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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노무현, 국회의원직을 사임하고자 합니다”

1989년 3월 정부 여당의 위법·부당한 행위에 분노, ‘자필로 쓴 사임서’

 

국회 노동위 부산지방노동청 국정감사 중인 노무현 의원


얼마 전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PDF 파일 하나를 건네받았습니다. 파일 안에는 아주 낯익은, 그러나 평소 봐왔던 것과는 뭔가 다른 격한 감정의 소요가 느껴지는 노 대통령의 자필 문서 스캔본이 들어 있었습니다. 1989년 3월 19일, 초선 의원이었던 노 대통령이 김재순 당시 국회의장에게 보내는 ‘국회의원 사임서’였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사임서는 표지를 포함해 모두 8장으로 돼 있었습니다. 1988년 4․26총선에서 승리하고, 한 달 뒤인 5월 30일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의정생활 10개월 만에 쓴 것입니다. 사임서를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을 노 대통령의 분노와 절망이 얼마나 컸던지, 몇 군데는 오자가 났는데도 새로 쓰거나 수정하지 않고 힘주어 두 줄을 죽죽 그어버리곤 곧바로 말을 잇고 있었습니다.

노무현 의원이 부산지방노동청 국정감사장을 찾은 노동자들과 만나 대화하고 있다.  
 

국회의원 노무현이 얻은 창과 방패, 그리고 모순(矛盾)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가 제안하기는 했지만, 노 대통령에게 국회의원 출마는 “노동자들을 돕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아주 소박하면서도 확고한 소신에서 출발한 일이었습니다. 1988년 7월 8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의에서 말했듯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거 입는 거 이런 걱정 안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내딛은 걸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1년도 안 돼 국회의원 사임서를 쓰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그토록 분노하고 절망케 했던 것일까요?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노 대통령은 그를 필요로 하는 곳, 그가 있어야 할 곳은 노동현장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분규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마다않고 발로 뛰었고, 자신의 의지로 잘못된 것이 바로잡히는 모습을 보며 커다란 보람도 느꼈습니다. 재야 운동가 시절의 외침이 ‘창(矛)’이었다면, 의원 신분은 여기에 든든한 ‘방패(盾)’ 하나를 더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게 모순(矛盾)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5공비리특위 청문회 이후 젊고 패기 넘치는 정치인 노무현의 대중적 인지도는 급속도로 높아졌습니다. 각종 뉴스와 신문 지면이 그의 이야기로 도배가 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꾸고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려는 그의 정치활동 목표는 거기에 없었고, 가난한 고졸 출신 변호사의 드라마틱한 성공담만 윤색되어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노무현의 절망은 현장이 아닌 국회 안에서 이미 거대한 뿌리를 박고 있었습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희뿌연 최루탄 연기 한복판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치르던 고된 몸싸움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운명이다>를 통해 당시 느꼈던 절망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1989년 3월, ‘잔인했던 그 봄날’“1989년 3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가로수들이 화창한 봄볕 아래서 싱그럽게 어린잎을 피워 올렸고 하늘빛도 무척이나 고왔다. 오전 본회의를 마치고 국회 정문을 빠져나오다가 버스 정류장에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이 우두커니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을 보았다. 수행비서가 ‘상계동 철거민들인데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밀려났다’고 했다. 

플래카드를 둘둘 말아들고 맥 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그 사람들 앞으로 국회의원들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다. 슬픔이 어깨를 짓눌렀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런 사람들이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막는 국회에 몸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맨몸으로 바닥을 뒹굴며 피땀으로 움켜진 희망이 국회와 정부, 집권여당의 행태에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정당은 광주조사특위와 5공비리조사특위에 제 발이 저려 불참했고, 노동자에 대한 공권력의 횡포와 부당한 행정 처리는 쳇바퀴 돌듯 반복되었습니다. 또한 노태우 정부는 여야 합의를 거쳐 만장일치로 통과된 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려고 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자필 사임서는 손발이 묶인 듯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가 세상을 병들게 하는 부조리와, 그로 인해 희생당하는 민중들을 향해 가슴으로 쓴 혈서였습니다. 


시대를 향한 외침 “이견 있습니다”사임서를 제출한 노 대통령은 충주호로, 예산 수덕사로, 강릉으로 발길 닿는 대로 홀로 떠돌며 심한 자책감에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시민단체들은 그의 복귀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고, 거리에서 만나는 국민들도 그의 복귀를 독려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노 대통령은 열흘 만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권양숙 여사와 문재인 변호사, 부산상고 동기들을 비롯한 여러 분의 간곡한 설득으로 사퇴 철회서를 썼습니다. 훗날 노 대통령은 이때를 “잔인한 봄이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국회의원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인간적 고뇌와 절망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듬해인 1990년 1월에 노태우(민주정의당)와 김영삼(통일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의 3당합당이 이뤄졌습니다. 통일민주당의 합당 결의장에서 국회의원 노무현은 “이견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합시다”를 외쳤습니다. ‘야합’이라는 골리앗을 향한 정면대결이었고, 굴곡진 현대정치사에서 정치인 노무현의 외롭고 고단한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13대 국회 노무현 의원이 쓴 ‘국회의원 사임서’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국회의장, 선배 동료의원 여러분!

저는 지난 몇 년간 민중들과 함께 독재정권에 맞서 길거리에서 맨몸으로 싸워왔습니다. 그러다가 6·29 이후 민주주의를 한다기에 박해받는 민중들의 이익을 대변해 보겠다고 국회에 들어왔습니다.

막상 들어와 보니 처음에는 국회가 제 자리를 찾는 듯했습니다. 국정감사, 청문회를 통하여 부정과 부패를 분류해내어 일부나마 국민의 권리를 찾아주는 듯하였고, 지금껏 국민을 억압해 왔던 악법도 하나하나 고쳐 나갈 수 있을 듯하였습니다. 집권 여당의 반대와 방해로 진도는 더디고 성과는 시원찮은 것이었으나,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열성을 다하였습니다. 제 딴에는 힘에 버거웠든지, 그동안 밤잠을 편히 잘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상했으나, 의욕과 보람으로 고통을 이겨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은 다시 달라졌습니다. 민정당은 광주조사특위와 5공조사특위에 불참함으로써 국회를 포기하였고, 정부는 증인의 출석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불법입니다. 노태우와 정부 여당이 법치주의와 의회주의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들이 즐겨 말하는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특위뿐이 아닙니다. 노동상임위원회의 활동도 소용이 없습니다. 위원회 회의, 또는 국정감사 활동을 통하여 노동자에 대한 위법․부당한 행정 처리와 공권력 발동을 무수히 지적하고 그 시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쳐진 것은 단 한 가지도 없고, 오늘도 같은 위법․부당한 행정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감정적으로 국회의 지적에 역행하는 행위로 뒤통수를 치기도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오늘날 공권력은 또 다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있습니다. 서울 지하철 파업사건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동안 수차례의 분규는 모두 지하철 공사가 87년에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동안 공사는 각서 조항의 해석에 관하여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노동자들을 기만해오다가, 88년 10월 국정감사에는 서울시장과 지하철공사 사장이 합의각서에 대한 그들의 종전 주장이 생트집이었음을 인정하고, 즉시 노동자들의 요구대로 이행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 지하철공사 사장은 또 다시 복잡한 핑계를 내세워 이행을 지체함으로써 오늘의 이 사태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시민의 발을 묶은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장의 단체협약 불이행이고, 이는 처벌 받는 행위입니다.

노동자들이 시민의 발을 묶은 죄로 30여명이 구속되어야 한다면, 역시 법을 위반하였고, 그것도 국회와의 약속을 위반하여 시민의 발을 묶은 지하철공사 사장은 입건조차 하지 않는가. 이 경우 국회는 무엇이고 국정감사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지난 2월 국회 노동상임위원회는 그 결의로써 노동부로 하여금 부산 항만노조의 구조적 비리를 조사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동부의 조사결과는 문제의 핵심에는 접근조차 하지 않은, 형식적인 것으로 끝이 났고, 그 과정에서 제가 제공하는 증거자료의 접수마저 회피하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취업을 미끼로 여러 차례 돈을 받은 전과가 있고, 지금도 같은 혐의로 기소되어 있는 조합장에게 조사를 종료한 며칠 후 정부가 산업포장을 수여한 사실입니다.

악법 개정의 노력도 허사입니다. 지금도 현대중공업의 노동자들은 여럿이 구속되고 여럿이 쫓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쫓기고 있는 이유는 노동악법이 그 원인입니다. 이번 국회는 노동쟁의조정법을 개정하여 방위산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파업금지 조항을 폐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여야 합의를 거쳐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법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노태우와 그 일파의 눈에는 국회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회의에 불참하여 국회를 반신불수로 만들고 증인출석을 방해하고, 위법․부당한 행위에 대한 시정 요구는 묵살하고, 의결된 법안을 거부합니다. 정말 막가는 행위입니다. 정부가 법을 지키지 않는데 국회가 무슨 소용이고 국회의원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사태를 국회와 국민에 대한 모욕임은 물론, 그에 그치지 아니하고 의회주의, 즉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의 도전이라 규정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깊은 치욕감을 느낍니다. 물론 사려 깊고 책임감 있는 의원이라면 이러한 경우라도 참을성 있게 의원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주어진 의원의 권한을 최대한 활용하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저의 건강상태는 이 같은 수모와 그로인한 정신적 고통을 이겨나갈 만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이 시간에도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싸우고 있는 대중투쟁이야말로 의정활동에 못지않게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얼마동안 건강을 위하여 휴식을 취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박해 속에서 싸우고 있는 동지들의 투쟁대열에 동참하려 합니다. 오늘 이 같은 결심을 함에 있어, 저를 뽑아주신 부산 동구 주민들에 대한 죄책감은 오늘 이 결심을 뒤집고 싶을 만큼 무거운 것입니다. 그밖에 지금까지 저를 지지하고 도와주신 여러분들에 대하여도 같은 심정입니다. 다만 용서를 빌 뿐입니다.

어느 길을 가더라도 억압 받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을 다짐합니다. 계속 성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89. 3. 17.
국회의원 노무현




 

  • 김상철/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1.03.24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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