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6·27지방선거 이후 민주당은 통합 4년 만에 다시 분열됐다.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그해 9월 민주당 내 동교동계가 대거 탈당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한편, 노무현 부총재는 부산시장 낙선 뒤 96년 4·11총선에 민주당 후보로 서울 종로에 나섰으나 연거푸 낙선의 쓴잔을 마셨다.
96년 총선에는 집권여당 신한국당과 야 3당인 국민회의, 민주당, 자민련이 난립했다. 선거결과, 신한국당이 전체 299석 중 과반에 조금 못 미친 139석, 국민회의 79석, 자민련 50석을 차지한 가운데 3김정치 청산을 내건 민주당은 원내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하는 제4당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민주당 당선자 15명 중 5명은 신한국당에 입당하는 지경까지 맞았다.
통추 결성과 15대 대선 논쟁총선이 끝나고 민주당은 내분에 휩싸여 이기택 대표와 이 대표의 퇴진을 요구해온 ‘구당(救黨)모임’이 맞섰다. 6월 전당대회에서 이기택계의 승리로 당권에서 밀려난 개혁성향 인사들은 ‘지역할거주의 극복과 정치개혁”을 기치로 ‘개혁과 통합을 위한 국민통합추진회의’(약칭 통추) 결성을 추진했다.
통추는 그해 9월 26일 준비위가 꾸려져 11월 9일 3천여 명의 발기인으로 창립됐다. 김원기 대표를 비롯해 장을병·제정구·이수인·이미경·김홍신 의원, 노무현·이철·김정길·김원웅·유인태·원혜영·박석무·홍기훈·황의성 전 의원, 김부겸·이강철·안평수·성유보 씨 등이 참여했다.
한편, 정치인 노무현은 낙선 후 96년 변호사 업무에 전념하다가 97년 들어 종로에 무료법률상담소를 열었다. 이어 3월에는 통추 인사 몇몇과 돈을 출자하여 강남 역삼동에 ‘하로동선’이란 고깃집도 차렸다. ‘하로동선’(여름 난로 겨울 부채)이란 상호에는 언젠가 요긴하게 다시 쓰일 때를 기약하는 정치야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 이밖에 노무현 전 의원은 6월 30일부터 3개월 여 동안 SBS 라디오 뉴스프로그램 <뉴스대행진>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이 프로는 매일 정오부터 6시간 동안 1,2 부로 나눠 생방송으로 편성됐다.
97년 2월 26일, 노무현 대통령은 원외 정치인 시절 서울 종로 3가에 무료법률상담소를 열었다. 상담소 개소식에 참석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김원기 상임대표(오른쪽)과 제정구 사무총장(왼쪽). |
97년 대선이 다가오면서 통추도 진로를 모색했다. 정치권 재편을 노리던 여야 후보들에게 통추는 합종연횡의 대상이었고, 통추 내에서는 어떤 후보와 손을 잡을 것인가를 놓고 논의가 시작됐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연초에 이미 김대중-김종필(DJP) 연합 아래 각당 후보를 선출한 뒤 단일화하기로 합의했고, 김대중 총재는 5월 20일 국민회의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자민련도 6월 24일 김종필 총재를 후보로 선출했다. 여권인 신한국당에서는 이회창 대표·이수성 전 총리·이인제 경기지사가 유력주자로 부상하여 7월 21일 대의원 경선을 통해 이회창 씨가 후보가 됐다. 통추에서는 여당 후보와의 연대, 야권통합론에 입각한 제3후보 지지, 새로운 정치주체 형성을 위한 독자후보론 등이 제기됐다.
그러던 중 야권의 제3후보로 거론되던 조순 서울시장이 민주당에 입당하여 8월 28일 총재로 추대됐다. 그리고 9월 11일 조순 전 시장은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됐다. 한편, 신한국당 경선에서 패한 이인제 지사가 독자출마를 저울질하다가 9월 13일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그해 가을, 정치권은 여름부터 흘러나온 국가부도설 앞에 요동쳤다. 김영삼 대통령 임기말에 외환위기가 현실화되면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신청이 거론되고 있었다. 외환위기는 실물경제 위기로 번져 '경제 살리기'가 선거의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세대교체냐, 정권교체냐이회창 후보는 인기가 몰락한 김영삼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꾀하며 ‘3김청산’을 주장했다.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정권교체’를 내세웠다. 독자출마를 선언한 이인제 지사는 ‘세대교체’를 내걸었다.
통추 인사들에 대해 한때 조순 총재가 민주당 합류를 추진했으나 이기택계 등 당내 주류에 막혀 무산됐다. 그리고 외환위기로 신한국당의 이회창 후보 지지도가 급락하고, 민주당의 조순 씨의 인기가 떨어지자 통추 일각에서는 이인제 지사와의 연대 주장도 제기됐다.
통추가 나서 ‘조순-이인제’ 단일화 중재를 모색했다. 그러면서 신한국당 내 민주계까지 포괄하는 제3세력 연대 방안이 논의됐다. 그런 한편에서는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협력도 대두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후보의 지지도가 선두를 달리면서 “87년 야권 분열의 원죄는 밉지만 대선 승리 가능성이 있다면 정권교체를 위해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자”는 DJ 배웅론이었다.
통추에서 김대중 후보와의 협력 가능성이 나오자 국민회의는 통추 인사들 영입에 적극 나섰다. 김대중 후보는 통추 인사 중에서도 부산이 정치적 기반인 노무현 전 의원이 함께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통추 해산 ··· 노무현은 국민회의로한편, 노무현 전 의원은 통추 일각에서 제기된 이인제 지사와의 연대 주장에 반발했다. 9월 24일 “통추가 이인제를 지지한다면 노무현도 출마하겠다”고 표명했다. 정치인 노무현은 통추의 대선 진로에 대해 차기를 준비하자는 독자후보 추진에 기울어 있었다. 당시 대선 출마 검토 배경에 대해 한 언론과 가진 인터뷰이다.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세대교체 논의는 잘못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인제 씨는 3당야합에 영합하고, 거기서 쌓은 이력을 갖고 3김청산과 세대교체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는 자격이 없습니다. 신한국당 경선이 그나마 정치발전이라고 보는데, 그것마저 이인제 씨 출마로 뭉개졌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세대교체 논의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대교체에 관한 한 이회창 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역주의에 편승해 권력을 잡겠다는 생각으로 여당에 간 사람입니다. 통추 내부에서 한때 이회창 씨를 대안으로 검토한 적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런 흐름에 절대로 동의하지 못합니다.”
- 97년 10월 9일 발행, <시사저널> 제415호, 노무현 통추 상임집행위원 인터뷰
통추 내에서 조순-이인제 연대 추진이 반대에 부딪치자 9월 30일 열린 통추 상임집행위는 “독자후보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원점에서 재론”하기로 결정했다. 노무현 전 의원도 “대선 출마 여부는 통추의 논의와 결정에 따를 것”을 밝혔다.
10월 들어서도 통추에서는 의견을 통일하지 못한 채 격론이 오고갔다. 그러는 동안 10월 27일 김대중 후보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후보단일화에 합의했다. 이어 11월 4일에는 이인제 지사가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후보로 나섰다. 그 다음날, 조순 민주당 총재는 신한국당과 합당을 발표했다. 대선후보는 이회창 씨, 총재는 조순 씨가 맡기로 하고 21일 한나라당을 출범시켰다.
대선 진로를 놓고 갈 길을 정하지 못한 채 진통을 거듭하던 통추는 11월 9일 행동 통일을 포기하고 각자의 정치적 판단에 맡기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노무현을 비롯해 김원기·김정길·박석무·유인태·원혜영·홍기훈·황의성 전 의원 등은 국민회의 쪽으로, 일부(제정구·김홍신·이수인·이미경·이철·김원웅)는 신정치추진연합을 결성해 한나라당으로 찢어졌다.
11월 13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서는 국민회의에 들어가기로 한 통추 인사들의 입당 합의문 서명이 있었다. 양측은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50년 여당의 부패와 부조리를 청산하는 여야 정권교체가 이 시대 최대의 사명이자 최고의 개혁이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 하고 대선에서 함께 힘을 합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입당 후 김원기 통추 전 대표는 국민회의 상임고문에, 노무현·김정길 전 의원은 부총재에 임명됐다. 통추 입당파 인사들은 국민회의의 개혁성을 견인하며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노무현 부총재는 부산경남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선거구도가 김대중-이회창-이인제 3파전으로 짜이면서 ‘3김청산’과 ‘세대교체’를 내세운 상대 후보들은 DJP를 맹공격했다. DJP에 대한 정치인 노무현의 인식은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대선에서 이념과 노선을 100% 순수하게 밀고가기는 어렵다. 국민들이 후보를 볼 때 정치성향만이 아니라 능력과 안정감 등 여러 측면을 종합해서 판단한다. 정당에 대해서도 그렇다. 누가 주도하는지를 본다. 주도세력의 색깔이 그 정당의 색깔이다. 대통령 후보가 김대중 총재로 결정된 이상 주도세력 문제는 정리된 것이 아닐까? 야당도 때로 야당의 인물들만 가지고는 전국에 후보를 낼 수 없다. 야당 출신을 우대하면서도 중립 지대에 있었거나 과거 여당에 종사했던 사람도 찾는 것이다. 정당을 순종(純種)만 가지고 할 수는 없다. 중간지대를 많이 포섭해 나가야 한다. 주도세력의 성격과 철학이 뚜렷하면 된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47쪽.
김대중 선거 캠프는 자민련 김종필-박태준 씨와 합류한 통추 인사들로 각각 보수와 개혁 양 날개의 진영을 갖췄다. 권역별 선거운동 전략을 짜면서 대구경북(TK)은 박태준 씨, 부산경남(PK)은 노무현·김정길 부총재를 앞세웠다. 15일 부산 전진대회를 시발로 17일 수원, 21일 인천, 22일 대전, 23일 대구를 돌며 세몰이에 나섰다.
11월 15일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열린 전진대회에서는 노무현 부총재가 연단에 올라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타파하기 위해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이번에는 호남 정권을 밀어주고 다음에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부산정권을 다시 한 번 세워보자”며 연설을 토해냈다.
김대중 후보에게는 대선 필승을 위해 영남 득표율을 끌어올리는 게 관건이었다. 이를 위해 노무현 부총재 등을 내세워 정권교체의 당위성을 홍보하고, 지역개발 공약으로 영남권 표심을 공략했다.
수도권에 파랑새를 띄워라11월 26일, 후보 등록이 마감되고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국민회의는 당내 개혁파 인사들로 수도권 거리유세를 담당할 파랑새 캠프를 구성했다. 가을부터 선두를 지키던 김대중 후보의 지지세가 정체를 보이자 이를 돌파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파랑새 유세단은 노무현·김근태·정대철 부총재를 중심으로 유인태·원혜영 등 통추 입당파와 김민석·추미애·신기남 등 젊은 의원들이 배치됐다. 이들은 3개팀으로 나눠 젊은 층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노무현 부총재도 서울 명동지역과 여의도 증권가 등을 돌며 집권여당의 경제실정을 질타하면서 “정권교체가 없으면 민주주의 개혁도 차세대도 없다”고 젊은 층의 표심을 파고들었다.
한편, 15대 대선은 역대 선거와 달리 미디어선거가 본격화됐다. 대규모 장외집회 대신 TV 후보연설·찬조연설·광고가 주요 선거운동 수단이 됐다. 이에 각 진영에서는 스타급 정치인과 명망가들을 TV 찬조연설자로 내세웠다. 각 진영의 찬조연설 중 12월 3일 노무현 부총재의 김대중 후보 찬조연설은 단연 돋보였다. 노 부총재는 진솔한 어조로 입당 경위를 설명하면서 고질적인 지역감정 극복과 정권교체의 당위성을 호소했다. 노 부총재의 찬조연설은 여야 후보 찬조연설원을 통틀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12월 18일, 투표일이었다. 투표결과는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1,032만 6,275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993만 5,718표, 국민신당 후보 이인제 492만 5,591표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반세기만에 선거를 통해 민주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종로 재보선에서 다시 국회로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다. 국민의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경제위기 극복에 총력을 쏟았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가는 혹독했다.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대규모 실업 사태가 벌어졌다. 정부 주도로 노-사-정위원회가 추진됐고, 노무현 부총재는 그 막후에서 무너져 내리는 노동계를 다독이며 협상을 도왔다.
한편, 98년 6·4지방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부총재는 당내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다. 하지만, 당에서 고건 씨를 후보로 영입하자 뜻을 접고, 7월에 실시되는 종로 재보선 출마를 결심한다. 종로 재선거는 이명박 한나라당 의원이 측근의 돈선거 폭로에 따른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면서 의원직을 사퇴해 치르게 된 선거였다.
7·21 종로 재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는 정인봉 씨가 나왔다. 선거결과 노무현 후보가 2만 6,251표(54.4%), 정인봉 후보는 2만 993표(43.5%)를 얻었다. 이로써 정치인 노무현은 원외 생활 6년 만에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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