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27일 낮 11시 30분 범일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마친 뒤, 노무현 변호사는 고 이태춘 열사의 영정을 들고 행진했습니다. 문재인 변호사도 함께 했습니다. 두 명의 인권변호사는 그렇게 6월 민주항쟁의 한가운데에서 서 있었습니다.
87년 6월 27일 11시 30분 범일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마친 후 노무현 변호사가 이태춘 열사 영정을 들고 장례행렬 앞에서 행진하고 있다. 그 옆이 문재인 변호사. |
1987년 6월 전국 곳곳에서 민주화의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민주항쟁 중이던 6월 18일 좌천동 시위는 부산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서면 시위대가 범일 고가대로에서 경찰의 저지선에 막히자 시위대는 촛불을, 경찰 진압대는 최루탄과 곤봉으로 맞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태춘 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온몸에 뒤집어 쓴채 범일 고가대로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이태춘 씨는 봉생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으나 엿새 만에 사망했습니다. 경찰의 무력진압에 그렇게 한 시민이 사망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땀과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태춘 씨의 사망을 세상에 알리는데 앞장 선 사람이 노무현입니다. 그해 6월 27일 치러진 장례미사에서 고 이태춘 열사의 영정을 든 노무현 변호사와 문재인 변호사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 이번에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의 사료수집 과정에서 발굴됐습니다.
사람들은 1987년 6월 내내 부산의 거리에서 보냈던 노무현을 ‘부산 6월민주항쟁의 야전사령관’이라는 별칭을 붙여주었습니다. 거리에서 대학생, 노동자 등 시민들과 함께 불렀던 민중가요 <어머니>는 노무현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사람사는 세상’이란 평생 꿈이 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6·10민주항쟁은 거리의 역사였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열망은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든 승리의 역사였습니다. 시민들이 일궈낸 값진 승리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 6·10민주항쟁은 절반의 승리였습니다. 2007년 6·10민주항쟁 20주년 기념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날의 기득권 세력과 이에 결탁한 수구언론이, 군사독재의 잔재세력이, 분열과 기회주의가 6월 민주항쟁의 승리를 절반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87년의 패배, 90년 3당 합당은 우리 민주세력에게 참으로 뼈아픈 상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역주의와 기회주의 때문에 우리는 정권교체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수구세력이 다시 일어날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상실은 군사독재와 결탁했던 수구언론이 오늘 그들 세력을 대변하는 막강한 권력으로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한 것입니다. 분열과 기회주의가 6월 항쟁의 승리를 절반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국민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머지 절반의 승리를 완수해야 할 역사의 부채를 아직 벗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의 부채를 벗어나는 길은 ‘주권자의 참여’라고 믿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라 믿었습니다. ‘국민 주권 시대’를 꿈꿨습니다. 국민주권 시대야 말로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힘이요. 참다운 ‘사람사는 세상’이라 생각했습니다.
25년 전 거리에서 하나가 되어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졌던 것처럼 우리가 누리는 또, 앞으로 누려야 할 민주주의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렸던 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이었습니다.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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