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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노무현사료연구센터는 대통령기록관과 협의를 거쳐 참여정부 청와대가 퇴임 전후 '공개'로 분류해 이관한 대통령기록 16만6천여 건의 사본을 받았습니다. 대통령 친필메모 네번 째 이야기 입니다. 앞으로 지속적인 내용파악과 정리작업을 통해 주요 사료를 공개하고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열린 3ㆍ1정신'이라 적은, 간절한 통합의 꿈

2004년 제85주년 3ㆍ1절 기념사 친필메모

 

하얀 종이에 파란 네임펜으로 쓴 글씨들이 빼곡합니다. ‘전 국민이 하나로’, ‘보편적 대의’, ‘상해임시정부’ 등 밑줄 친 부분도 눈에 띄는데요. 맨 앞에 ‘3·1 운동 여든다섯 돌’이라고 적힌 데에서 보듯,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2년차를 맞은 2004년 제85주년 3·1절 기념사 원고 역할을 한 친필메모입니다. 

3·1절 기념행사를 전국에 생중계하는 방송사 카메라들이 현장에서 대통령의 얼굴을 비추고 있을 때, 연단 위에 놓인 것은 이와 같은 몇 장의 쪽지뿐이었습니다. 연설담당 비서진들이 대통령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준비한 연설문도, 연설을 도울 프롬프터도 없었습니다.

 

실수가 가져온 선물

그는 3월 1일 아침, 출근하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심하게 질책을 했다. 그날의 기념사는 그때부터 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대체되었다. 그는 메모 형태의 연설 쪽지를 마치 완성된 원고처럼 연대에 놓고 연설을 마쳤다. 그것이 평소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문장으로 작성된 원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록> 98쪽

윤태영 노무현사료연구센터장이 지난해 펴낸 <기록>의 한 대목, 2004년 3월 1일 아침의 모습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기록>을 좀 더 인용해보겠습니다. 하루 전인 2월 29일, 노 대통령은 북악산으로 향합니다.

 

그는 북악산 정상에서 인조의 항복으로 뒤틀려 버린 조선의 운명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로 다가온 3·1절 연설에 한일 관계의 장래를 위해 담아야 할 내용을 가다듬었다. 취임 초기부터 유지해 왔던 우호적 기조를 가급적 견지하려는 입장이었다. 다만 어떤 준엄한 경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하산한 후 함께한 관저의 오찬 자리에서 대통령은 그런 생각이 담긴 기조를 구술하면서 연설팀에 전할 것을 나에게 지시했다. 거기서 내가 착오를 냈다. 그 구술을 활용하여 3·1절을 맞는 대통령의 심경을 대변인이 언론에 설명하라는 뜻으로 잘못 받아들인 것이었다. 결국 그 내용은 연설팀에 전달되지 못했다. 새로운 구술이 반영되지 않은 채 연설문은 그대로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기록> 98쪽

 

사료편찬사업 차원에서 보면 새옹지마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윤태영 당시 대변인의 실수 ‘덕분에’ 이런 친필을 만나게 됐으니 말입니다.
이날 노 대통령은 연설문 없이 자신이 정리한 메모 몇 장을 마이크 앞에 놓고 3·1절 기념사를 시작합니다. 청와대에서 막 1년여의 시간을 보낸 노 대통령이 85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국민들에게, 또 이웃나라 일본을 향해 말하고 싶었던, 하지만 비서실에서 준비한 연설문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두 번 고쳐 쓴 메모쪽지


노 대통령은 연단에 오르기 전 모두 일곱 장의 메모를 써내려 갑니다. 글을 시작할 때 소개한 첫 장과 지금 보여드리는 세 장을 포함한 네 장(8~11번)의 메모는 초본으로 보입니다. 한 묶음으로 되어 있으면서 썼다가 지운 대목도 꽤 보여서 그렇습니다. 이어서 보여드리는 세 장(12~14번)과 대조해보시죠.

 


한결 정돈된 모습입니다. 마지막 메모는 처음 쓴 내용대로 연설을 진행한 것 같습니다. 실제 연설원문과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날의 연설메모는 12, 13, 14, 11번 순서로 구성된 셈입니다. 노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 순서와 핵심 키워드, 메시지 등을 네 장의 메모로 직접 정리해 ‘연설교안’을 만들었습니다.

 

‘떳떳한 역사’ 위한 전제조건

네 장의 메모는 18분 30초의 연설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연설원문과 대조해보면 노 대통령이 메모로 정리한 내용과 흐름 그대로 연설을 진행한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날 노 대통령은 연설 도중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해 언급하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해방되고 독립했지만 분단된 나라였습니다. 동족끼리 피 흘리고 싸웠습니다. 처참한 비극을 겪었습니다. 아직도 서로 대결하고 있습니다. … 아직도 국회에서 친일의 역사를 어떻게 밝힐 것인가를 놓고 혼란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정신대 할머니들은 한을 씻지 못하고 정리되지 못한 역사 앞에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후손들이 오늘 누리고 있는 사회적 처지는 소외와 고통입니다. 우리의 독립투사들이 우리의 역사를 주도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해석, 오늘의 현실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대립과 갈등을 우리는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은 이처럼 우리 사회 대립과 갈등의 극복을 호소하는 데 연설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습니다. 3·1운동의 가치도 빈부, 노소, 학력, 사회적 신분과 지위, 종교와 관계없이 메모 그대로 ‘전 국민이 하나’된 역사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대립과 갈등을 극복해야 후손들에게 떳떳한 역사를 물려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꼭 해야 될 것은 마음을 열고 차이를 극복하고 상대를 존중하고 대화로써 모든 문제를 풀어갈 줄 아는 통합된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85년 전 3·1운동 때 전 국민이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가 됐듯이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다시 한번 차이를 극복합시다.”

 

대립과 갈등, 용서와 화해

연설 말미에는 노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충고’가 나옵니다. 앞서 <기록>에서 인용한 ‘준엄한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메모에서 이를 ‘일본에 대하여’라고 적었습니다.

“일본에 대해서 한 마디 꼭 충고를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이, 한국의 정치 지도자가 굳이 역사적 사실을,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일본의 법·제도의 변화를,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소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만들어 가야 될 미래를 위해서 마음에 상처를 주는 얘기들을 절제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는 뜻으로 우리 국민들은 절제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정부는 절제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발언들은 흔히 지각없는 국민들이 하더라도, 흔히 인기에 급급한 한두 사람의 정치인이 하더라도, 적어도 국가적 지도자의 수준에서는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국민들이 우리 정부가 절제할 수 있게 일본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일본은 이러한 ‘충고’를 곧이듣지 않았고 2년 뒤인 2006년 4월 25일 노 대통령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로 시작하는 한일관계에 대한 특별담화를 발표합니다. 용서와 화해의 전제조건을 일본이 외면한 결과입니다.
2004년 3·1절 기념사 연설메모의 마지막 한 줄은 ‘열린 3·1정신’입니다. 연설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날 노 대통령이 거듭 강조한 대립과 갈등의 극복, 국민통합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 전해집니다. 11년이 지난 지금도 과제로 남아있는 일입니다.

“항일을 했던 사람, 친일을 했던 사람, 어쩔 수 없어 입을 다물었던 사람들, 이 사람들 사이에 맺혀 있는 갈등, 그리고 좌우 대립의 사이에서 생겼던 많은 갈등,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이 상처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역사적 안목으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지혜를 만들어 갑시다. 스스로 한 발 물러서자는 것입니다. 스스로 가슴을 열자는 것입니다.”

 

  • 진혜정/ 노무현사료연구센터 연구출판팀
  • 2015.03.03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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