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일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옵니다. 10.4 남북정상선언 1주년 기념 특강을 위해서였습니다.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이 이번 10.4선언 6주년 기념 토론회 발제에서 언급하듯 “2008년 2월 25일 이후 한반도 정세는 악화일로”였고 “한반도 평화와 민족 재결합을 향한 시계가 거꾸로” 돌고 있던 때였습니다.
실제로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2008년 3월 북한의 요구로 남측 당국자가 전원 철수하며 개성공단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했고 7월에는 피격 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이 중단됐습니다. 참여정부 임기 말, 불능화 직전 단계까지 갔던 북핵 문제는 9월 들어 북한이 다시 영변 핵시설을 원상복구 중이라고 발표하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10.4 남북정상선언 1주년이 돌아왔습니다.
평화는 통일만큼이나 독립된 가치‘대북정책,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이날 노 대통령의 특강 제목이었습니다. 특강은 당시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이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남북관계와 지향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문제 제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합리적인 대북정책을 위해서는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통일을 위해 평화를 희생할 수도 있는가?
평화통일, 과연 가능한 일인가?
통일 논의, 이대로 좋은가?
노 대통령은 “평화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 전쟁으로 입은 손실은 그 무엇으로도 회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경험했고 아직도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며 “평화는 통일에 우선하는 가치”라고 말합니다.
평화를 먼저 성취하지 않고는 통일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평화가 먼저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이 평화통일 전략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서는 동북아의 평화구조가 선행되어야 하고, 동북아의 평화구조에는 한반도의 평화구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제 통일방안의 일환으로서, 또는 통일에 이르는 과정으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통일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가치로서, 대북정책의 고유한 목표로 설정하여, 평화정착을 위한 전략을 말하고, 평화계획을 추진해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 정착에 진전을 볼 수 있고, 통일도 앞당길 수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의 기반은 남북간 신뢰노 대통령은 다시 묻습니다. “과연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가능한 일인가.” 이어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면서도 “그러나 단호하게 ‘가능하다’고 대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한 ‘실천과제’를 제시했습니다.
금기를 깨고 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분열의 원인이 된 요소들을 해소해야 한다.
국가주의 사고를 넘어서자.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협상의 일반 원칙을 존중해야 한다.
종국적인 관건은 신뢰이다.
이날 특강에서 노 대통령은 이러한 실천과제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남북관계에 대한 노 대통령의 문제의식과 철학이 응축된 대목이기도 합니다. 핵심은 통일에 종속된 가치가 아닌 독립된 가치와 지향으로서 평화, 그러한 평화를 가능케 하는 기반으로서 신뢰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런 말도 나옵니다.
6자회담에서 북한의 입장을 최대한 지원했습니다. 각종 국제회의에서 북한을 비난하는 발언이 나오면 최대한 사리를 밝혀서 북한을 변론했습니다. 개별 정상회담에서도 한 시간 이상을 북한을 변론하는데 시간을 보낸 일도 있습니다.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최대한 자제했습니다. 때로는 자존심 상해도 참았습니다. 이 모두가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국정원이 불법 공개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과 관련, 새누리당과 일부 언론이 ‘북한 편을 들었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감춰졌던 엄청난 비밀이 터져 나온 양 했으나 노 대통령은 이때 이미 설명할 것은 다 설명했습니다. 이런 대목도 나옵니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입니다. 국가 간의 협상결과는 약속 중에서도 특별히 엄숙하고 무거운 약속입니다. 그런데 지난날 우리는 수시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뒤집었습니다. 북한이 그렇게 한다고 우리도 그렇게 할 일은 아닙니다.
다시, 근본적인 사고와 자세가 중요하다거듭, “결정적인 열쇠는 신뢰”이고, 때문에 “협상의 결과는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 정부에서 지난 9월 2차 남북관계발전기본계획을 확정하며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등 10.4선언을 지키지 않겠다는 방침을 공식화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은 특강 말미에 “결국 대북정책은 근본적인 사고와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기시기 별 전략이나 대응방안이 아니라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근본적인 사고와 자세임을 강조한 말로 이해합니다. 대북정책이 바르게 방향타를 잡을 것인지, 또다시 먼 길을 헤매 돌 것인지, 깊은 우려와 간절한 다짐으로 10.4 남북정상선언 6주년을 맞이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