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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여야 3당합당으로 탄생한 거대여당 민자당의 독주와 노태우 정권의 폭압에 맞서 91년은 야당인 작은 민주당과 평민당, 학생운동권을 주축으로 한 재야의 반정부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해였습니다. 또한 지방의회가 30년 만에 부활했고, 기초·광역의회 선거에서 패한 야당이 지리멸렬한 통합협상에 마침표를 찍고 통합민주당을 출범시켰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해 통합야당 대변인을 맡아 13대 국회의 마지막을 보냈습니다.

노무현과 김대중, 정치적 동지가 되다

91년 공안정국과 야권통합


90년 3당합당 뒤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을 조성해 강권통치로 치달았고, 국회에서는 거대여당 민자당이 법률안들을 날치기 처리했다. 그해 7월, 민자당 독주에 항의하며 야당 의원들이 의원직을 사퇴하고 장외로 나갔다. 그리고 평민당과 민주당은 재야 통추회의와 함께 범야권 통합 협상을 벌였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90년 9월 5일부터 사흘 동안 서울에서 남북 제1차 고위급 정치-군사 회담이 열렸다. 분단 45년 만에 강영훈 국무총리를 수석대표로 한 정부당국자들과 연형묵 정무원 총리 등 북한의 고위 관료들이 만나 유엔 가입과 적십자회담 개최 등을 논의했다(회담은 10월 17일 제2차 평양회담으로 이어져 91년 12월 제5차 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고, 92년 10월 제8차 회담까지 이루어졌다).

제1차 남북회담 마지막 날인 9월 7일, 국회 개원을 앞두고 국회의장이 야당 의원들의 사퇴서를 반려한 가운데 민자당은 야당에게 등원을 종용했고, 야당 간에도 입장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평민당은 등원 조건으로 민자당에 내각제 개헌 포기와 지방자치 전면 실시를 요구했으나, 민주당은 근본적 해결 없는 등원을 거부했다. 결국 국회는 다시 민자당 단독으로 열렸다.

한편, 10월 5일에는 보안사가 정치인과 재야 및 각계인사 1,300여 명을 도청·미행한 사실이 폭로됐다. 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양심선언과 함께 사찰대상자 신상카드 등 자료를 공개했다. 보안사의 정치사찰 파문은 표류하던 정국을 더욱 요동치게 만들었다(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이명박 정부에서 민간인들을 불법 사찰한 사실이 또 다시 드러났다). 

11월 25일, 평민당은 장외로 나간 지 4개월 만에 독자적으로 국회 등원을 결정했다. 평민당은 등원 조건으로 민자당과 91년 지방의회 및 92년 단체장 선거 실시 등에 합의했다. 반면, 민주당은 등원 거부를 꺾지 않았고, 평민당과 민주당 간 갈등으로 통합 협상도 중단됐다.

‘반쪽자리’ 지방자치 선거지방자치 관련법은 90년 12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제151회 정기국회도 민자당의 법안 날치기로 막을 내렸다). 이로써 지방자치가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된 지 30년 만에 부활했다.

91년 지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여야 정당들은 후보 발굴에 나섰다. 민주당은 91년 1월 11일 부설 지방자치대학을 설립하고, 노무현 의원의 지역구인 부산 동구 지구당에서도 지방자치학교가 열렸다.

노무현 사료관 :: 사료이야기 :: 91년 야권통합, 노무현과 김대중 ‘정치적 동지’가 되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꽃이랄 수 있는 지방자치가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된 지 30년 만에 부활했다. 사진은 91년 1월 22일 노무현 의원 지역구인 민주당 부산 동구지구당에서 열린 지방자치학교.


한편, 91년 벽두부터 정치권에서는 여야 의원들의 뇌물외유 사건이 터져 나왔다. 1월 22일 국회 상공위 소속 민자당과 평민당 의원 3명이 피감기관인 무역협회와 자동차공업협회에서 경비를 받아 여행을 다녀 온 것이 드러나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그런 가운데 민주당은 반(反)민자당·비호남권 야당을 부각시키며 2월 3일 이부영 씨 등이 참여한 재야의 민주연합과 통합했다. 이날 통합 전당대회에서는 야권 통합 실패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이기택 총재를 재추대하고, 부총재단에 김현규·조순형·박찬종 의원과 재야 몫으로 이부영·고영구 변호사를 선출했다. 이어 8일 당직 개편을 통해 사무총장 이철, 원내총무 김정길, 정책위의장 김광일, 대변인 장석화, 인권위원장 장기욱, 민생위원장 노무현 의원을 임명했다. 야권의 통합 논의는 중단된 채 평민당, 재야 민주연합과 통합한 민주당, 재야 독자정당 노선의 민중당(90년 11월 창당)이 각자의 길을 갔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있던 날, 한보그룹의 수서지구 특혜분양 의혹이 제기됐다. 의원 뇌물외유에 이어 터진 수서 사건으로 정국 주도권은 공안세력에게 넘어갔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청와대와 안기부 등 정권 핵심부가 각본을 짜 정치권 비리를 터뜨리고 있다는 의구심이 나돌았다. 즉, 정권 핵심부가 내각제 개헌 추진 환경 조성을 위해 정치권을 궤멸시키고 정치판을 다시 짜려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서 사건에 청와대 개입 의혹이 불거지면서 이는 설(說)로 그치고 말았다. 

민주당은 수서 사건을 6공화국 비리로 쟁점화시켰다. 당 차원에서 진상조사 활동을 벌였고, 3월 7일 노무현 의원이 단장을 맡은 민주당 수서은폐 조작 진상조사단에서는 민자당 김영삼 대표와 김종필·박태준 최고위원, 서청원 의원을 문서 변·위조에 따른 증거 인멸 및 교사죄로 검찰에 고발했다. 고발 내용은 “91년 2월 16일 민자당이 수서택지 부정분양 민원처리를 수용키로 한 문서를 검찰에 제출하면서 최고위원들의 결재사항을 삭제하는 등 민자당 수뇌부의 개입 혐의를 감추려 증거 인멸을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기초의회 선거가 실시됐다. 선거 시기와 기초-광역의원 분리 실시를 놓고 한동안 여야가 공방을 벌였으나 정부여당이 밀어붙여 3월 26일 전격 실시하게 된 것이었다. 구·시·군(기초)의회 의원 선거의 조기 실시로 여당 성향 출마자들은 넘쳐났고, 야당은 준비 없이 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관건선거 시비 속에 여당 성향 후보들만 대거 당선됐다.

선거가 끝나서도 정권 핵심부와 여당 내부의 암투는 계속됐다. 급기야 김영삼 대표는 4월 1일 대구에서 평민당 김대중 총재를 만나 공안통치 배격을 위한 공동대응을 선언한다. 한편, 평민당은 4월 9일 새로 발기한 신민주연합과 합쳐 신민주연합당(신민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의혹이 갈수록 증폭되던 수서 비리는 정치적 흥정 속에 국회 건설위 소속 여야 의원들의 비리로 국한시킨 채 꼬리를 잘라 버렸다. 민주당은 4월 중순 수서 사건 진상조사 활동을 정리한 <수서지구택지 특혜공급사건 진상백서>를 내놓았다. 이 <백서>는 사건 발단부터 수사 종결까지 자료들을 정리해 싣고 있는데, 수서 사건을 청와대 등 정권 핵심부와 정치권, 재벌이 유착한 6공비리로 결론지었다.

5월 분신정국과 다시 거리에서한편,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 아래 대학가의 반정부 시위가 끊이질 않았고, 이를 막는 공권력의 폭력도 나날이 거세졌다. 그러던 중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등록금 인상 반대 시위 혐의로 구속된 학생회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교문 앞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의 사복체포조인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다음날, 재야 사회단체와 야당은 ‘고(故)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를 결성했다. 규탄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고, 시위 과정에서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 5월 1일 전국 노동절 집회 도중 안동대생 김영균, 3일 명지대생 천세용,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윤용하, 김철수, 이정순 씨 등 학생·빈민·노동자 11명이 무자비한 폭력에 분신과 투신으로 맞섰고, 25일 경찰의 폭력 진압에 사망한 성균관대생 김귀정 열사까지 꽃다운 젊음들이 민주제단에 스러져갔다.

이른바 91년 5월투쟁이다. 이 투쟁은 노태우 정권의 폭압과 거대여당 민자당의 독주, 민생 파탄을 외면한 채 권력 투쟁만 일삼는 여권의 암투, 수서 사건 등 정치권 비리와 부패 등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정권 퇴진 요구로 표출된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노동자와 시민들이 함께 거리에서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재야 단체들이 주축이 된 대책회의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결합하는 사회단체들이 불어났고, 백기완·계훈제·강희남 선생 등 재야 원로들의 동참과 법률자문위원으로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 이석태·천정배 변호사와 율사 출신 야당 의원들인 신민당 이상수, 민주당 노무현·장기욱 의원, 민중당 박용일 변호사가 힘을 보탰다. 

5월 6일에는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의문사 사건이 발생했다. 공안세력의 대기업 노조 와해 공작이 있던 당시 박창수 위원장은 노동쟁의조정법상 제3자 개입으로 구속 수감됐다가 안양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병원 마당에서 사체로 발견됐다. 그 다음날, 백골단은 병원 영안실 벽을 망치로 부수고 들어와 박창수 열사의 시신을 탈취해 갔다. 당시 사건의 진상조사에 나선 민변 등 사회단체와 야당의 진상조사단에 노무현 의원도 참여했다.

거세지는 정권 퇴진 투쟁으로 궁지에 몰린 노태우 대통령은 8일 청와대에서 당정회의를 열고 ‘내각제 개헌 포기’를 선언한다. 그러나 정국 수습책이 될 수는 없었다. 야당들은 내각제 추진세력인 노재봉 총리와 6공 황태자로 불린 정권 실세 박철언 체육청소년장관을 겨냥해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9일에는 6공화국 들어 최대 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백골단의 진압에 맞서 전국에서 30여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13일엔 전대협 소속 대학생들이 민자당 중앙당사를 점거했고, 18일엔 전국 81개 시·군에서 40여만 명의 학생·노동자·농민·재야·정당이 참여한 ‘5·18국민대회’와 강경대 열사 장례식이 거행됐다. 이 18일 국민대회는 91년 5월투쟁의 최정점이었다.

19일에는 신민당과 민주당이 각각 대전과 부산에서 정권 규탄 집회를 열었다. 구 부산상고 터에서 열린 민주당의 ‘민생파탄 폭력살인 규탄 및 노태우 정권 퇴진 촉구 대회’에 시민 2만여 명이 모였고, 이기택·이부영·김정길·김광일·노무현 의원과 박순보 ‘민자당 일당독재 분쇄와 민중기본권 쟁취 국민연합’(국민연합) 부산본부 공동대표가 연사로 나서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을 성토했다. 대회 후 참석자들은 부산 서면~부산진역~부산역~남포동 부영극장까지 시민들과 가두행진을 벌였다. 

노무현 사료관 :: 사료이야기 :: 91년 야권통합, 노무현과 김대중 ‘정치적 동지’가 되다
91년 5월 노태우 정권 퇴진 투쟁에 나섰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잇따랐다. 민주당은 5월 19일 구 부산상고 터에서 ‘민생파탄 폭력살인 규탄 및 노태우 정권 퇴진 촉구 대회’를 열었다. 대회 후 참석자들은 백골단의 폭력 진압과 최루탄 난사를 뚫고 가두행진을 벌였다. 


마지막 날 새벽이 될 때까지도 이 문제(권한 배분)는 타결이 되지 않았다. 당장 아침 8시면 수임기구 합동회의를 열어 통합을 위한 마지막 절차를 완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주장은 팽팽한 평행선을 그리며 접근할 줄을 몰랐다 ···(중략)··· 결국 김대중 총재에게 이렇게 되면 통합은 결렬될 수밖에 없다고 배짱을 내밀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는 김대중 총재의 물음에 “대통령 선거를 하시고 싶으면 우리 주장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하고 내질렀다. 결국 나의 주장은 관철되었다. 당시의 담판 과정에서 김대중 총재가 나를 보면서 지었던 표정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한 마디로 어이없는 표정,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그때까지 수하 정치인이 그렇게 당돌하게 달려드는 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 노무현 자전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 101쪽, 94년 출간

5월 25일, 결국 노재봉 총리가 사임했다. 그리고 내각제 개헌 논의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6월 들어서면서 투쟁의 열기도 서서히 식어갔다. 6월 3일 한국외대에서 ‘정원식 총리서리 계란 투척’ 사건이 벌어지자 보수언론들은 앞다투어 시위 학생들을 ‘패륜아’로 몰아갔고, 노태우 정권은 이를 반전의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투쟁 열기에 쐐기를 박은 것은 광역의회 선거였다. 6월 21일 치러진 광역의회 선거에서 민자당은 총 866개 선거구 중 564개 지역에서 압승했다. 광주, 전남북, 제주를 제외한 11개 시·도의회에서 여당이 과반수를 차지했고, 부산 50개 의석은 싹쓸이했다. 반면 야당인 신민당은 전국적으로 165석, 민주당은 21석을 얻는 데 그쳤다. 득표율도 민자당 41%, 신민당 22%, 민주당 14%였다.

난항 끝 통합민주당 출범기초·광역의회 선거에서 참패한 신민당과 민주당은 다시 통합 협상을 재개했다. 하지만 협상은 양당 간 지분 문제와 지도체제를 둘러싸고 또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계속 난항이었다. 결국 신민당의 김대중 총재가 민주당 요구조건을 수용키로 결단을 내림으로써 통합은 극적으로 성사됐다.

9월 10일, 김대중-이기택 양당 총재는 합당을 언론에 알렸다. 당 대 당 통합이었다. 실무회의에서 정강 정책과 당헌 합의 후 합당 수임기구에서 통합 선언 절차만 남겨 놓고 있었다. 통합 당헌 기초작업에 민주당에서 노무현·장기욱 의원이 참여했다. 이미 지도체제는 합의가 되어 있었으나 인사권 행사 범위 등을 놓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신민당은 김대중 총재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고, 민주당은 최고위원 회의로 분산시키려 했다. 당시에 대한 노무현 의원의 회고다.

그리고 17일. 합당 수임기구 합동회의에서 합당이 결의됐고, 선관위 등록과 법적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 이로써 거대여당에 맞서는 통합 야당이 출범했다. 통합 야당의 당명은 민주당,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 체제였다. 최고위원에는 이우정ㆍ박영록ㆍ박영숙ㆍ허경만(신민계), 조순형ㆍ김현규ㆍ이부영ㆍ목요상(민주계) 의원이 선임됐고, 사무총장 김원기, 원내총무 김정길, 정책위의장 유준상, 대변인 노무현 의원이 임명됐다.

통합야당 대변인에 선임된 노무현 의원 프로필이 신문에 나왔다. 그중 <조선일보>(91년 9월 17일자)는 왜곡된 사실을 갖고 인물평을 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조선일보는 <주간조선>(91년 10월 6일자)을 통해 허위사실로 작문한 장문의 기사를 내보냈고, 노무현 의원은 조선일보와 명예회복 소송을 벌였다.

91년 9월 신민-민주 양당은 통합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왼쪽 사진은 10월 8일 국회 회의실에서 민주당 지도부와 기자들. 오른쪽은 10월 23일 민주당사 입주 리셉션에서 김대중 대표와 환담하고 있는 노무현 대변인. 


통합 민주당이 출범하면서 정치인 노무현은 김대중과 함께 정치를 하게 됐다. 그리고 이후 평생 동지로 정권교체라는 장도를 함께 걸었다. 역시 94년 펴낸 에세이에서 정치인 노무현의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당시 평가를 엿볼 수 있다. 

나는 YS를 탁월한 정치인으로 평가하면서도 그를 ‘지도자’로 인정한 일은 없다. 그러나 DJ에 대해서는 ‘지도자’로 이름 붙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래 전에 역사의 인물이 된 김구 선생을 제외하고는 역대 대통령이나 현존하는 정치인 중에서 내 마음속 지도자로 생각해 본 사람이 없고 보면, 나는 그 분을 특별히 존경하는 셈이다. - <여보, 나 좀 도와줘>, 98쪽. 

통합 민주당이 출범하면서 90년 3당합당 후 무기력하게 13대 국회 후반을 보낸 야당은 거대여당에 맞설 발판을 구축했다. 87년 야권 후보의 분열로 대선 패배를 경험했고, 90년 3당합당 이후 국민들의 야권 통합 열망에 부응하지 못한 채 91년 지방의회 선거에서 다시 패한 야권은 공멸에 대한 위기의식이 있었다. 이런 위기의식이 지리멸렬한 통합 협상에 자물통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한편, 여권인 민자당 내부는 후계구도를 둘러싼 계파간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야당과의 관계에서는 강성으로 치달았다. 결국 13대 국회 마지막 국정감사도 민자당 단독으로 열렸고, 연말 국회에서도 추곡수매가·제주도개발특별법 등 법안들을 또 다시 무더기로 날치기 처리했다. 그렇게 91년이 저물면서 13대 국회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 권영준/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2.10.12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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