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정치를 하면서 선거에서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많았으나, 어쩌면 스스로 지는 길을 선택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선거에서 뻔히 질 것을 예견하고 나서는 정치인이 누가 있겠느냐만,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임을 알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도전은 지역주의 타파 등 노 대통령이 추구해온 정치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고, 번번이 좌절됐으나 포기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1998년 7월, 종로 보궐선거에서 재선 국회의원이 된 후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던 노무현 의원은 또 한 번의 지역주의와 맞선 2000년 4·13 부산 북강서을 국회의원선거에서 ‘차기 대권 도전’을 시사한다. 비록 부산 선거에서 다시 낙선의 쓴잔을 마셨지만, 전국적인 지지와 성원이 쏟아지면서 그것이 현실화된다. 즉, 부산 낙선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앞두고 유력 주자로 부상했을 때 노무현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은 인터뷰(유시민 전 장관과 2002년 2월15일 가진 대담으로 책 <상식, 혹은 희망 노무현>에 게재)에서 “부산에서 또 떨어지면 아무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고 보고 정치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일이 자꾸만 정치적으로 거론되면서 대권에 도전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부산 낙선, 그러나 전국적 지지 하지만, 집권 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가 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높았으나, 당내 기반은 없었다. 따라서 당 대의원들이 뽑는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그런데, 경선 방식이 바뀌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민주당 내에서는 2001년 세 군데서 치러진 10·25 재보궐선거에서 전패하자 쇄신 요구가 일기 시작했다. 당시 재보궐선거 결과는 민심 이반이 표로 나타난 것이었다. 김 대통령은 그해 11월 3일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당내에서는 개혁 소장파들이 동교동계 중진들의 2선 후퇴를 요구하는, 이른바 정풍(整風)운동이 일어났다.
민주당은 살기 위한 변화를 모색했다. 대통령선거 1년을 앞둔 상황에서 정권 재창출을 기치로 대통령후보 선출에 당원뿐 아니라 비당원을 참여시켰다. 국민들의 신청을 받아 당원과 같은 비율로 섞어 선거인단을 구성해 대통령후보를 뽑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 정당정치의 발전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국민참여경선이 도입되면서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에 빠졌던 국민들이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선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예비후보들의 지지자를 비롯해 인터넷에서 자발적으로 신청한 참여자가 200만명을 넘었고, 그중 무작위로 추출한 2만명의 선거인단을 꾸려 전국 순회 경선에 돌입했다.
선출 방식이 바뀌었다고 하나 노무현 고문에겐 현역의원 한 명도 결합되어 있지 않았다. 각 지역마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 발로 뛰어 수십만 명의 참여 신청서를 모았다.
당시 민주당 경선의 초점은 대선 예비후보 지지도 조사마다 선두를 달리고 있던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꺾을 경쟁력 있는 후보를 뽑는 것이었다. 정치권에서는 일찌감치 ‘이회창 대세론’이 자리 잡고 있었고, 민주당 예비후보들 가운데 그나마 이인제 고문이 가장 앞서 ‘이인제 대세론’이 퍼졌다.
이런 대세론에 대해 노무현 고문은 승복할 수 없었다. 특히 이인제 고문이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 고문은 3당합당 때 민자당에 합류했다가 97년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이회창 씨에게 진 뒤 불복한 전력을 갖고 있고, 그렇게 지난 대선에 나섰다가 떨어지고 나서 다시 집권당으로 건너온 기회주의 정치인이란 불신 때문이었다.
더욱이 개인에 대한 평가를 차치하고라도 이인제 고문이 민주당 후보가 된다면 선거구도는 다시 영-호남 지역대결 구도로 짜여 질 수밖에 없었다. 이인제 고문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지역기반인 영남에 맞서 호남과 충청 연대론으로 민주당내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지역대결로는 본선 승리를 예상하기 어려웠다. 산술적으로도 전체 유권자 중 28.2%를 차지하는 영남 유권자가 충청(9.9%)과 호남(11.7%)권 유권자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노풍’과 감격의 광주 경선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 노무현 당시 고문이 뛰어든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은 2002년 3월9일부터 제주도를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민주당 경선에는 노무현, 이인제, 한화갑, 정동영,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등 일곱 명의 후보가 나섰다.
후보들은 저마다 DJ 계승론, 부패척결론, 세대교체론, CEO대통령론 등을 앞세워 선거인단을 공략했다.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내건 것은 “개혁과 통합으로 원칙의 시대, 화합의 시대를 열어가자”는 것이었다. 당시 노무현 후보가 밝힌 경선 출사표의 한 부분이다.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는 사람만이 민주당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번 선거도 동서대결로 치러진다면, 우리 민주당은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중략)… 저는 반드시 승리해서 정치개혁과 동서화합을 이루고, 그리고 원칙이 승리한다는 것을 국민 여러분께 또 역사에게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 2002년 2월 24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출마 기자회견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국민경선. 노무현 후보는 세 번째 경선지인 광주에서 1위에 올라 일찌감치 승세를 굳혔다.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광주, 인천, 부산, 전남 경선. |
“경호원 한두 명과 남대문시장에, 자갈치시장에, 동성로에, 근남로에, 은행동 거리에 모습을 나타내는 대통령, 거기서 마주친 시민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대통령, 그런 친구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중략)… 우리 함께 꿈을 현실로 만들어 봅시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봅시다. 불신과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개혁의 시대로, 통합의 시대로 갑시다. 우리 아이들에게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물려줍시다.” - 2002년 4월 27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수락 연설
“이번 대선은 권위주의, 특권주의, 분열주의로 얼룩진 낡은 유산을 청산하는 시대적 선택입니다.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 원칙과 통합의 시대를 향해 미래와 손을 잡는 시대 전환의 역사적 계기입니다. 우리는 다시 희망의 닻을 올렸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기필코 승리합니다.”
- 2002년 9월 30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대책본부 출범식 연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운동.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한 노사모 포장마차, 국민 후원금 희망돼지 모금 행사, 선거 유세장에서. |
이전글‘세종시’와 ‘균형발전’은 노무현 대통령의 오랜 꿈 다음글‘청와대 셰프’ 신충진 씨가 추억하는 노무현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