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 관련 당시 검찰이 제기한 ‘장례식 방해’와 지금은 폐지된 악법인 ‘노동쟁의조정법 제3자 개입 금지 위반’ 혐의에 대한 노무현 변호사의 반박 글입니다. 이 글에서 노 변호사는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한 활동이 장례식 방해가 된다는 것은 억지”라고 강변하며, “분규타결과 사태수습 노력이 어찌 죄가 되는지”를 따집니다.
“분규타결 노력이 어찌 죄가 되는가”
87년 노동자대투쟁과 노무현 변호사의 구속②
-영장에 기재된 소위 범죄 사실에 대한 나의 항변
변호사 노무현
- 장례식을 방해하거나 노동투쟁을 조종 선동한 사실이 있는가.
o 전혀 그런 사실 없다. 영장 기재 범죄 사실은 전부 날조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사 분규과정, 사망의 경위, 장례위원회의 구성과정 등 제반 배경이나 부수적인 상황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왜곡 날조되어 있다.
- 옥포에 간 이유는 무엇인가.o 첫째로 대우조선 노동조합에서 사인규명, 장례절차 등에 관하여 국민운동본부의 도움을 청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o 둘째, 과거 노동자나 민주열사의 분신 사건에서 경찰이 사체를 탈취한 선례가 여러 번 있음은 물론이고, 공권력에 의하여 국민이 사망한 경우 진상을 은폐 조작 발표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민권단체에서 진상조사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o 셋째, 조사결과 과잉진압에 의한 피해이거나 거의 고의에 가까운 살인행위라 할 경우 이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장례와 추모행사를 통하여 강력히 규탄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이 효과를 거두자면 장례의 규모나 방식 등이 진상의 폭로와 범국민적 규탄의 뜻을 모으기에 적합한 것이어야 하므로 조사결과에 따라서는 장례절차에 관하여 유족과 노동조합에게 그러한 뜻을 함께 하도록 권유 조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 왜 그러한 일을 국민운동본부에서 해야 하는가.o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22일 저녁 거제 현지에서는 현지 민주인사(장상훈, 황 선생 등)와 노조 집행부가 합동으로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 첫째 작업으로 국민운동 부산본부에 진상조사, 부검 참여 등 대책 협조 요청을 하였다. 부검 참여는 가급적 변호사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본인은 변호사이자 부산운동본부 상집위원장으로 현지에 간 것이다.
- 장례위원회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기존 장례위원회라는 것이 있었는가.o (이 변호사는 23일 오후 늦게 도착. 장례위원회 구성 문제에는 관여할 수도 없었다) 8월 23일 10시. 대우병원에 도착하여 보니 주민 대표 수 명과 노조 집행부 임원 몇 사람이 ‘진상규명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협조 요청을 한 것도 그 위원회의 활동의 일환이었던 듯하다.
o 대강의 사태를 파악하고 11시경 양권식 신부를 만났다(그는 그 일주일 전부터 노사 간의 협상에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미 전날 저녁 장례위원회의 구성에 관한 대강의 구상을 노동조합에 조언해 주고 있었고 우리를 만났을 때에도 그 구상을 말하였다. 그 구상에 따라 12시경 확정한 것이 ‘전국노동자 장’의 장례위원회 조직이고, 그 이후 24일 오후 명칭이 ‘국민장’으로 바뀐 후에도 장례위원회 구성은 변하지 않았다. 이 장례위원회의 구성은 노동조합과의 완전한 합의(12시 회의)로 된 것이고, 그 이전에 무슨 위원회가 있었던 일도, 누구의 반발도 없었다.
o 이후 일반 노동자들은 재야인사의 활동에 감사하고, 지지하였다.
장례 관련 협의, “한국노동운동사에 죽음의 뜻 기려야”- 장지 문제에 관한 마찰은 어떻게 된 것인가.o 이 변호사와 내가 유족을 처음 만난 것은 23일 저녁이다. 그 이전에 이미 가족들은 부모보다 먼저 미혼으로 죽은 자식은 고향으로 갈 수도 없고, 묘지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하여 화장할 의사를 표시하였는데, 노동자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대우조선 뜰에 묻겠다고 하자, 그러면 전에 최루탄 맞고 죽은 학생 묻힌 그곳이 어떤가 하는 말을 하였다고 했다.
o 그에 따라 23일 12시. 노조 집행부와 양 신부, 김 신부, 본인 등의 연석회의에서 묘지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으면 광주 망월동 묘지로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장례일자를 5일장으로 하고, 그동안 쟁의는 보류한다는 원칙도 여기에서다). 이 변호사는 그 뒤에 도착하였다.
o 이러한 상태에서 유족을 만났더니 유족은 장지 문제보다 오히려 유족 보상을 받기 전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유족들이 그렇게 나오자 오히려 노조 측에서 장례는 장례대로 치르고 유족 보상은 여기 두 분 변호사에게 부탁하면 된다고 하여 유족을 설득하자 유족이 좋을 대로 하라고 응낙하였고, 장지는 광주 망월동으로 하는 데 합의하였다. 이어서 혹시 광주에 장지를 얻기가 어려우면 서울 모란공원 묘원으로 해도 좋다는 승낙도 하였다. 가족은 매우 분개하여 국민적 규탄과 죽음의 뜻을 기리는 일에는 호의적이었고 아울러 보상 문제에 매우 초조한 입장이었다.
o 그런데 24일 오전 부검 시에 삼촌이라는 사람이 도착하더니 오후 3시반경 노조와 재야의 연석회의에 나와서 갑자기 가족장으로 하고 화장을 하여 재를 바다에 뿌리겠다고 하더니 노조가 반발하자 장례절차 문제는 모두 노조의 결정에 따르되 장지만은 남원 서산으로 하겠다고 주장하였다. 뜻밖의 일이라 노조와 재야는 시간을 두고 가족을 설득해 보기로 하고 우선 노조와 재야 간의 의견이라도 통일해 보자고 논의를 계속하다가 결론을 못 내고 오후 6시경 결정을 노조에게 맡기고 산회하였고, 곧이어 노조는 장지를 광주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o 24일 오후 이 연석회의에서는 재야와 노조와의 의견이 맞서서 논의가 길어진 것이 아니다. 양 신부, 강 신부는 광주 쪽, 이 변호사와 현지 유지 황 선생은 서울 쪽으로 의견이 갈리어 시간이 더 길어지는 바람에 마치 재야가 노조를 집요하게 설득한 것처럼 보도를 할 수 있는 빌미를 준 셈이었다.
o 그 후 유족들은 노조 쪽에서 설득해 보기로 하여 우리는 관여하지 않았으나 25일 오후 5시 가족들이 기자회견을 한다는 말이 나돌자 이 변호사와 이소선 어머니 등이 마지막으로 가족을 설득하러 나섰고, 내가 유족 대기실로 갈 때는 막 이야기를 끝내고 나오는 참이었다. 나도 선 자리에서 이석규는 우리 국민 모두의 아들일 수도 있으니 전 국민과 전체 노동자의 가슴에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선처를 바란다는 부탁을 덧붙였다. 이 자리에서 이 변호사는 분명히 최종적인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유족에게 있다는 말을 거듭하였다.
o 결국 장지 문제가 문제된 것은 유족들이 이미 합의를 한 사항을 뒤에 번복하였기 때문에 재야와 노조가 아쉬움을 가지고 유족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계속한 것을 언론이 재야 개입의 방향으로 몰아붙였기 때문이지 결코 재야가 지나치게 개입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재야가 집요하게 설득하려 하였다 하여 그것이 장[례]식 방해가 된다는 것은 억지도 너무 억지다.
o 그 후 실제 장례일인 28일의 사건은 현지에 있지 않아서 잘 알 수 없으나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분위기가 재야에서 그들을 진정시키려 한다 하여 진정이 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리라 짐작된다.
- 장지가 서울 모란공원 묘지가 좋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o 첫째, 장지 자체의 역사적 의미 때문이다. 누구나 국립묘지에 묻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다. 설혹 국립묘지에 묻힐 만한 사람을 유족이 잘 모르고 거절할 경우 유족을 설득하려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모란공원 묘원은 전태일 열사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그가 분신으로 목숨을 끊을 당시만 해도 그가 노동운동의 역사에 남을 인물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고 이석규 열사의 죽음 또한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길 것이다. 아니 남겨야 할 일이다. 그런 그를 서울 모란공원 묘지에 묻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서울을 권한 것이다.
o 둘째, 그의 죽음은 이 독재권력이 그 권력 유지를 위하여 경찰을 이성적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폭력 살인집단으로 만들어 놓은 데서 비롯된 대국민 살육행위의 결과로 빚어진 억울한 희생이다. 그럼에도 살육의 진상을 은폐하고 노동자의 격렬한 투쟁과정 속에서 빚어진 불가피한 사태 또는 자업자득의 결과로 몰아붙이려는 정부의 태도였다. 따라서 우리는 전 국민의 관심을 이 장례로 모으고 진상을 폭로하여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이 이 같은 불행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그렇게 하는 데는 장지가 서울로 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장지가 서울로 되면 이를 이용한 폭력 소요사태를 일으켜 현 정권을 붕괴시키자는 의도는 없었는가.o 국민운동본부 하반기 목표는 선거 혁명이다. 이한열 군 장례식에 그같이 많은 사람이 모였으나 정권을 위협할 만한 소요는 없었다. 그 같은 방법으로 정권을 전복하고 내가 얻으려는 것이 있겠는가. 오로지 정당한 비판마저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자기들의 권력을 연장해 보려는 정권의 모함일 뿐이다.
- 전 국민에게 폭로하고 규탄하려 한 정부의 비리는 무엇이었는가.(이석규 사망의 진상)o 22일 오후 2시경 600~7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옥포관광호텔로 가려고 했다. 사장 이하 임원진의 직접 면담을 요구하기 위해서이다. 경찰은 네거리에서 노동자들이 네거리로 진입하는 도로를 제외한 3방향의 도로를 모두 차단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네거리에 이르자 노동자들은 평화적 행진과 평화적 연좌를 할 테니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했다. 경찰은 길에 있는 돌멩이와 각목 등을 모두 청소하고 오리걸음으로 걸어가면 길을 열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노동자들은 그 약속을 믿고 길을 치우고 어깨동무를 하고 열을 지어 오리걸음으로 나아갔다. 경찰은 진입로를 열어주었다. 진입로를 열면서 체포조들은 길 양쪽가로 늘어섰다. 노동자들이 전진하여 후미가 네거리를 지나 호텔 쪽 진입로에 완전히 들어섰을 무렵에는 앞쪽과 길 양쪽으로 경찰이 포위한 꼴이 되었다. 더욱이 진입로 양쪽은 네 발로 기지 않으면 기어오를 수 없는 높이 5m 정도의 언덕이었고 그 위에는 높이 2m 정도의 철망 울타리가 처져 있어 도망갈 곳이 없는 상태였다.
o 이 상태에서 경찰은 수류탄과 총류탄을 마구 터뜨렸다. 네거리 양쪽을 차단하고 있던 경찰들도 총류탄을 발사하였다. 양 사방에서 포위 공격한 것이었다. 다급해진 노동자 일부는 언덕을 기어올라 철망을 뛰어넘어 도망간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네거리 뒤로 도망가면서 경찰에게 붙들려 무수히 맞았다고 한다. 고 이석규는 앞에서 세 번째 대열에 있었다.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맞았는지를 정확히 본 사람은 만나보지 못하였으나 신문 보도에 의하면 경찰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한 후 도망을 가다가 쓰러지면서 직격탄을 맞았다는 것이다.
o 이와 같이 당시 경찰은 진압이나 해산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퇴로가 없는 곳으로 유인한 다음 무차별 폭행과 최루탄 공격을 감행하였다. 최루탄 파편이 사람의 두개골을 뚫고 나갈 정도의 위력이 있는 살상무기임은 이미 밝혀져 있었다. 이 같은 살상무기를 부득이 하지도 않은 상황, 아니 오히려 고의로 유인하여 사용하였음은 고의의 살상이 아닐 수 없었다.
o 24일 오전 부검 결과 파편 4개가 오른 쩍 가슴을 뚫고 들어가 2개는 폐에 박히고 2개는 폐를 관통하여 등에 박혀 있었다. 가슴에는 900cc의 피가 고여 있었다. 어찌 온 국민이 분노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노사분규 수습, “장례 무기 연기 선언이 협상 타결 계기”- 6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장례를 무기 연기하게 된 과정은 어떤 것이었는가?o 이 변호사와 본인 등 소위 재야 쪽 사람들은 24일 14시경 이 문제를 장지문제와 함께 의논하였다. 요구조건의 주장은 일치된 의견이었으나 이들 장례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자는 주장을 내가 강력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유로는,
o 첫째, 유족 보상의 문제가 장례 후에는 해결이 어렵다. 책임소재를 밝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은 소송을 해본 사람이면 쉽게 알 것이다. 그럼에도 23일 저녁 유족과의 회의 시에 유족에게는 변호사들이 쉽게 해결해 줄 것인 양 어물쩍 넘어가 버렸는데, 그 이후 어느 쪽에서도 피해 보상에 관하여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o 둘째, 당연히 있어야 할 정부의 해명이나 사과의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당장 해결은 안 된다 할지라도 일단 문제의 제기는 있어야 한다. 책임자 문책, 가해자 구속 등은 약속으로도 가능한 문제이므로 장례를 무기한 교착시킬 우려는 없는 조건이다.
o 셋째, 대우조선 분규는 신속히 타결되어야 하고 그것은 장례와 연계 짓는 것이 가장 신속한 타결방법이라 믿었다. 또 분규가 타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장례식이 어떤 사태로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o 그러나 셋째 번 문제는 내심 고려된 문제일 뿐 우리끼리의 논의과정에서는 거론하지 않았다. 노조에 맡기자는 뜻이었다.
o 우리는 이 뜻을 노조에 권유하기로 하였고 24일 저녁 노조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 장례의 무기 연기는 노사분규를 결국 악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는가.o 결국 상황을 분석하는 시각의 차이다. 우리는 분규의 수습을 원했다. 노사문제에 대한 입장 자체가 그렇거니와 그 입장이 어떻든 간에 대우사태 그 자체는 수습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입장이 매우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결국 수습이 되고도 이 꼴이 되고 말았지만).
o 원만한 수습을 위해서는 결국 어느 일방이 양보하거나 쌍방이 양보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가 양보하려면 노동자들 내부의 논의구조가 통일되어 있고 질서가 잡혀 있어야 한다. 그런데 24일까지 대우조선 노동자의 상태는 그것이 아니었다. 당초 8월 8일 농성이 시작된 이래 본시 노조가 없던 상태에서 노조를 설립하는 데 4일을 소비했다. 그동안 노조설립신고서를 회사에 갖다 내는 등 무지에서부터 어용 시비와 내분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그 이후 현재 집행부가 들어섰으나 그들의 협상결과는 이미 한 번 거부당한 경험이 있을 만큼 지도력이 취약하였다.
o 이러한 상태에서 이석규의 사망으로 노동자들은 격앙되어 있었다. 잘못 양보를 말하다가는 지도부 또한 어용으로 몰려 또 한 번의 폭력사태가 날지도 모르는 상태였다(25일 이후 질서가 잡히고 집행부의 지도력도 확립되어 갔는데, 나는 우리와 청년활동가들의 영향이 컸다고 믿는다). 이러한 상태에서 양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우중뿐이라 믿었다. 김우중을 양보하게 하는 강한 포석, 그것이 사태를 신속히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이 점에 관하여 양 신부나 민주당 현지 의원 및 조사단과 상황판단을 달리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대우 분규의 극적타결은 장례 무기 연기 선언에서 그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o 본시 내가 생각한 순서는 보상금 조건 무기 연기 → 김우중의 선심 → 노동자들의 감정완화 → 노사타결로 이어질 것으로 구상했는데, 김우중의 선심이 유족들과 비밀채널로 연결되면서 장지 문제의 갈등으로 전환된 것은 아닌지.
- 이 변호사와 노 변호사의 행동은 시종 일치하였는가.o 나는 23일 10시경 도착하였고, 이 변호사는 23일 17시경 도착하였다. 그동안 장례위원회의 구성은 이미 논의가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이 변호사는 장례위원회 구성에 관하여는 관여하지 않았다.
o 그 이후에는 계속 의논하고 함께 했다. 다만 나는 26일 오전에 병원에서 나온 후 이 변호사와 점심을 같이 먹고 낮잠을 조금 잔 후 16시경 이 변호사는 병원으로 도로 가고 나는 조금 더 있다가 부산에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고 18시30분 배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 이후 일은 모른다.
o 내가 있는 동안 모든 논의는 그와 함께 했다. 그래서 그에게 책임질 일이 내게 책임이 없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한 일은 모두 옳았기 때문에 함께 끼이고 싶다. 다만, 24일 15시30분 이후 노조와 장지문제 논의 시 나는 김봉조 의원의 구속자 석방 교섭에 따라 갔다 왔고 그날 저녁 20시경 장례 무기 연기 논의에는 노조 사무장의 태도가 못마땅하여 논의에 불참했다.
o 25일 16시경 이 변호사가 유족을 만나 장지 문제를 설득할 때는 나는 뒤늦게 가보니 얘기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라 선걸음에 한 마디 보태고 나왔다. 이 부분은 왜곡된 사실을 밝히려는 것일 뿐이고, 오히려 결정적인 시간에 내가 빠진 것, 특히 24일 저녁의 장례 무기 연기 결정시 내가 일찍 포기한 것은 두고두고 나를 부끄럽게 했던 일이다. 결국 분규 타결의 계기는 이 변호사가 만든 것이다. 하루하루 서로 오늘은 돌아가야 된다고 말하면서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성실히 대처했다. 그때 내가 그에 대하여 느끼던 심정, 그런 것을 동지애라 하는 것 아닌가?
- 이 변호사나 노 변호사가 분규 수습을 원하였다는 말을 믿을 만한 보다 설득력 있는 근거는(언론과 정부가 하도 몰아붙이니까).o 내 개인적 인식은 6·29 이후 처음 부산에서 노사분규가 터져 나왔을 때 나는 우리 젊은이들을 만날 때마다 작은 요구조건으로 작은 승리를 만들고 그에 터 잡아 노조 설립 확대, 노조 민주화의 작업으로 장기적으로 노조 활성화로 노동자 권익 신장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야지 어떤 이유로든 수습이 잘 되지 않는 극한 대립이나 장기적 분규는 결국 노동자들에게 또 한 번의 참패를 안겨다 줄 것이라 우려하는 뜻을 밝혀왔다. 심지어 내가 나서서 노동자들을 한 번 설득해 보면 어떨까 하고 의견을 개진한 바도 있다(국가기관 쪽에게).
o 우리가 가있는 동안 분규의 확대, 악화가 가져다 줄 우리에 대한 비난이나 법적 결과에 대하여 우리가 왜 모르겠는가. 수습되고 난 후에도 생사람 잡는 판국에.
o 부검 참여는 노동자들의 요청이기도 하지만 부검결과 발표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것이다. 악화를 원하는 사람이 이런 일에는 왜 끼겠는가?
o 25일 저녁 양 신부가 최종적으로 노동자들과 담판할 때 이 변호사와 나도 함께 노동자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합석하였다. 그 직전 이 변호사는 양 신부에게 기본급과 현장수당을 15,000원 : 15,000원 방식도 권해보자는 등 구체적으로 성의를 보였다. 다음날 김봉조 의원이 협상을 하고 있을 때도 김 의원을 찾아가 같은 취지의 제언을 하기도 했다.
언론의 왜곡보도 “억울한 죽음에 안타까움도 없었다”- 언론의 보도에 관하여.o 언론보도에 관하여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는 자질의 문제요, 둘째는 왜곡의 문제이다.
o 자질 문제를 먼저 보자. 노사분규 현장에는 그 분규의 원인이 제일 첫째의 문제이다. 그 다음은 분규 장기화의 원인, 과격화의 원인, 사망의 원인 등이 심층분석 되어야 하고, 장차 원만한 수습을 위하여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언론은 어느 것을 했는가?
o 분규의 원인은 임금, 노동조건, 기타 불만이다. 저임금, 대량해고, 인사 감시, 엄한 처벌, 관리 부실, 비인간적 대우 등 심각한 문제들이 얼마나 소상히 보도되었는가.
o 분규의 장기화, 과격화의 원인이 어디 있었는가에 관하여 성의 있는 취재도 보도도 보지 못하였다.
o 원만한 수습을 위하여 누가 얼마만한 양보를 해야 합리적일 것인가. 이 점에 관하여는 잘 분석해 보면 양보를 할 수 있는 쪽, 양보를 해야 할 쪽을 잘 선별하여 언론이 압력을 행사하고, 정부와 국민의 압력을 적절히 동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나친 시도라면 적어도 공정한 보도라도 했어야 한다. 예컨대 조선소 적자의 원인을 분석해 보면 상당 부분 대우실업 내부로 유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위장적자 문제, 적자 전체가 모두 금융비용인 점, 경영과 관리의 불합리에서 오는 낭비 등이 있는데, 적자 상태를 보도할 때는 이러한 요인도 함께 취재 보도해야 할 것인데, 취재도 보도도 못 보았다. 자질을 의심 않을 수 없다. 어떤 경우는 그런 것을 노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정리하여 주어도 보도하지 않았다. 그것도 밤 3시에 잠을 깨워가며 받아가 놓고는.
o 왜곡보도. 구체적으로 어느 사실의 문제도 그렇거니와 자구 하나씩만 슬쩍슬쩍 끼워 넣어서 전체 분위기의 흐름을 왜곡된 방향으로 몰아가는 데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o 24일 저녁. 장례 무기 연기 발표가 있자 25일부터 각 신문사 데스크에서 취재방향에 관한 지시가 내려 왔다고 했다. 심지어는 그 문제로 기자가 전화통으로 데스크와 싸우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o 25일 저녁. KBS의 보도는 왜곡의 극치였다. 대우사건 보도에 갑자기 민민투의 주장까지 갖다 붙였다. 억울하게 사람 죽은 데 대한 안타까움도, 분노도 전혀 표시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