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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1996년 4월 11일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에 출마합니다. 하지만 다시 낙선하고, 1998년 국민의 정부로 정권이 바뀐 뒤 그해 7월21일 종로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됩니다. 노 대통령이 13대 이후 국회에 다시 발을 들여놓은 건 6년만이었습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얼마 뒤 차기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출마를 선언합니다. 선거를 무려 1년이나 앞두고…

지역주의에 맞서 바보 노무현이 되다

1996년 종로 국회의원 출마, 2000년 다시 부산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부산시장 후보로 나섰다가 지역주의 역풍에 낙선했다. 하지만, 민주당의 지방선거 성적표는 나쁘지 않았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민자당이 영남, 민주당이 호남, 자유민주연합이 충청을 정치 기반으로 다진 가운데 민주당은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했고, 기초단체장 및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여당인 민자당을 앞섰다(부산에서 민주당은 전패였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자 민주당은 내분을 겪다가 분열한다. 원인은 지방선거 경기도지사 후보 공천과정에서 일어난 이기택 대표 측과 동교동계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결국 그해 7월, 김대중 이사장이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민주당 내 주류는 집단 탈당했다. 그리고 민주당에 남은 사람들도 이기택 대표를 따르는 세력과 이 대표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당(救黨)과 개혁을 위한 모임’(이하 구당 모임)으로 갈렸다. 정치인 노무현은 구당 모임에 함께 했다. 그해 연말 정국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지역정서는 논리로 풀 수 없다이듬해인 1996년 4월 11일, 제15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정치권은 민자당에서 당명을 바꾼 여당 신한국당과 야당인 국민회의, 민주당, 자민련 등이 난립했다. 민주당은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정치’ 청산과 세대교체를 선거 전략으로 삼고, 시민운동가 출신들로 구성된 ‘정치개혁시민연합’과 학생운동가 출신의 ‘젊은 연대’와 손잡았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노무현 전 의원은 부산이 아닌 서울 종로에서 출마했다. 그것은 당의 결정이었다. 지역구였던 부산 동구는 선거구 조정에 따라 중구와 합쳐짐에 따라 중구에서 선거를 준비해 온 김정길 전 의원이 나섰다.

종로 선거에는 무려 9명의 후보가 나왔다. 신한국당에서 이명박, 국민회의는 이종찬 후보가 출마했다. 선거는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간 각축으로 전개됐다. 제3당인 민주당으로선 어려운 싸움이었다. 민주당 후보로 나선 노무현은 “정당보다 인물을 보고 투표해 줄 것”을 지역민들에게 호소한다. 당시 종로는 ‘정치 1번지’라 불리던, 정치적 상징성이 큰 곳이었다. 그때 나온 공보에 밝힌 종로 출마 동기다.



종로는 어려운 역사의 고비마다 한국정치의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장면 총리, 윤보선 대통령, 박순천 여사, 유진오 총재, 이민우 총재 등 정통야당의 거목들을 탄생시켜 나라의 지도자로 키웠습니다. 종로는 자랑스런 전통과 자부심이 있는 정치1번지입니다. 그러나 지난 16년 종로의 명예, 자부심은 실종되었습니다. 정통야당의 거목을 탄생시켜 정치1번지라 불리던 종로에서 노무현은 진짜 야당을 다시 세우고 싶습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대들보가 되고 싶습니다. 
 
- 96년 제15대 국회의원선거 공보 중에서

이렇게 해서 나온 선거구호가 “종로가 바뀌면 한국정치가 바뀝니다!”였고, 선거 포스터에는 “올바른 정치, 진실한 사람”이란 문구가 붙었다.

제15대 서울 종로 국회의원 선거결과는 여당 후보 이명박 씨(4만 230표, 41.0%)의 당선이었다. 노무현 후보(1만 7,330표, 17.6%)는 국민회의 이종찬 후보(3만 2,918표, 33.5%)에 이어 3위였다. 이명박 후보의 당선에는 돈 선거가 한 몫 한 가운데 야권 표의 분산이 원인이었다.

노무현 후보뿐 아니라 민주당 후보들은 줄줄이 낙선했다(서울에서는 강동갑 이부영 후보만 당선). 제15대 국회의원 전체의석 299석 중 비례대표를 포함해 신한국당이 139석, 국민회의 79석, 자민련 50석을 차지했고,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20석 확보가 절실했던 민주당은 15석을 얻는 데 그쳤다.

제15대 국회의원선거 결과는 한국 정치에서 지역적 연고를 기반으로 한 3김정치의 위력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신한국당이 과반 의석엔 못 미쳤다고 하나, 전통적인 야당 우세지역인 서울에서 선전함에 따라 언론들은 ‘여당 승리’란 평가를 내렸다(선거 직후 신한국당은 원내 과반 확보를 위해 민주당과 무소속 당선자 빼가기 공작을 벌였다). 그것은 야권이 분열된 데 따른 반사이익이었다.

정치인 노무현은 제15대 국회의원선거를 통해 “3김청산과 지역정서는 논리로 설득해 해결될 일이 아니고, 제3당으로는 지역당을 타파할 수 없다는 경험적 인식을 얻었다”고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술회하고 있다.


 ▲ 96년 서울 종로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운동 

선거 패배 후 민주당 내 당권투쟁은 격화됐다. 전당대회가 열리면서 ‘구당 모임’은 당권을 놓고 인권변호사 홍성우 씨를 주자로 세워 이기택 대표와 경쟁했으나 지고 말았다. 그렇게 당권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개혁과 통합을 위한 국민통합 추진회의’(이하 통추)란 조직을 만들었다. 96년 11월, 정치인 노무현도 여기에 참여했다. 당시 통추에 참여한 정치인들은 김정기, 김정길, 노무현, 유인태, 원혜영, 이강철, 제정구, 박계동, 박석무, 김부겸, 이철, 이호웅, 홍기훈, 김홍신, 이미경, 김원웅, 임종인 씨 등이었다.

97년, 김영삼 대통령 임기 말에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나라가 됐다. 김영삼 정부의 거듭된 실정으로 경제위기가 심각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해 여름 시작된 외환위기가 실물경제로 확산되면서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대량 실업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 와중에 정치권은 연말 대통령 선거에서 차기 집권을 노리고 이합집산했다.

신한국당 대선후보가 된 이회창 씨는 김영삼 대통령과 차별화를 꾀하며 ‘3김청산’을 주장했다. 그리고 민주당과 합당하여 조순 씨를 총재로 내세우고, 당명도 한나라당으로 바꾸었다. 국민회의 후보로 대선에 재도전한 김대중 총재는 ‘정권교체’를 내걸고 자민련을 이끌던 김종필 씨와 연합했고,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한 이인제 씨는 이에 불복해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가 국민신당을 창당했다.

정치권이 재편되면서 통추 인사들도 찢어졌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통추 내부에서는 세대교체와 정권교체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일부는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합류했고, 다른 일부는 정권교체 기여를 위해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통추 상임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던 노무현 전 의원은 97년 11월13일, 대선 한 달여를 남겨 놓고 국민회의에 입당한다. 이때 국민회의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호남을 고립시켜 놓은 지역구도 정치지형에서 고립당한 쪽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열에서 정치적 이익을 얻는 쪽에 가담하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당당하게 설명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정치인 노무현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정권교체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얼마전 타계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고문이 당시 이끌던 ‘통일시대국민회의’ 초청 시국강연에서도 피력한 바 있다.

“어떻게든 정권교체를 할 수만 있다면 김대중 총재를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백 가지 제도보다 민주주의 혁명의 경험, 정권교체의 경험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론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정권교체가 중요하다. 그것이 원칙이다. 3김 청산은 원칙이 아니라 타협할 수 있는 전략적 명제라 보았다.”

노무현 전 의원은 국민회의 입당 후 부총재에 임명됐고,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부산 경남 울산 선거대책위원장과 수도권 특별유세단을 맡아 김대중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리고 그해 12월,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다.

“달라서 좋다”, 15대 국회 입성김대중 정부 출범 후 1998년 7월 21일에는 서울 종로에 재선거가 있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0선거에서 당선된 이명박 의원의 전직 비서관이 돈 선거 실상을 폭로하는 바람에 치르게 된 선거였다. 당시 이명박 씨는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고, 당선 무효 확정 판결이 나기 전에 의원직을 사퇴해 버렸다.

국민회의의 종로 지구당 위원장은 이종찬 전 의원이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이종찬 씨가 안기부장에 발탁되면서 노무현 부총재가 지구당 조직을 넘겨받아 종로 재선거에 나섰다. 당시 선거 포스터의 문구는 “달라서 좋다”였다. 이는 카피라이터 송치복 씨가 제안한 것이었다. 정치인 노무현은 선거 슬로건 자구 하나도 참모들과 몇 차례 숙고 끝에 직접 정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이 카피는 한 번에 흔쾌히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문구와 함께 ‘소신, 능력, 정직’이란 단어로 기회주의 정치인들과의 차별화를 공략했다. 그러면서 지역 공약보다는 정치인으로서 IMF 사태로 인한 서민들의 고단한 삶과 줄줄이 무너지고 있는 자영업자와 기업인들의 비애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심정과 이 위기를 극복하고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다짐이 독백처럼 실려 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글이다.



평생 자기 돈으로는 룸싸롱도 한 번 못가보고 회사의 발전이 나의 발전임을 굳게 믿고 살다가 예고 없이 잘려버린 이 나라의 가장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남편이 기죽을까봐, 혹시 엉뚱한 마음 먹을까봐 발자욱 소리도 크게 못 내고 속만 타는 이 땅의 어머니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4절까지밖에 열심히 외운 죄밖에 없는데, 갑자기 피아노를 못 치게 된 우리 아이들을 위해 나는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싼 임대료에 권리금까지 주고 시작한 장사, IMF에 한 달 이익이 월세 줄 돈도 못 되어 문 닫으려니 전세금조차 빠지지 않는 중소상인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힘들게 비위 맞춰 받아놓은 어음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되고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직원들을 자르려니 그 가족이 눈앞에 어른거려 뭉클 뭉클 극단적인 생각만 나는 우리 기업인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3당합당을 거부하고 원칙 있는 바보가 될 때의 소신, 동서화합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해 대통령선거에서 지역을 초월한 선거운동을 할 때의 그 역사인식으로 돌아가는 일 이상의 그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정치인으로서 가족의 이익보다는 종로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나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일 이상의 그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 98년 제15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공보 중에서

종로 재선거에서 노무현 부총재는 13대 국회 이후 6년여 만에 다시 의원 배지를 달았다(선거결과는 국민회의 노무현 후보 2만 6,251표, 한나라당 정인봉 후보 2만 993표였다).


▲ 98년 서울 종로 제15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운동

하지만, 정치상황은 정치인 노무현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정권교체를 이루고 다시 국회의원이 됐으나, 한나라당의 정치 공세 속에 영-호남 지역주의 골은 더욱 깊어갔다. 국민의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들은 영남 차별정책으로 호도됐다. 여기에 ‘부산에서 도망쳐 피난처인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는 개인적 자책까지 보태졌다.

결국 노무현 의원은 국회의원에 당선된 지 6개월만에 차기 선거에서 부산 경남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다. 제16대 국회의원선거를 무려 1년이나 앞둔 시점이었다. 노무현 의원의 99년 2월 9일 기자회견을 보도한 신문기사다. 


노무현 부총재, 내년 부산서 출마
국민회의 노무현 부총재가 9일 내년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종로를 떠나 부산으로 출마하겠다고 선언, 지역주의에 도전장을 냈다. …(중략)… 국민회의는 그의 부산 출마선언에 높은 평가를 보냈다.

노 부총재는 이날 당사에서 회견을 갖고 “종로는 정치인이라면 한 번 해보고 싶은 지역구”라고 아쉬움을 내비친 뒤 “그러나 지역감정 심화를 보면서 더 이상 망설일 수도, 기다릴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갈등은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면서 “똑같은 사실도 지역을 오가면 흑이 백이 되고, 백이 흑이 된다”고 개탄했다.

노 부총재는 특히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직접 지칭, “정치입문 3년 만에 지역감정을 선동, 나라를 둘로 나누느냐”면서 “부산·경남을 위해 무엇을 해주었다고 분열을 조장하는가”라고 물었다.

-<한국일보> 1999년 2월 10일자


당시 이에 대해 언론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여권이 당내 영남 출신 인사들을 투입해 차기 총선에서 영남권의 반(反) 김대중 정서에 대한 정면돌파에 나섰다”거나, “노무현 의원이 서울에 이어 정치적 고향 부산에서 정면승부수를 던짐으로써 대권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치인 노무현의 ‘부산 출마’ 결단 배경에는 어떠한 정치적 해석보다 우선이었던 것이 “지역감정에 맞서 영-호남 지역 구도를 반드시 깨겠다”는 소신이었다. 참모들은 반대했다. 하지만, 결심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종로 지역구민들과 당도 그 진의를 이해해 주었다. 국민회의에서는 노무현 부총재를 경남도지부장에 임명한 뒤 동남지역발전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지원했다.

2000년 또다시 부산으로여당인 국민회의는 2000년 들어 지역당의 한계를 뛰어넘는 전국정당화 목표를 내걸고, 당명을 새천년민주당으로 바꿨다. 여당의 부총재로 부산에 내려온 노무현 의원에게는 노동계를 비롯한 각종 지역 민원들이 빗발쳤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면서 언론의 관심은 민주당의 부산 진출 여부에 모아지고 있었다.



당시 부산은 민주당에게 정치적 사지(死地)나 다름없었다. 부산 민심은 김영삼 대통령 퇴임 후 정치적 소외감이 팽배해 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호남 편중인사에 따른 부산 홀대와 부산 경제 죽이기, 낙후된 지역 발전 등 한나라당의 공세 속에 반(反) 민주당 정서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런 상황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부산 선거에 도전한다는 것은 무모해 보였다.

특히 노무현 의원이 출마한 부산 북강서을은 인구 18만 명의 농·공업 중심 도시 외곽지역으로 삼성자동차 파산 사태, 녹산공단과 가덕도 신항만 조성 등 현안들이 산적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선거에서는 무엇보다 지역개발과 발전에 대한 지역민들의 기대가 컸다.

그해 4월13일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권 심판론’을 들고 나왔다. 노무현 후보는 ‘지역발전’과 ‘큰 인물론’을 내세웠다. 당시 선거기획본부장을 맡았던 이호철 참여정부 전 민정수석의 말이다.

“부산의 유권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여당 후보인 노무현 의원이 당선되어야 지역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노무현 의원이 민주당 차세대 지도자로 꼽히고 있어 이를 부각시켜 지역주의를 돌파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 2000년 부산 북강서을 제16대 국회의원선거 운동

선거 포스터의 문구는 “부산의 큰 일꾼”이었다. 선거 공보에는 지역발전 공약들과 “노무현이 민주당의 차기 대권 후보가 되어도 민주당을 ‘호남당’이라고 미워하시겠습니까?”라는 다소 공격적인 문구가 실렸다. 그러면서 과거보다는 ‘미래’, 당이 아닌 ‘인물’, 지역정치가 아닌 ‘통합의 리더십’을 강조했다.

선거 초반, 지역민들의 반응은 우호적이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도 상승세였다. 그러자 한나라당에 비상이 걸렸다. 한나라당 후보는 충북지사를 지낸 허태열 씨였다. 허 후보는 첫 합동유세에서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이에 대해 언론들과 국민들은 망국적 지역감정이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반감에 대한 배타적 지역주의가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의 선거 공천 파동으로 급조된 민국당에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한 또 한 명의 문정수 후보가 한나라당 표를 잠식할 것이란 기대도 수그러들었다.

그래도 여론조사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허태열 후보를 계속 앞서갔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언론들은 정치인 노무현의 도전이 성공할 것이란 예측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지역 유권자들이 한나라당 지역정서와 ‘노무현 인물론’ 사이에 갈등하고 있었다. 투표를 하루 앞둔 저녁, 노무현 의원은 거리 유세를 갖는다.

“제가 부산에 내려온 것에 대해 정말 잘한 일이라는 확신을 하게 됐습니다.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부닥쳐 보니 만만치 않았습니다.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많았는데, 막상 나서서 뛰어주는 분들이 적었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역주의 벽이 이렇게 두터운 것인가에 좌절하고,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게 용기를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노무현, 당신의 선택은 옳다고, 이기든 지든 도와주겠다고 나서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 여러분들이 손가락질을 무릅쓰고 도와주셨기에 많은 분들이 저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노무현 하나 국회의원을 만들기 위해 저와 여러분이 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나라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똘똘 뭉치고 있는 것입니다.” -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선거 유세 중에서

투표함이 열렸다. 노무현 후보가 얻은 표는 2만 7,136표(35.7%), 허태열 후보(4만 464표, 53.2%)의 당선이었다. 부산에서만 세 번째 낙선이었다. 당시 부산의 17개 선거구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들이 모두 당선됐다. 결국 지역정서에 또 무너졌다.

부산에서 노무현 후보의 선거를 도왔던 자원봉사자들과 지지자들은 아쉬움과 비통함에 눈물을 삼켰다. 노무현 의원은 지지자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습니다’라는 글을 올린다. “이 아픔을 잊는 데는 시간이 약이겠지요. 또 털고 일어나야지요.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부산의 거리에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노무현은 부산을 그래도 사랑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부산 시민들은 낙선 인사를 다니는 노무현 의원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했다. 선거가 끝나고 당시 부산총선연대를 이끌던 송기인 신부는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했다.

“우리의 정치 수준을 다시 보여준 선거였다. 하지만 노무현의 도전은 사회 발전을 가져올 것이다. 그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고, 더 많은 노무현이 나와야 한다.”

노무현의 좌절이 남긴 여운은 길고 깊었다.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보고 전국에서 수많은 시민들의 관심과 격려 댓글이 쏟아졌다. 인터넷에서는 당선이 보장된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가서 다시 낙선한 ‘바보 노무현’이란 별명이 붙었다. 언론의 관심도 뜨거웠다. 제1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최고 스타는 낙선자 노무현이었다.

인터넷을 달군 전국의 시민들은 노무현의 좌절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했다. 자발적으로 정치인 노무현의 팬클럽이 만들어졌다. 바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렇게 ‘대통령 노무현’이 준비되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 권영준/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2.01.13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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