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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출마했던 역대 선거의 공보 등에 나타난 선거 슬로건을 통해 정치인 노무현의 선거를 돌아봅니다. 정치에 입문한 1988년 부산 동구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992년 재선에 도전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6년 서울 종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와 1998년 국회의원 재보선, 2000년 부산 북강서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까지, 일곱 번의 선거 이야기를 나누어 싣습니다.

“가자! 노무현과 함께, 사람사는 세상으로!”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1995년 부산시장 출마까지



노무현 대통령은 마흔셋의 나이인 19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첫 발을 들인다. 1987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씨의 후보 단일화 실패 및 민주화운동 진영의 분열로 인한 선거 패배와 군사독재 정권의 재집권은 그해 부산 거리에서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던 인권변호사 노무현에게도 절망을 안겨 주었다.

대통령 선거 이듬해, 야당인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에서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재야 명망가들을 영입해 세 불리기에 나섰다. 부산에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노무현 변호사에게도 통일민주당으로부터 입당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제도 정치권의 참여를 놓고 의견이 엇갈려 있었다. 운동진영의 장년 그룹은 독재정권에 맞설 강력한 통합야당을 건설하기 위해 정치 참여에 무게를 싣고 있었고, 젊은 세대는 회의적이었다.

‘사람사는 세상’ 향한 첫 발노무현 변호사는 노동사건과 시국사건을 변론하면서 정치활동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부산 운동진영의 동지들과 논의 끝에 선거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당시 노 변호사는 선거 출마 동기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민권운동의 연장선에서 정치권에 참여하기로 한 것입니다. 만일 국회의원이 된다면 변호사와 비교가 안 될 영향력으로 민중운동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역구는 전두환 정권의 실세로 불렸던 허삼수 씨가 나선 부산 동구였다. 그렇게 뛰어든 첫 국회의원선거에서 내건 슬로건이 “가자! 노무현과 함께, 사람사는 세상으로!”였다. ‘사람사는 세상’은 노무현 변호사가 민주화 투쟁 당시 애창했던 민중가요 <어머니> 노랫말의 한 구절이었다. 이때 품게 된 ‘사람사는 세상’의 꿈은 이후 정치인 노무현의 평생 꿈이자 유업이 됐다.
 

당시 선거에서 지역 유권자들에게 내놓은 ‘사람사는 세상’은 군사독재 정권과 싸우며 품었던 민주화운동의 이슈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정치에 첫 도전하면서 노무현 변호사가 꿈꾼 ‘사람사는 세상’의 모습이다. 

· 우리 모두가 사람답게 살려면 민주주의 파괴자들,
  민족 반역자들을 결연히 심판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 소수의 사람들이 부를 독점하고 서민을 핍박하는 재벌경제를 해체하고
  중소기업과 노동조합을 육성해야 합니다. 
· 재벌부정축재자들이 독점하고 있는 토지를 분배하여 무주택 서민과
  중소기업에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 앉아서 놀고먹는 사람의 수입을 억제하고 수고한 사람이 정당한 몫을 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 외세를 물리치고 민족의 주권을 되찾아 우리 운명은 우리가 꾸려가야 합니다. 

- 88년 13대 국회의원선거 홍보 팸플릿 중에서

13대 국회의원이 되다선거가 시작됐다. 하지만 정치권의 선거판은 녹녹치 않았다. 허삼수 후보 측은 돈을 뿌려대며 유권자들을 매수했고, 폭력을 앞세워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노무현 후보 진영엔 대학생들과 노동운동가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노무현 선거진영은 돈도 없었고, 조직력도 열세였다. 당시 부산 동구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이석렬 씨의 증언이다.

“기존 정치인들은 허삼수 씨가 나온 동구를 기피했습니다. 그러다 노무현 변호사가 통일민주당에 입당해 선거에 나왔는데, 빈손이었지요. 그 시절 동구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서 골목을 누비며 선거운동을 했는데, 낮엔 지역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돈도 없지 사람 만나기도 어렵지,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 저녁이면 여성 당원들이 집집을 돌며 사람들을 모아 놓으면 그 자리에 찾아가 밤늦도록 좌담회를 열었습니다. 반면 허삼수 쪽은 돈이 넘쳐 났습니다. 허삼수 유세장에 가서 돈 봉투를 받은 사람들이 이를 고발하겠다며 사무실로 많이 찾아왔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선거운동원이었던 김영자 씨의 회고다.

“허삼수 후보가 안창마을에서 돈 봉투를 돌린다는 제보가 있었어요. 우르르 몰려갔죠. 그랬더니 마을 입구에서 경찰들이 막아서는 거예요. 그래 관할 파출소로 몰려갔다가 파출소장하고 시비가 붙었습니다. 소장이 우리들을 고발했고, 재판까지 받았죠.”

선거 막바지로 갈수록 허삼수 후보 쪽 흑색선전도 극심했다. 투표일 며칠을 앞두고는 부산지역 대학생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노무현 후보의 경력을 날조한 ‘부산지역 총학생회협의회’ 명의의 흑색선전물이 발각되기도 했다. 명의는 도용된 것이었고, 인쇄물은 허삼수 쪽에서 의뢰한 것이었다. 노무현 선거운동 진영은 <사람사는 세상>이란 제호의 종이신문을 만들어 부정선거 실상을 알리며 맞섰다.

또, 이런 사건도 있었다. 여성 당원 김순복 씨의 증언이다.

“남자 선거운동원 하나가 허삼수 후보 운동원들에게 맞아 병원에 입원했어요. 다음날이 투표일이었는데, 허삼수 운동원들이 사제 권총을 갖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분위기가 험악했죠. 그때 노무현 후보가 혼자 허삼수 사무실로 찾아가 충돌을 자제하자고 타협을 봤습니다.”

  1988년 4월 26일 13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결과, 통일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다. 노무현 후보가 얻은 표는 5만 3,075표(득표율 51%). 민정당 허삼수 후보 4만 3,986표, 평민당 이후근 후보 2,049표, 공화당 한기승 후보 4,384표였다.

당시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등 야 3당은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문을 연 13대 여소야대 국회는 과거의 국회와 달랐다. 야당이 정국주도권을 쥐면서 군사독재정권을 견제할 환경이 조성됐다. 야당들은 더 이상 의사당 밖에서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힘없는 야당이 아니었다. 야 3당의 정치성향과 지지기반이 달라 제한적이긴 했으나 의회 민주주의가 일부 복원됐다. 국정감사가 부활되고, 청문회가 도입됐다.

국회에 입성한 노무현 의원이 첫 대정부 질의에서 참담한 노동현실을 질타하며 울분을 쏟아내자 김대중, 김영삼 두 야당 총재를 비롯해 동료 의원들로부터 기립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노무현 의원은 국회 노동위에서 활약하며 평민당의 이상수·이해찬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불렸고, 서민과 노동자를 대변하기 위한 의정활동을 펴나갔다. 그리고 국회 5공비리 청문회가 열리면서 ‘청문회 스타’로 부상했다.

하지만 13대 국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계를 드러냈다. 국민들의 폭발적인 관심 속에 열렸던 5공 청문회는 성과 없이 유야무야됐다. 민정당은 청문회를 거부했고, 청문회는 야당 단독으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 의원은 무력감을 느끼며 국회의원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사직서는 주변의 설득으로 17일 만에 철회됐지만, 이후 정국은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 정국으로 반전됐다. 노무현 의원은 첫 발을 디딘 국회에서 정치인으로서 존재를 세상에 알린 한편으로 보스 정치와 당리당략의 정치현실 속에 ‘정치의 한계’를 절감했다.

원칙을 저버릴 수 없었던 길1992년 3월24일. 노무현 의원은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한다. 지역구는 이번에도 부산 동구였고,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 이때 소속정당인 민주당은 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씨가 밀실야합으로 만든 거대여당 민자당에 합류를 거부했던 통일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만든 ‘작은 민주당’과 김대중 총재가 이끈 신민주연합당이 합친 통합 야당이었다.

3당합당 뒤 정국은 민자당의 독주로 치달았다. 90년 7월, 국회에서는 병역법 개정안이 날치기 처리됐고, 야당 의원들이 항의 표시로 집단 사퇴한 가운데 한동안 국회는 파행으로 운영됐다. 얼마 후 국회가 정상화되긴 했으나 이후로도 민자당의 독단적 국정운영은 계속됐다.

노무현 의원은 3당합당 과정에서 김영삼 씨와 결별했고, 야권 통합운동에 나서 91년 9월 통합 민주당을 출범시킨다. 노무현 의원이 김영삼 씨를 따라가지 않고 야당 정치인으로 남아 야권 통합에 나선 것은 정치적 소신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정치는 현실입니다. 전술적 고려에 의해 때로는 현실과 타협해야 하나 원칙을 뒤로 미룰 수는 없습니다. 원칙이라는 것은 역사의식이며 정치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기준을 세우는 일입니다. 김영삼 씨는 원칙이 없었기에 변절한 것입니다.”

노무현 의원이 92년 선거 즈음에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밝힌 정치적 소신이다. 92년 부산 선거는 야당에겐 김영삼 씨의 변절로 어려운 선거가 예견되고 있었다. 더욱이 정치인 노무현은 13대 국회에서 스타로 떠오르면서 여기저기서 집중 견제를 받고 있었다. 조선일보의 프로필 왜곡보도도 악재였다. 92년 선거를 앞둔 전 해, 노무현 의원이 민주당 대변인을 맡자 조선일보는 불순한 의도로 덧칠된 허위기사를 내보냈다. 그것은 한 정치인의 정치생명을 끊어놓으려는 악의적인 왜곡이었다. 노무현 의원은 조선일보와 법정 소송을 불사한다.

이런 악조건 속에 치러진 92년 선거에서 노무현 의원은 민자당 후보로 나선 허삼수 씨와 재격돌한다. 13대 국회 때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성장했으나 지역구 조직은 붕괴된 상태였다. 더군다나 부산에서는 동서 지역분할이란 정치지형 아래 민주당은 ‘호남당’, ‘김대중당’이란 인식이 퍼져 있었다. 주변에선 부산 선거구가 아닌 서울 출마를 권유했으나 노무현 의원은 이를 마다했다. 정치인 노무현에게 92년 선거는 ‘영남에서 야당 복원’이란 의미가 있었다. 당시 언론에 밝힌 선거 출마의 변이다.

“부산에서 다시 출마하는 것은 야권통합을 완수하기 위해서입니다.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위대한 전통을 만들어 온 ‘야도 부산’을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선거 포스터에는 “부산의 자존심. 역시! 노무현”이란 슬로건이 나붙었다. 노무현 의원은 선거에 임하면서 백범 김구 선생의 말을 새겼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산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헤엄친다.’ 하지만 당시 부산의 김영삼 바람을 거슬러 날기엔 역부족이었다.

김영삼 씨는 허삼수 지원유세에 모습을 나타냈다. 4년 전 허삼수 씨를 ‘반란을 일으킨 정치군인’이라며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김영삼 씨는, 이번엔 ‘충직한 군인’이라 지칭하고 “부산에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허삼수를 국회의원으로 뽑아 달라”고 말을 바꾸었다.



무너진 ‘야도 부산’ 복원의 꿈결국 노무현 의원은 재선에 실패한다. 득표율은 3만 397표(32.3%)로 허삼수 후보(5만 9,894표, 63.6%)의 절반이었다. 이는 당시 민주당이 부산에서 얻은 평균 득표율(20.7%)보다는 높았다. 그렇기에 한 번의 패배로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정치인 노무현은 내일을 준비하며 다시 일어선다. 92년 낙선 후 노무현 후보가 ‘부산 동구 유권자들에게 보낸 편지’다.

···(중략)··· 이제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작은 규모나마 ‘지방자치연구소’를 새로 차리고 동구지구당 운영도 계속할 것입니다. 지난 4년 동안 ‘인사가 없다’, ‘뭐해 주었느냐’라는 질책은 정말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인사’는 시간과 돈이 필요한 일이고 ‘지역사업’은 거짓말을 해야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는 마당에도 이 두 가지는 여전히 큰 고민거리입니다. 

그러나 저는 원칙을 지키려 합니다. ···(중략)··· 저는 표를 얻기 위하여 인사를 다니는 대신, 그 시간에 실제로 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 합니다. ···(중략)··· 선거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 하여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다니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령 영원히 당선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원칙은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앞으로는 유권자 여러분들과 자주 대화와 토론의 자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 저에게 도움을 청할 때에는 언제든지 나서겠습니다. 아울러 지역사회와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일을 찾아서 뛰어다닐 작정입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뜻을 모아 함께 해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중략)··

- 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후 편지글 중에서



정치인 노무현의 92년 선거 패배는 3당합당으로 보수 정치세력의 손에 들어간 영남의 ‘지역주의 고착화’와 정치적 이해를 위해 ‘원칙’을 저버리는 기회주의 정치와의 싸움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한편, 민주당은 제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영남 교두보 확보에 실패했으나 호남과 서울 수도권에서 선전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김대중 후보가 나섰으나 민자당 김영삼 후보와의 승부에서 패했다.

지방자치 시대 부산시장 출마92년 대선에서 또 다시 패배한 김대중 씨는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후 이듬해 3월 전당대회를 열고 집단지도체제를 꾸린다. 이때 노무현 전 의원은 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어 원외이지만 중앙정치 무대에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노무현 전 의원에게는 당내 계파도 없었고 조직도 없었다. 당시 민주당 대표를 맡았던 이기택 씨는 독선적인 당 운영으로 최고위원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그런 가운데 노무현 전 의원은 해마루 합동법률사무소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93년 9월 지방자치실무연구소와 94년 3월 부산지역정책연구소를 잇달아 열었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는 지방화와 균형발전 시대에 대비한 지방자치와 분권, 정치 및 행정 개혁 과제들을 구체화하는 역할을 했다. 지역 국회의원들과 일반 당원을 비롯한 정치 지망생들이 참여했고, 학계 등 전문가들이 함께 한 정치인 노무현의 싱크 탱크가 되었다.
 

1995년 6월27일, 최초로 전국 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됐다. 그해 2월 민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부총재로 선출된 정치인 노무현은 대중 인지도를 꾸준히 높인 결과, 지방선거를 앞둔 각종 여론조사에서 야당의 광역단체장 후보로 꼽히고 있었다. 경기도지사 선거에 민자당 후보로 출마가 예상된 이인제 씨와의 여론조사 가상대결에서도 1위를 달렸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민주당에선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정무부시장 러닝메이트로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 부총재는 부산시장 선거를 선택한다.

김영삼 대통령 이후를 내다보고 “부산에 야당을 다시 세우고, 민주당을 전국정당으로 만들겠다”고 나선 선거였다. 이런 대의명분 아래 부산시장 경선에 나서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당시 부산시장 선거의 슬로건은 “소신있는 시장, 활력있는 부산”이었다.

‘인물론’으로 승부, 그러나 지역주의 역풍노무현 후보는 부산시장 선거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원과 지역주의 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인물론’으로 승부했다. 선거 공보에 나타난 홍보 문구이다.

이번 선거, 정당보다 인물을 보고 뽑아야 합니다.
이번 선거는 여당의 심부름꾼을 뽑는 선거가 아니라 부산살림을 맡을 우리의 일꾼을 뽑는 선거입니다. 이 중요한 일꾼을 당만 보고 선택할 수만은 없습니다. 특정 정당이 추천한다고 아무나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지명된 후보가 당선되면 임명시장이 될 것입니다. 이번 선거 - 인물이 중요합니다. 능력이 중요합니다. 부산은 우리가 뽑은 민선시장을 원합니다.

- 95년 부산시장 선거 공보 중에서



여론조사로는 선거 초반까지 선두였다. 하지만 부동층이 여당으로 몰리면서 격차가 좁혀졌다. 그런 상황에서 정계를 떠났다가 영국에서 돌아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세운 김대중 이사장이 민주당 후보들의 지원 유세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대중 이사장의 지역등권론 발언이 부산에서 지역주의 바람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승세는 한순간에 뒤집어졌다. 부산의 분위기는 민주당을 탈당하면 뽑아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후보는 지역주의에 영합할 수 없다면 민주당 깃발을 고집했다. 결국 낙선했다. 

상대는 김영삼 대통령의 측근 실세였던 문정수 후보였다. 당시 부산시장 선거 투표율은 66.2%였고, 유효 투표수 172만 2,390표 중 민자당 문정수 후보가 얻은 표는 88만 5,433표(51.4%)였다. 노무현 후보는 64만 7,297표(37.6%)를 득표했다. 비록 선거에서 또 졌으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정치인 노무현의 정치적 자산과 가능성을 보여준 결과였다. (다음에 계속)

 

  • 권영준/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2.01.09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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