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도관 : 여태까지 사진이라든지 녹음한 예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노무현 : 변호사가 지금 접견하고 있지 않습니까. 접견하면서 적을 권리는 있고 녹음할 권리가 없다는 게 상식적으로 얘기가 됩니까? 안 그렇습니까
- 노무현 : 선생님, 저 담배 좀 피겠습니다. 실례가 될 것 같은데, 피겠습니다. 목이 탑니다.
- 나도 하나 피웁시다. 피울 줄은 몰라도.
- 노무현 : 담배 피십니까?
- 그냥, 친구들 따라서. 더군다나 이제 혼자 피기 미안해하는 분 계시니까.
2016년 여름, 노무현사료연구센터에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에 등장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늦봄 문익환 목사와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왜, 그리고 어떻게 변호인과 피고인으로 만났을까요.
문성근 노무현재단 이사는 노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부친 문익환 목사의 재판 변론을 부탁하려고 국회로 찾아간 1989년으로 기억합니다. 노동인권변호사에서 당시 통일민주당 소속 초선의원으로 활동하던 노무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고 하지요.(<선택의 순간들>, 218쪽) 구술 외에 전해지는 기록이 없던 노변과 문 목사의 만남이 드디어 27년여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안양교도소로 문 목사를 찾아간 노변은 그의 생각을 국민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녹음기를 꺼냅니다. 이 녹취물은 노 대통령이 직접 생산한 기록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녹음을 제지하는 교도관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1시간 27분가량의 대화는 다섯 차례 이상 실랑이와 중단을 거듭하다 “녹음기 끄겠습니다”라는 교도관의 말로 끝납니다. 돌아오는 18일, 고(故) 문익환 목사 서거 23주기를 앞두고 노무현사료연구센터는 어렵게 기록되고, 오랜 시간 끝에 찾게 된 1989년 6월 1일 문익환 목사 접견 녹취록을 간추려 소개합니다.
일제 강점기 만주 간도에서 태어난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와 명동소학교 동문으로 함께 시를 쓰며 성장했습니다. 만주·일본 등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 후 신학 교수, 목사, 성서번역가로 활동하던 그는 1975년 <사상계> 발행인이던 친구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듭니다. 이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1980)을 비롯 독재정권에 맞서는 재야 지도자로 맹렬히 활약, 1994년 생을 다할 때까지 총 6번 구속되어 11년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릅니다. 1심 공판을 준비하며 노변을 만난 건 1989년 방북사건이 터진 후였습니다.
문익환 : ‘모든 통일은 좋다.’고 장준하가 말했을 때, 다음 문맥을 보면 ‘공산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주의도 통일에 기여할 때만 의미가 있는 거다.’ 북쪽 공산주의 체제도, 너희들이 공산주의 아무리 좋다 그러지만은, 통일에 기여해야 공산주의가 있는 거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쪽에서도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 민주주의가 통일에 기여할 때만 의미 있는 거야. 민주화를 생략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에 이르기 위한 민주화라고 하는 것, 그게 이게 장준하 씨의 발언의 의도였고. 그렇게 민주화를 품는 통일 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취하느냐, 하는데 가서는 그것은 어느 것도 좋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민주주의 체제라고 하는 것은 나라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른 거니까. 그런 민주화를 통한 통일만 이루어진다면 그 체제 자체는 어떠한 것이든 선이다. 그게 이제 장준하 씨의 주장이라.
그것을 그 후에 나는 어떻게 발전을 시켰느냐면은 ‘통일을 지향하는 민주주의만이 이 땅에서는 민주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거다.’ 하는 것이 그동안의 제 주장이었죠. 근데 이번에 가서 확인한 거는 북쪽이, 김일성 주석을 위시해서 국민들 전체가 김 주석 당대에 통일을 꼭 이룩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그 결의가 대단하다는 걸 발견했어요.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입니다.’ 그것이 북쪽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도 완전히 들어맞은 거죠.
최초의 공동성명…"안하고 오는 게 좋을 뻔했다"
문익환 목사는 1989년 3월 25일 북한이 제공한 조선민항기를 타고 평양 순안비행장에 내립니다. 그의 나이 71세였습니다. 북측은 그날 바로 문 목사의 공개 방북을 언론에 타전했고, 정부와 사전협의 없이 이루어진 방북 소식에 국내 정치권과 여론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문 목사는 4월 3일까지 북한에 머무르는 열흘 동안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나 만나 연방제 통일방안 등 남북한 사이의 여러 현안을 논의합니다. 나아가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허담 위원장과 “쌍방은 어떠한 경우에도 분열의 지속을 목적으로 하는 두 개의 조선정책을 반대하고 끊임없이 하나의 민족, 그리고 통일된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등 9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 ‘UN에 한 나라로 가입한다는 건, 거의 그거는 북한의 지금까지 연방제 통일론이라는 것이 군사외교 등 상당히 실질적인 권한을 연방정부가 가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것이라면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다)이다’라고 저희 문 목사님 말씀하시니까 거기에서 이제 김일성 주석이 꺾이었다 이런 말씀이고.
그다음에 거기 가는 과정에 이르러서 정치군사회담을 저쪽에서는 계속 선행할 것을 주장했는데 (문 목사님이)그것을 계속 고집하는 한 또, 역시 접근의 길이 꽤 멀다고 주장하시니까 그래도 우리의 다른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회담을 먼저 ‘선행’해 가면서
문익환 : 난 ‘동시에’ 정치군사회담은 이미 시작한 거니까 그와 동시에 다방면에 걸친 회담을 열고 교류를 진행해야죠.
노무현 : 바로 이거라. 저쪽에는 정치군사회담의 선행을 항상 주장했고, 그것이 해결되고 다른 것들로 이렇게 얘기됐었는데, 다방면에 걸친 제(諸) 회담을 동시에 병행해 나가자는 것이 문 목사님 주장이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다는
문익환 : 그러나 사실 나는 민간 합의를 해 가지고 뭐 공동성명을 낼 생각은 전혀 안하고 갔어요 나는. 그냥 그 길이나 튼다.
노무현 : 소득이 있으리라고 또 기대를 할 수도 없는 상황 아니었습니까?
문익환 : 타진이나 하고 온다 그런 건데. 너무 의외로 상당히 긍정적 합의를 했고. 그러니까 그쪽에서도 이거는 공동성명으로써 기록으로 남겨야 되겠다, 나는 안 될 것 같았는데 ‘좋다. 그럼 하자.’고 했는데 사실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안하고 왔던 게 좋을 뻔했어요.
노무현 : 큰 성과라고 받아들이셨는데, 말하자면 이 성과를 문 목사님이 거두셨다는 이유 때문에 성과를 성과로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권력의 성격을 미처 그것까진 생각을 못하셨다는. 성과니까 그냥 받아오면 이것이 큰 소득이라고 생각했는데 문 목사님이 이것을 받아오면 오히려 더 방해할 수밖에 없는 이 권력의 성격을 미처 생각 못 하셨다, 그런 말씀이시죠?
문익환 : 그런 거죠. 정말 안타까운. [웃음]
4월 13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한 문 목사는 항공기 안에서 곧바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로 연행돼 구속당합니다. 이듬해인 1990년 6월 8일, 대법원은 국가보안법상 지령수수, 잠입·탈출, 회합·통신, 금품수수, 찬양·고무·동조 혐의로 항소심이 선고한 징역 7년형을 확정짓습니다. 문익환 목사 변호인단에는 노무현 의원을 비롯해 한승헌, 황인철, 조준희, 홍성우, 박원순, 박인제, 조용환 등 유수한 변호인이 포진해 있었지만 공안정국을 조성해 위기를 모면하려는 노태우 정권의 폭압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사진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사로운 감정으로 국가 문제 그르쳐선 안 돼"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 대한 국내 평가는 엇갈렸습니다. 노태우 정권과 여당은 ‘문 목사의 월북은 그 자체로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고 규탄하며 몰아붙였습니다. 한편, 야권과 민주세력 일부는 방북 자체보다는 그 시기에 문제가 있었다고 아쉬움을 비쳤습니다. 여소야대 구도를 형성한 13대 국회에서 전두환 정권의 비리 청산 작업을 시작하려던 찰나, 문 목사의 방북이 집권당에게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빌미를 주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수사를 맡은 공안수사합동본부는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비롯해 김상현 민주당 부총재, 김덕룡 의원 등은 물론 고은 시인, 백낙청·리영희 교수까지 연행해 재야인사들에 대한 광범위한 공안몰이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민감한 주제임에도 두 사람은 문답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 선생님의 입장을 이해하는 입장에서도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어떻든 이쪽 ‘남한의 권력이, 정권이 선생님께서 무엇을 가서 얻어 오시든 간에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뿐만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들에게 주면 냉큼 받을 것도 선생님에게 받아오시는 것은 못 받겠다. 따라서 오히려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조차도 선생님이 받아오셨기 때문에 당분간 이게 채택되기 어려운, 대화의 통로가 막힌 결과가 된 것 아니냐’하는 이런 관점에서도 볼 수는 있거든요. 그런 얘기를 하면서 ‘선생님은 정치인이 아니고 한 분의 양심 있는 신앙인이다.’ 라든지 또는 ‘시인적 정서를 가진 어떤 분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분들이 있죠. 정확하든 안하든, 그런데 그다음에 또 다른 문제가 ‘시인적 정서를 가진 분이 현실 정치의 아주 민감한 문제에 뛰어든 것은, 결국 좀 적절치 못했다’든지 ‘자기의 분수를 좀 넘어선 것이다.’ 이런 편견들이 있는 것 같애요.
문익환 : 우린 민간 차원의 합의인데 이것을 건의를 하니까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고. 그런 자세를 우리(정부)가 가지고 있는다는 게 문익환이가 받아왔기 때문에 후퇴를 한다? 이거(통일문제)는 정말 민족적인 차원이 아닌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국가 문제를 그릇되게 하는 엄청난 과오를 범하는 거다. 그것은 정말 역사에서 규탄을 받아야 된다. 난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다음에 이 민간 교류라고 하는 것이 정부나 국회 차원의 교류와 회담의 기초 작업이다 하는 것, 이게 이제 내 소신이고.
방북사건은 통일 운동에 일생을 헌신한 문익환 목사의 마지막 재판이었습니다. 1993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듬해 1월 18일, 급환으로 생을 마칩니다. 한편 문 목사의 방북행과 성과를 ‘북괴’에 대한 이적행위로 규정한 노태우 정권은 이후 놀라운 행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1990년 남북 양측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고위급회담을 개최하는가 하면, 1991년에는 남북UN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발표가 이루어지지요. 특히 남북기본합의서는 ‘북한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상호존중과 불간섭 교류를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북 분단 68년째가 되는 2017년, 한쪽에서는 ‘통일 대박’, 다른 한쪽에서는 ‘종북 좌파 세력 척결’을 외치는 정권의 이중성은 좁혀지지 않는 남북관계처럼 여전합니다.
안양교도소에서 녹음기가 멈추기 직전, 문 목사는 노변에게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구술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옥중서신은 1989년 6월 6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리게 되는데요, 마지막으로 아래에 그 전문을 소개합니다.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구속 기소된 문익환 목사가 옥중에서 ‘국민들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문 목사가 71회 생일을 맞아 지난 1일 접견을 간 노무현 변호사(국회의원)에게 구술, 노 변호사가 정리한 것이다.<편집자>
'국민에게 드리는 글'저는 우리 민족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분단에 있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분단의 극복 없이는 어떤 문제건 제대로 풀릴 수 없다는 확신으로 살아왔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소신입니다. 그러나 이 확신, 이 소신은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의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통일이라는 민족 최대의 과제를 풀어보겠다고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몸에 불을 지르고 칼을 꽂으며 한번밖에 살 수 없는 꽃같은 청춘을 민족의 제단에 희생제물로 바친 저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저는 이 민족적인 대과업을 그들에게만 맡겨둘 수 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을 살 만큼 다 산 사람으로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그들의 의생을 막으며 그 뜻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이상과 같은 확신과 7천만 겨레의 뜨거운 염원을 등에 업고 평양행을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분단의 빗장을 내리고 통일의 문을 여는 데 자그마한 보탬이라도 되고 싶은 붉은 마음(丹心) 하나였습니다.
저는 저의 평양행이 이렇듯 큰 파문을 일으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파문이니 이제 우리는 이 파문에서 오는 충격을 진정시키고 다같이 통일의 문제를 진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냉정하고 이성적인 토론과 대화를 거쳐 전국민적인 합의를 도출해 내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 될 수만 있다면 이 파문도 역사적인 의미를 얻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차분하게 이성적인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3월 20일, 김포공항을 떠날 때 정부의 승인을 얻어 당당히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정말 서러운 일이었습니다. 일본 중국을 거쳐 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저는 하루속히 극복해야 할 민족의 비극으로 느꼈습니다. 제 나라라고 돌아와서는 반국가적 행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 또한 슬픈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검찰의 조사를 마치고 나서 정부 당국에 간곡한 호소를 했습니다. 저의 충정은 어디까지나 분단이라는 민족모순을 극복하고 통이르이 날을 앞당기려는 데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여 달라고, 그리고 북쪽을 적으로 규정한 국가보안법만은 적용하지 말아 달라고….
그 까닭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북쪽을 적으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을 저에게 적용한다면 이것은 남과 북이 모처럼 합의한 7.4공동성명의 통일의지와 통일원칙을 일방적으로 부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노태우 대통령이 7.7선언과 유엔연설에서 북쪽을 적이 아니라 동반자로 삼아 민족문제를 같이 풀어 보겠다고 대내·대외에 엄숙히 약속한 것을 백지화함으로써 대통령의 권위와 위신을 실추시키고 그의 공신력에 먹칠을 하는 것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정부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통일방안은 발표도 되기 전에 그 공신력을 상실하고 말겠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이렇게 해서 이 중대한 역사적 시점에서 대한민국은 7천만 겨레의 통일염원을 배신하고 통일을 가로막았다는 극히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역사에 남기겠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지금 뜨겁게 달아오르는 겨레의 통일 열기에 찬물을 끼얹어 통일을 그만큼 지연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를 들어 이번에 저에게 국가보안법만은 적용하지 말아 줄 것을 정부에 간곡히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기어코 저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이제 저는 법정을 정부와 겨레, 그리고 한반도문제에 대한 이해관계가 있고 관심이 있는 세계 모든 나라들과 한반도 문제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는 마당으로 알고 담담한 심정으로 법정에 나설 것입니다.
이제 저는 법정에 서서 민족문제를 국민 여러분과 논의할 날을 기다리면서 자작시 한 편을 읊어보겠습니다.
45년이라니
이건 너무 길었습니다
일제 36년도 지긋지긋했었는데
분단 45년이라니 이건 너무 길었습니다.
너무 아팠습니다.
너무 억울했습니다.
이대로는 눈을 감고 죽을 수도 없군요.
아니 이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너무너무 부끄러운 일입니다.
푸른 하늘 흰 구름을 쳐다보기도 부끄럽군요.
능라도 휘늘어진 실버들에서 뿜어내는
젖빛 신록의 피어나는 희망이
지금 여기선 녹음으로 짙어 가는데
우리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서러운 눈을 들여다 보자니
이건 꼭 죽고만 싶군요.
얼마나 못났으면
45년이나 이러고 있었나요.
남들이 어쩌다 멋대로 그어 놓은 금
그게 뭔데
그게 대체 뭔데
아직도 못지우고 있나요.
비바람이 지우면 이번엔
우리 손가락으로 더 깊이 흠을 파면서
그게 뭔데
그게 대체 뭔데
하마 지워질세라
200만 군대를 무장시켜 지켜야 한다니
서로 건너다 보면 눈이나 흘기며
서로 괴뢰니 주구니 욕지거리를 해대면서
욕되게 욕되게 살다가
죽지 못해 살다가
하나씩 둘씩 개처럼 죽어 가야 하다니
이건 정말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군요.
너나없이 모두모두 머리를 쥐어뜯으며
부끄러워나 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이건 정말 가슴이 터지는 일입니다.
통일염원 45년 6월 1일
안양교도소에서
문익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