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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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9월,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으로 구속된 노무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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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쏜 직격탄에 쓰러진 청년노동자87년 8월 22일, 거제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가 죽었다. 노사분규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이 가슴에 박혔다. 선각소조립부에 근무하던 스물한 살의 청년 노동자였다.
故 이석규 열사. 그의 죽음은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 저지른 타살이었다. 불과 한 달 반 전 6·29선언을 불러온 연세대생 이한열과 같은 죽임이었다. 그해 여름, 민주화 열풍을 타고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노동자들의 생존권 및 노조 결성 투쟁 와중에서 이석규 열사 사건으로 전국은 다시 한 번 들끓었다.
당시 대우조선은 세계 조선업계의 불황과 경영부실의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임원 감축에 따른 대량 해고가 단행됐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기능직과 사무직 간 차별이 문제가 되었다. 연초부터 일어난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 움직임은 회사 측의 방해로 번번이 좌절된 가운데 6월항쟁을 거치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8월 8일 대우조선 노조 결성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간단치가 않았다. 노조 활동 경험도 없었고, 첫 선출한 노조위원장의 어용시비로 내홍을 겪었다. 그리고 11일 새 노조(양동생 노조위원장)가 결성됐다.
이후 회사와 노조 간 임금인상 등 협상이 재개됐고, 기본급과 수당 인상 폭 등을 놓고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하지만 회사 측의 불성실한 교섭이 반복되면서 21일 회사는 노조와 협상을 거부한 채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노동자와 현지 주민이 합세한 2천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가두로 진출하여 관리직 사원들의 임시사무소가 있던 옥포관광호텔로 몰려갔다. 그리고 이를 막는 경찰과 옥포사거리엣 대치하며 연좌 농성이 시작됐다.
22일. 노조가 최종안을 제시했으나 회사가 또다시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자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이에 노동자들의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들의 무차별 최루탄 난사와 백골단(경찰 사복조)의 폭력이 자행됐다. 이날 오후 2시40분 이석규 씨가 쓰러졌다.
사태 수습 위해 거제로 간 ‘노변’22일 밤늦게 연락을 받은 노무현 변호사는 23일 아침 배편으로 거제로 건너간다. 대우 노동자들이 사체 부검 입회와 진상조사를 요청했던 것이다. 당시 노 변호사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서울, 마산 등지에서 양권식 신부, 김영식 신부 등 사제들과 재야단체 관계자들을 비롯하여 이소선 어머니 등 노동단체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노무현 변호사는 서울에서 내려온 이상수 변호사(참여정부 노동부 장관)와 함께 노조 집행부 등 대책위원회와 유가족을 만나 장례와 보상 등을 논의한다. 이어 오후에는 시신이 안치된 옥포대우병원 앞에서 열린 ‘진상보고 국민대회’(제1차)에 참석한다.
24일 오전, 부검이 실시됐다. 대책위는 장례를 ‘민주국민장’으로 치르고, 장지는 광주 망월동 5·18묘역과 전태열 열사가 묻혀 있는 서울 모란공원 중 택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노무현·이상수 변호사에게 보상 문제를 힘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장례절차 일체를 노조 집행부에 일임했던 유가족들이 태도를 바꿔 장례를 고향인 남원에서 개인장으로 치르겠다고 주장한다. 그 배경엔 뒤늦게 현지에 도착한 고인의 삼촌(육군 소령)이 유족 대표를 맡으면서 회사와 경찰의 회유 아래 결정한 것이었다.
유가족의 돌연 태도 변화에 노조 집행부와 대책위는 장지가 어디냐 보다는 고인 사망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책임자 처벌△당국의 공개사과 △피해자 보상 △노조요구 수용 등 6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장례식 무기 연기를 선언한다. 이 결정이 발표되자 정부와 언론은 ‘사체를 볼모로 한 노사쟁의’라며 사태 수습에 나섰던 재야인사 등을 ‘불순세력’으로 몰아간다.
25일 병원 앞마당에서는 제2차 국민대회가 열렸고, 한편에선 양 신부와 민주당 조사단의 중재 아래 노사 협상이 진행됐다. 마침내 27일 임금협상이 타결됐고, 28일 장례식이 결정됐다. 하지만 장례 관련해선 유족 측의 결정에도, 농성 노동자들은 장지를 광주 망월동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28일 오전 10시 30분. 병원 안팎으로 2만 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이 거행됐다. 오후 3시50분경 운구차가 옥포를 떠났고, 광주로 가는 도중 경찰의 시신 탈취 작전(?)이 벌어졌다. 경찰에 의해 운구차는 강제로 멈춰 섰고, 사람들은 경찰차에 태워져 연행됐다. 그리고 이석규 열사의 운구는 유가족들과 경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향 선산에 쓸쓸히 묻혔다.
사건의 진상은 “경찰의 고의적 살상”노무현 변호사는 임금협상 타결 직전인 26일 밤 부산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9월 2일 밤, ‘장례식 방해’와 ‘노동쟁의조정법상 3자개입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부산구치소에 수감된다. 노무현 변호사를 비롯 이상수 변호사, 신철영 당시 산업선교회 간사 등 모두 50여 명이 장례식 방해, 노동쟁의조정법 및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87년 9월 23일. 노무현 변호사의 구속적부심 재판이 열렸다. 법정에는 부산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 99명이 출석했다. 구속적부심 재판에 99명의 변호사가 출석한 것도 드문 사례였다. 결국 구속적부심이 받아들여져 피의자 노무현은 23일 만에 석방됐다. 재판결과, 노 변호사에게는 87년 11월 변호사 업무 정지처분이, 이듬해인 88년 2월 22일 벌금 1백만 원이 선고된다. 물론 불복해 노무현 변호사와 검찰 모두 항소하지만, 기각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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