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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었다. 대선 승리를 위해 단일화 요구를 받아들였고, 단일후보 선출 방식을 놓고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도 상대방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선대위에 참여했던 관계자들과 참모들의 구술 증언과 기록으로 엮은 2002년 대선 후보 단일화 이야기다.

단일화 합의 이후에도 드라마..
소신과 원칙 선택한 국민

2002년 단일화의 승리, 노무현은 어떻게 만들어냈나(하)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그런 식으로 대통령 할 생각 없습니다

그는 권력분점을 확실하게 보장받으려고 했다. 국무총리, 국정원장 등 소위 4대 권력기관장을 포함한 내각 절반, 그리고 정부 산하단체와 공기업 기관장 절반의 인사권을 요구했다. … 이 요구를 거절했다. 서로 믿으면서 정권을 공동운영하는 것은 단일화 정신에 따라 받아들일 수 있지만, 국가권력을 물건 거래하듯 나눌 수는 없었다. - <운명이다> 197쪽

민주당 고문으로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그런 요구가 나온 배경에 대해 "당시 정몽준 쪽에서 적극적으로 협력해주면 당선 가능성이 있고 외면하면 당선 가능성이 없는, 그런 조사가 많이 있었다"며 "우리 쪽에서도 '대통령 자리만 빼놓고 다 들어줘서 선거운동에 참여시켜야한다는 말들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정몽준 쪽에서 그런 상황을 약점 삼아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것이다. 내부에서도 '이런 식이면 정몽준 측과 논의를 계속할 수 없다', '그래도 완전히 등 돌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부딪혔다. 정몽준 대표가 노무현 후보의 선거전에 협력하고 나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비관론이 흘러나올 즈음, 김원기 전 의장에게 정 대표 측 핵심 관계자로부터 긴급하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 관계자는 “노 후보가 정 대표와 단둘이 만나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무엇무엇을 보장해주겠다는 것을 서면이 아니고 말로써 라도 해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아무도 없는데서 단둘이 하는 말은 덕담에 속하는 것 아니냐. 법적인 약속은 지켜야겠지만 정치적인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인 상황이 바뀌면 안 지킬 수도 있는 거다. 그러니까 그것만 해주면 선거운동에 참여하도록 하겠다”는 말이었다. 김원기 전 의장의 설명이다.

지금까지 그 사람들이 요구해오던 것에서 대폭 후퇴한 내용이었고, 선거를 지고 이기는데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었단 말이에요. 나도 '그건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해서 “알았다, 그럼 내가 후보한테 당신이 한 내용을 이야기하고 통보를 해주마”고 했어요. 그리고 나는 노 후보도 고비였기 때문에 그렇게 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사실 했어요. 그래서 노 후보를 만났어요.

노 후보의 입장은 단호했다. “전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대통령 할 생각 없습니다”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김 전 의장이 정치인 노무현에게 가장 감동받은 일 가운데 하나로 꼽는 순간이다. 다시, 김 전 의장의 회고.

노 대통령이 그러더라고. “정몽준 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국민 앞에 단일화하면서 뒷거래는 않는다고 몇 차례나 이야기했는데 그건 국민을 속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단둘이 만나서 덕담으로 한 이야기라도 그걸 근거로 해서 ‘당신 그전에 이런 얘기한 적 있지 않느냐. 그걸 실천하라’고 요구하면 약속한 걸 어떻게 안했다고 합니까. 그대로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 그래요. 그래서 자기는 그 사람들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면서 “차라리 그럴 바에는 내 소신을 지키다가 낙선하는 걸 통해 정치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나도 두 번 이야기할 수 없더구만. ‘말인즉슨 후보 이야기가 옳으니 내가 반론할 게 없다. 그쪽한테 그렇게 통보하겠다’ 그러고 통보를 했어요.

그것으로 상황은 정리됐다. 정몽준 대표 측으로부터 더 이상의 요구는 없었다. 12월 13일, 노무현 후보는 국회에서 정몽준 대표를 만나 “단일화 정신에 따라 당선되면 국정동반자로서 함께 국가를 운영하고 국민통합과 정치개혁을 추진하기로 합의한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부산 유세부터 정몽준 대표가 참여했다. 선거를 닷새 남겨둔 때였다. 분위기도 좋았다. 이해찬  대표의 말을 따르자면 “자체 여론조사를 해도 많이 이기는 걸로 나오던 때였다, 이젠 거의 이기는 흐름이었다.” 그렇게 선거를 하루 앞둔, 12월 18일이 왔다.


단일화 일방파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12월 18일 명동 유세. 이날 밤 투표를 앞두고 정몽준 후보는 일방적으로 ‘단일화 파기’를 선언했다.

이날 아침 부산에서 서울로 이동한 노무현 후보는 오전 10시 화곡역 사거리를 시작으로 신정사거리(10:40) → 용산 전자상가(12:00) → 성산시장(12:40) → 연신내역(13:20) → 미아삼거리 현대백화점 앞(14:10) → 수유시장(14:50) → 상봉터미널(15:40) → 테크노마트(16:20) → 금남시장(17:00)으로 유세를 이어갔다. 그리고 저녁 6시 30분 명동, 7시 30분 종로에서 정몽준 대표와 나란히 단상에 섰다. 공동유세는 돌연, 종로에서 끊어졌다. 저녁 9시 30분 함께하기로 한 동대문 거리유세에 정 대표는 나타나지 않았다. 종로 유세를 마친 정 대표는 8시 전후 당직자와 저녁식사 자리에서 노 후보에 대한 지지 철회를 논의 중이었다. 이해찬 대표의 말이다.

나도 지원 연설을 끝내고 캠프로 돌아오는데 전화가 왔어요. 정몽준 씨가 단일화 철회하겠다고 저녁 먹는 자리에서 얘기했다는 거야. 그래서 기자들이 우리한테 확인전화가 온다는 거예요. 아, 이게 진짜 큰일났더구만. 선거 다 끝났는데 그게 9시뉴스에 나가면 야단나겠더구만. 그래서 나는 차를 빙빙 돌리고선 캠프에 안 들어갔어요. 대변인실에는 ‘절대 확인해 주지마라, 우린 들은 바가 없다’고 당부해놓고. 실제로 우리한테 공식 통보한 게 아니니까. 그리고 9시 반인가 10시쯤 캠프에 들어갔어요.

우려했던 상황은 현실이 됐다. 국민통합21로부터 노무현 후보 선대위에 지지 철회 통보가 온 때는 밤 10시 경. 이유도 없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30분 뒤 국민통합21 김행 대변인은 정 대표의 노 후보 지지 철회를 공식 발표했다. 표면적으로는 ‘북미 간에 핵 위기로 싸움이 나면 전쟁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아내야 한다, 한국이 중심을 잡고 끌려 다녀선 안 된다’는 노 후보의 종로 유세 발언을 철회 이유로 들었다. ‘이는 양당 간 정책공조 정신을 위배한 것으로,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우방이며 미국이 북한과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게 우리의 시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노 후보가 명동 유세 단상에 정동영 의원을 올린 데 이어 종로에서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라는 피켓을 거론하며 정동영, 추미애 의원을 함께 소개한 것이 직접적인 발단이 됐다는 게 주된 분석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국민 앞에 약속하고 국민들의 선택을 따른 단일화 합의의 파기를 정당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노무현 후보 선대위 입장에선 그렇다고 이 ‘사태’를 손 놓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책회의 현장에 있었던 김정길 전 행자부장관의 회고다.

중앙당에 가니까 정대철 선거대책위원장, 이해찬 기획본부장, 이상수 총무본부장 등등이 쭉 둘러앉아 있더라고. 서로 인사하고 하는데 전부 초상집 분위기라. 침울하더라고. 조금 있으니 후보가 들어왔어요. 대부분이 정몽준 대표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했죠. 정대철 위원장, 이해찬 본부장 등이 한참을 얘기했어요. ‘후보님 몸이 혼자 몸이 아니다, 개인의 선거가 아니라 국가의 명운이 걸려있는 선거 아니냐, 가야됩니다’ 계속 설득을 했죠. 후보는 ‘내가 대통령을 안했으면 안했지 (찾아가는 건) 못하겠다’고 앉아있었고. 한참 침묵이 흐르더니 벌떡 일어나면서 “갑시다” 하시더라고.

참모들이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 옮긴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결과는 발걸음만큼 무거웠다.

정대철 선거대책위원장이 내 손을 끌고 정몽준 대표의 평창동 자택으로 갔다. 굳게 닫힌 철문 앞에서 엄동설한 칼바람을 맞으며 기다렸지만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다.
- <운명이다> 201쪽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 사설은 적중했다

투표 당일인 12월 19일 새벽 1시, 노 후보는 “단일화는 국민과의 약속”이라 밝히고 명륜동 자택으로 귀가했다. 반면 선대위의 밤은 끝나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당사에 다시 모인 가운데 마지막 대책을 논의했다. 김정길 전 장관의 말이다.

그때 내가 한 말씀드리겠다고 하고 발언을 했어요. “정몽준 대표하고 노무현 후보하고 같이 공동정부를 만들겠다고 한 것은 두 사람이 국민에게 한 약속인데 노 후보는 그 약속을 깨겠다고 한 적이 없다. 정 대표만 약속을 깬 것이다. 그러니 아침 6시 투표가 개시되기 전에 어떻든 노 후보가 기자회견을 해야 한다. 기자회견을 통해 ‘정몽준 후보와 약속은 유효하다, 나는 당선되면 약속을 지키겠다’고 이야기하자” 이렇게 제안했고 그렇게 하자고 의견이 모아졌어요.

결국 노 후보의 밤도 끝나지 못했다. 선대위 관계자들이 후보의 집을 찾았다.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 발표 당시처럼, 정작 후보는 자는 중이었다. 이재정 전 장관의 말이다.

갔더니 주무시고 계신 거예요. 속으로 ‘야, 참 대단하다. 우린 다 잠도 못 자고 밤새워 고민했는데 저러실 수가 있나’ 싶었죠. 기자회견 얘기를 드리니까 폭탄선언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하고 정치 못 하겠네요.’ 사실 이런 의미였죠. 어떤 이유에서건 공식적으로 지지 철회를 했는데, 지금 와서 어떻게 할 거냐 그거죠. 서로 간에 압력을 가하거나 호소하거나 무릎 굽히거나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요, 사실은. 그렇지만 저희들로서는 그냥 돌아갈 수 없었죠. ‘여전히 국민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느냐, 국민들의 의혹은 풀어야지 않겠느냐’ 이런 애기들을 계속했죠. 결국 마지막에 가서 후보가 ‘여러분들이 그렇게까지 간곡히 얘기하니 나가서 간단하게 얘기합시다’ 그렇게 결론을 냈습니다.

12월 19일 새벽 5시 30분, 긴급기자회견이 열렸다. 노무현 후보는 기자회견에서 “사태가 이같이 된 데 대해 지금도 영문을 잘 알 수 없고, 왜 선거 막바지에 문제가 됐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도 “정 대표와 저의 공조합의는 국민에 대한 약속”이라며 “대화를 통해 오해가 있었다면 풀고, 되도록 공조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 기자실에서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기자회견문을 읽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인지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운명이다> 201쪽

투표가 이미 시작된 오전 8시 30분에야 국민통합21 측의 공식 답변이 나왔다. “이미 근본적인 신뢰와 상호 존중이 무너졌다”는 발표였다. 이로써 단일화는 일방 파기로 마무리됐다. 19일 새벽 1시 8분에 최종 입력되고 아침에 배달된 <조선일보>의 사설 ‘정몽준, 노무현을 버렸다’는 “16대 대통령 선거의 코미디 대상(大賞)은 단연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라고 총평했다.

이로써 대선 정국은 180도 뒤집어졌다. …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 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다.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다. - <조선일보> 2002.12.19 


유권자의 참여, 국민의 힘, 대통령 노무현

적어도 <조선일보> 사설의 마지막 대목은 적중했다.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었다. 노무현 후보 캠프 관계자들이 뒤늦은 잠을 청하고 대천명(待天命)의 심정으로 투표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깝게는 국민참여경선에서,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을 선택했던 국민들이 짧지 않은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미 지지 철회 보도가 나온 18일 밤부터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문자와 전화가, 인터넷 글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투표 당일도 마찬가지였다. 이해찬 대표의 회고다.

투표 당일 10시, 11시쯤 보고를 받아보니까 조금 지는 분위기였어요. ‘도리 없지,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어쩌겠나’ 했는데 12시쯤 되니까 분위기가 바뀌는 거라. 젊은 사람들이 투표장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오후 1시, 2시가 되니까 출구조사에서 득표율이 자꾸 올라가는 거예요. 나중에 KT 사장한테 들어보니까 19일 하루만 2천만 통화가 이루어졌다고 해요. KT 역사상 최고라고 그러더구만. 그게 전부 투표 독려하는 전화였던 거지. 순전히 국민들 자발적으로 이뤄진 거란 말이죠.

투표 결과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 1,201만4,277표(48.9%),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1,144만3,297표(46.6%). 57만980표 차이의 승리였다. 12월 20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마침내 21세기 첫 대통령의 선거를 세계를 놀랄 만큼 훌륭하게 성공시켰습니다. 모든 것은 국민의 힘이었습니다”라고 밝혔다. 옳은 말이었다. 그렇게 유권자의 참여가, 국민들의 선택이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을 만들었다.

 

  • 김상철/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2.11.06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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