직한 회고를 통해 완충 지대를 만들어 주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역사의식이 담긴 깊이 있는 메시지 위에 고도의 수사학적 기법과 인간적인 진정성이 더해졌을 때 연설은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작가 ┃ 백승권

말과 글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때로는 시대의 방향을 바꾼다고 믿는다.
참여정부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하며 노무현 대통령의 말과 글이 만들어지고 세상에 전해지는 과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경험한 사람 중 한 명이다.
현재 ㈜CCC 대표이자 글쓰기 강사로 활동하며 공공기관과 기업, 시민들을 대상으로 ‘잘 읽히고 제대로 전달되는 글쓰기’를 전하고 있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문서의 신’ 편에 출연해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주요 이력>
전)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 행정관
현) (주)CCC 대표이자 글쓰기 강사 (공공·기업 대상 누적 3,000여 회 강연)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문서의 신' 출연

 

  •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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