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만큼 반가운 사진입니다. 흔히 보던 노무현 대통령 사진이 아니니까요.
스튜디오에서 따로 포즈를 취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자세 잡고’ 찍은 사진도 아니랍니다. 인터뷰 중에 잡힌 한 컷입니다.
이 사진은 ‘행복한책읽기’에서 2002년 3월 5일 펴낸 <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에 실렸습니다. 인터뷰는 2002년 2월 15일 자치경영연구원 회의실에서 진행했고 이때 노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이었습니다. 인터뷰어는 당시 유시민 시사평론가가 맡았습니다. 3월 9일 제주에서 시작한 민주당 국민참여경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황문성 작가입니다. 책에는 36쪽에 이 사진이 있는데 작게 편집해서 놓치기 쉽습니다. 저희도 페이스북에서 황문성 작가 소개와 함께 이 사진이 올라온 것을 보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흔쾌히 사진파일 기증 의사를 밝혀주셔서 지난 11월 21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황문성 작가의 스튜디오를 찾았는데요. 작업실 한쪽 벽에 고은, 황석영, 이외수 작가의 사진과 함께 노 대통령의 이 사진도 액자에 담겨있었습니다.
“원래 인물사진 찍을 때 내가 가지고 있을 만한 한 컷은 꼭 남기겠다는 생각으로 찍거든요.”
2002년 2월 15일 촬영분 가운데 한 컷은 이 사진이었나 봅니다.
이때까지, 이후에도 황문성 작가는 노 대통령과 별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날도 책을 펴낸 ‘행복한책읽기’ 임형욱 대표의 요청으로 사진을 찍게 됐답니다(황문성 작가가 ‘교회친구’라고 소개한 임형욱 대표는 이날 인터뷰를 녹음한 마이크로 카세트테이프 등을 올 2월 기증해주시기도 했습니다).
황문성 작가에게 몇 마디 물어봤습니다.
- 촬영 이전에 노 대통령에 관해 좀 알고 계셨나요?
“청문회 기억 정도, 특별히 더 아는 건 없었어요.”
- 그럼 촬영은 왜 맡으셨는지.
“그냥,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보면서 뭐든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노무현을 보면 누구든 그런 마음이 들지 않나요? 그때는 노사모에도 가입해서 크진 않지만 후원도 하고 그랬죠.”
- 대통령 재임 때는 어떻게 지켜보셨나요?
“처음엔 불만이 많았죠. 개혁하라 그랬더니 이라크 파병하고, 한미FTA 하고. 검사와의 대화도 불만이었어요. 왜 그렇게 다 내려놓나…. 나중에 보니 대통령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구나 싶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아까운 분이라는 점을 실감합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 때문에라도 더 아까운 분이었다고요.”
황 작가의 컴퓨터 폴더에는 퇴임 후에 봉하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습니다. 2008년 3월, 퇴임 직후였습니다. “하도 아방궁이라 하니” 직접 가보셨답니다. 방문객들과 함께하는 사진이 보입니다.
책에 실린 인터뷰를 잠시 소개해야겠습니다. 이날 노무현 상임고문은 일생에서 제일 나쁜 선택으로 “정치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지금 처음 시작한다면 아마 안 할 것”이라고 말해 유시민 시사평론가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예의 원칙과 신뢰, 대화와 타협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하기도 합니다.
“토론해야 할 진짜 중요한 문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해방 후에 우리가 매 시기에 맞았던 큼직큼직한 과제들 말입니다. 통합된 민족국가를 세우고, 일제 잔재들을 청산해나가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 그런 것이 그 시기에 가장 중요했는데 정치인들이 그걸 가지고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를 놓치고 넘어왔던 것이죠. 그 이후에 개발의 와중에 민주주의와 인간적 가치가 다 훼손되고, 그래서 국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사회적 낭비가 일어났는데, 이런 본질적인 문제에 국민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는 저신뢰 사회라는 것 아닙니까. … 사회의 물질적 생산이 중요하긴 하지만 서로 믿으면서 살아가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건 사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거든요. 이런 문제들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게 정말 답답합니다.” (79p)
보좌진들은 다음 일정 때문에 유시민 시사평론가에게 인터뷰 마무리를 채근하는데 노무현 상임고문의 말은 계속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 사회 문화를 바꾸는 것입니다. 노무현이 당선된다는 사실 하나가 이미 당선하고 나서 할 많은 일보다 더 크다. 노무현이 살아온 삶과 정치의 방식, 그런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그 순간, 그 자체가 정치인들, 정치지망생들, 정치평론가와 국민들에게 새로운 느낌을 준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현할 수 없는 허황한 공약이나 비전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내놓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이만한 수준에 왔는데도 여전히 학벌, 연고, 정실, 부조리, 온갖 불합리한 뒷거래, 한 단계 도약하려면 이런 장애를 뛰어넘어야 하는데, 제 삶과 정치는 그런 맥락에서 뚜렷한 상징적 가치를 가집니다. 그래서 제가 집착하는 겁니다. 반칙의 문화, 가방 들고 이 당 저 당 기웃거리고, 오로지 배지만을 향해서 뛸 게 아니라 정치적 이상을 추구해야지요.”
(79-80p)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한 정치인의 포부와 문제의식이 새삼스럽습니다. 첫 사진도 그렇습니다. ‘정말 따로 포즈를 취한 게 아니었냐’고 물으니 연속촬영 중에 잡힌 한 컷이라고 같은 답이 돌아옵니다.
황문성 작가는 1980년대 중반부터 사진기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전업작가입니다. “인물사진으로 시작했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풍경사진도 찍는다”고 하지만,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이미 네 차례 개인전을 가진 중견입니다.
지난해 개최한 ‘자연+인간+우연 - 황문성展’에서는 ‘작가의 말’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새롭게 본다는 것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내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 시혜는 내가 다가선다고 보이는 게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우연이라고 말한다.“
궤는 다르지만, 2002년 2월 15일에 잡힌 한 컷도 우연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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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성 작가는 2015년 5월 서울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다섯 번째 개인전을 가질 예정입니다. 개인전 준비를 위해 50만원씩 후원하는 50명에게 작품 1점과 프로필 사진 촬영으로 보답하는 크라우드펀딩을 준비 중입니다. 조만간 공지될 펀딩 소식은 황 작가가 꾸준히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개인 페이스북을 통해 공지할 예정입니다. 회원 여러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셔도 좋겠습니다. [황문성 작가 페이스북 방문하기]
*2002년 노무현 대선승리의 기록 <선택의 순간들>은 전국 온오프 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