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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 1990년 1월 30일, 통일민주당 3당합당 결의 전당대회장에서 정치인 노무현의 외침입니다. 정치지도자들이 밀실에서 야합한 3당합당에 정치인 노무현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진전시키라는 국민과의 약속과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3당합당으로 이 땅에는 기회주의와 지역분열 정치가 심화되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하는 내내 매달린 극복 과제였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

90년 3당합당과 노무현의 정도정치


재야 입당파로 88년 국회에 입성한 노무현 대통령은 13대 국회 노동위원회와 5공 청문회에서 활약하며 ‘서민의 대변자’, ‘청문회 스타’로 이름을 알렸다. 그럼에도 의정활동은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민권투쟁과 노동운동의 연장선이었다.

국회 첫 대정부질의에서 열다섯 소년노동자 문송면의 수은중독 사망 사건을 따지고,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 방문, 원진레이온 산재사건 진상조사 등을 벌였다. 그러면서 노동운동 민원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보람도 가졌으나, 곧 한계를 깨닫고 무력감에 빠진 시절이기도 했다.

89년 여름, 정치인 노무현은 야당의 소장 의원들과 함께 야권 통합운동에 나선다. 87년 대선 분열로 정권교체 좌절이란 뼈저린 경험과 13대 국회 초반 5공 청문회를 거치면서 국민 여론은 야권통합을 요구하고 있었다. 계기는 89년 8월 치러진 영등포을구 보궐선거였다. 평민당과 민주당, 재야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보궐선거에서 패배하면서 노무현 의원은 같은 당(통일민주당) 김정길 의원, 평민당 이해찬·이상수 의원, 무소속 이철 의원과 함께 ‘정치발전연구회’를 꾸려 야권 통합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 야권 통합운동은 90년 1월 단행된 3당합당으로 유야무야된다. 90년 1월 22일 민정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와 청와대 회동에서 3당 해체와 보수 연합신당 창당을 합의한다. 이어 24일에는 3당에서 5명씩 15명으로 구성된 통합추진위원회가 활동에 들어갔다.

노무현 사료관 :: 사료이야기 :: 90년 3당합당 반대,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
90년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민정당 총재)과 김영삼(통일민주당)ㆍ김종필(신민주공화당) 총재의 3당합당 합의.


여야 3당합당은 보스 정치란 후진적 정치구조 아래 정치 지도자들이 정치적 이득을 노리고 밀실에서 흥정한 야합이었다. 여소야대 정국에 끌려 다니던 노태우 대통령과 87년 대선 패배 후 권토중래를 노리던 김영삼 총재, 정치적 입지를 계속 이어가려던 김종필 총재 간에 내각제 개헌이란 권력 분점을 고리로 이뤄낸 결과였다.

김영삼 총재는 차기 대권을 위해 보수연합을 구상하고 있었고, 정가에서는 연초부터 민주당과 공화당 통합설이 흘러나왔다. 공화당과 통합에 대해 민주당에서는 반발 기류가 형성됐으나, 이는 3당합당 발표 뒤 사그라졌다. 또한, 극비리에 추진 중이던 3당합당에 대해 ‘반대’ 입장을 결의했던 민주당 중진의원들(이기택·김현규·신상우·최형우·황낙주·황명수·김상현)도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씩 돌아섰다.

민정-민주-공화당의 합당 선언이 나오자 평민당은 의원직 총사퇴, 총선 조기 실시, 노태우 대통령 퇴임을 요구하며 반발했다. 하지만, 합당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방식은 3당이 전당대회나 수임기구 의결을 거쳐 새 당명(민주자유당) 아래 합치는 거였다. 그리되면 각 당은 보유재산과 국고보조, 전국구 등의 기득권을 승계할 수 있었다.

합당 선언 다음날인 1월 23일에 통일민주당은 정무회의와 의원총회 합동회의를 열어 청와대 합의를 추인했고, 30일로 합당 결의 전당대회를 소집해 놓았다.

 

35분 만에 ‘야당’에서 ‘여당’으로

90년 1월 30일 오전 9시, 마포 통일민주당사. 3당합당 결의 임시전당대회장은 8백81명의 대의원(총 대의원 수 1천 1백64명)과 당직자들이 모여 발 디딜 틈 없었다. 전날, 합당에 반대한 김상현 부총재와 노무현·김정길 의원, 원외 지구당위원장 2백여 명이 ‘민주당 사수대회’를 열어 합당을 맹비난했기에 전당대회에서 찬반 대의원들 간 충돌이 예고됐다.

오전 7시경부터 찬성파 대의원들이 대회장 앞자리를 선점했고, 예상과 달리 반대파는 수십 명에 불과했다. 경찰 병력과 청년 대의원들의 경비 속에 김영삼 총재가 입장했다. 김동주 의원의 사회로 진행된 전당대회는 김동영 사무총장의 경과보고, 정상구 전당대회의장의 개회사에 이어 연단에 김영삼 총재가 섰다.

김영삼 총재는 “얼마나 고뇌했는지 모른다”고 심경을 토로하고, “집권당 간판을 내리게 만든 것은 구국의 차원에서 내린 위대한 결단”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이어 각본에 따라 황명수 부총재가 의장에게 발언권을 얻어 안을 상정했다.

황명수: “총재의 기적에 가까운 결단을 수용합시다. 여러 절차 거칠 것 없이 정무회의 결정대로 합당을 의결하고, 모든 절차와 권한을 총재에게 위임합시다.”
정상구: “이의 있습니까?”

대의원석에서 노무현 의원과 김상현 부총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노 의원은 오른 팔을 들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외쳤다.

노무현 사료관 :: 사료이야기 :: 90년 3당합당 반대,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
90년 1월 30일, 통일민주당 마포당사 3당합당 결의 전당대회. 노무현ㆍ김상현 의원이 '합당 반대'를 외치며(왼쪽)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오른쪽). [촬영자: 김종구] 


노무현
: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

하지만, 토론 기회를 달라는 반대파의 요구는 묵살됐다. 앞자리 대의원 석에서 “재청” “삼청”이 나오자 의장은 직권으로 “박수로 통과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찬성파 대의원들의 박수가 터졌다. 좌중에서 고함과 야유가 교차되는 가운데 의장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고 발표했다. 날치기였다. 반대파는 “만장일치는 사기다, 무효다”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자 의장은 “거의 만장일치”라고 결과를 정정하고 서둘러 산회를 선포했다. 개회 후 의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5분이었다.

대회가 끝나자 노무현 의원 등은 “찬반토론 절차를 박탈한 의결은 무효”라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노무현·김정길·장석화·김광일 의원 등이 민자당 합류를 거부했다. 노무현 의원은 “민주당을 지키자”며 마지막까지 당원들을 설득했으나 대부분은 김영삼 총재를 쫓아 민자당에 합류했다(합당 결의 전당대회는 1월 30일 민주당을 시작으로 2월 1일 민정당, 5일 공화당에서 각각 열렸고, 9일 수임기구 합동회의에서 합당 공식 의결을 거쳐 15일 선거관리위원회에 민주자유당이 등록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94년 펴낸 자전 에세이에서 당시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90년 1월(은) 무척이나 외로운 겨울이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새롭게 힘을 얻기 시작한 야권 통합운동에 전력을 투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내가, 그 겨울의 어느 날 갑자기 혼란과 고독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바로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대사건, 3당합당 때문이었다. 함께 야권 통합을 외치던 소장 의원들도, ‘공화당과의 통합만은 절대 있을 수 없다’던 중진 의원들도 하나둘씩 내 곁에서 떠나갔다. 그리고 그 모두가 떠나고 없는 빈들에는 나와 또 한 사람, 김정길 의원만이 남았다.” - <여보, 나 좀 도와줘> 46쪽, 94년 출간

장외에서 불붙은 3당합당 규탄13대 총선에서 국민들이 야당 의원에게 표를 준 것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와 개혁을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노무현 의원은 국민과의 약속과 신뢰를 저버리고 하루아침에 군사독재정권과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현실 정치인으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결국 많은 정치인들이 재선, 삼선을 위해 보스를 따라 민자당의 품에 안겼다. 정치인 노무현의 선택기준은 정치적 득실이 아닌 그것이 정도(正道)인가였다. 자신이 세운 원칙과 정치적 신념 앞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3당합당으로 탄생한 거대여당은 정국 주도권을 쥐었다. 인위적 정계개편으로 여대야소 아래 5공 청산과 민주화 추진은 실종됐다. 그리고 김영삼 씨가 이끌던 민주화세력의 한 축과 군사 쿠데타세력이 손잡은 보수대연합이 출현했다.

3당의 합당 결의 후 합류를 거부한 구 민주당 의원들은 재야단체와 연대해 합당을 규탄하는 한편, 평민당 통합파들과 야권 신당을 모색했다. 전국의 대학가에서는 3당합당 반대 시위가 확산됐고, 재야단체는 3당합당 반대 서명운동과 집회를 조직하며 민주연합 전선 구축을 논의했다.

2월 3일 부산대 운동장에는 부산민족민주운동연합 등 11개 재야시민단체가 주최한 ‘3당합당 규탄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에는 학생, 노동자, 시민과 구 민주당원 등 4천여 명이 모였는데, 노무현 의원은 김정길 의원과 함께 연사로 참가했다.

노무현 사료관 :: 사료이야기 :: 90년 3당합당 반대,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
통일민주당 합당 결의 사흘 후인 2월 3일 부산대 운동장에서 부산지역 재야단체들이 주최한
'3당합당 규탄대회'

이어 24일과 25일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전민련)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 등 15개 단체들이 공동으로 ‘반민주 3당야합 분쇄와 민중기본권 쟁취 국민대회’를 열었다. 24일 서울에서는 경찰의 봉쇄 속에 중구 정동 성공회 앞 도로에서 재야인사들이 참가한 약식 행사가 진행됐고, 학생과 시민 수천 명이 대학로와 명동 일대에서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를 외쳤다. 서울뿐 아니라 광주, 마산, 전주, 원주, 순천, 목포, 진주, 군산에서도 국민대회가 열렸다. 다음날인 25일에도 부산, 대구, 인천 등 7개 도시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한편, 구 민주당 잔류 의원들은 ‘선 창당 후 범야권 통합’ 노선을 정하고 신당 창당을 추진했다. 2월 27일, 정통야당의 맥을 잇는 ‘민주당’이란 이름으로 신당 창당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가칭 민주당 발기인으로 이기택·박찬종·이철·김정길·김광일·노무현·장석화 의원과 정동현(부산대)·김인곤(경북대)·정규호(외대) 교수, 안동수·김기천·김탁규·심재필 변호사, 소설가 한수산, 가수 이광준·이주호(해바라기) 등 신진인사들이 참여했다.

민주당 추진인사들은 3월 3일 부산에서 3당합당 규탄 및 지지대회를 가졌다. 구 부산상고 터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87년 대선 부산 유세 이래 가장 많은 10만여 명의 군중이 몰렸다. 노무현·이기택·김광일·박찬종·김정길 의원과 임정남 부민협 의장이 연사로 나서 보수대연합에 맞선 민주당 창당에 힘을 모아줄 것으로 호소했다.

90년 3월 3일 부산 서면 구 부산상고 터 '3당야합 규탄 및 민주당 창당 지지 부산시민대회'. 연단에 이기택ㆍ박찬종ㆍ노무현ㆍ김광일 의원(1열 좌측부터)이 보인다. 의원들은 대회 후 오후 6시경부터 트럭을 타고 범일동 국제호텔 앞까지 1시간가량 가두행진을 벌였다. 


한편, 3당합당에 대한 민심의 향배를 읽을 수 있는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4월 3일 실시됐다. 보궐선거는 광주 학살의 책임을 물어 의원직을 박탈당한 정호용 씨의 지역구인 대구 서갑구와 충북 음성·진천이었다. 대구 서갑구는 한때 정호용 씨가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가 사퇴하여 민자당 문희갑 후보와 민주당 공천을 받은 백승홍 후보가 맞붙었다. 충북 음성·진천에서는 민자당 민태구 후보와 민주당 허탁 후보가 대결했다(평민당은 후보를 내지 못했다). 선거가 폭력과 부정 시비로 얼룩진 가운데 대구에선 민자당 후보가 고전 끝에 가까스로 당선됐고, 충북 음성·진천은 민주당 후보가 승리했다.


4월 21일에는 범민주세력 결집을 추진해 온 전민련 등 재야단체와 전대협이 ‘민자당 일당독재 분쇄와 민중기본권 쟁취 국민연합’(이하 국민연합)을 결성했다. 국민연합은 야당과 연대했는데, 물가 및 주택 등 민생문제 해결 캠페인과 방송노조의 방송민주화 투쟁 지원 등을 전개했다. 국민연합 결성식이 열린 연세대에 노무현 의원도 참석했다.

'민자당 일당독재 분쇄와 민중기본권 쟁취 국민연합'출범식. 국민연합은 야당과 연대해 반(反) 민자당 투쟁을 벌였다. 사진은 90년 4월 21일 연세대에서 열린 국민연합 출범식에 연사로 나선 노무현 의원. 


정통야당 맥을 잇는 ‘작은 민주당’ 창당
한편, 민자당은 내각제 개헌 약속 및 대권 밀약설, 지도체제와 구 민정·민주·공화계 간 자리 배분 등을 놓고 한동안 내홍을 겪다가 5월 9일 첫 전당대회를 열고 창당을 마무리 지었다. 전당대회에서 당 총재 노태우, 대표최고위원 김영삼, 최고위원 김종필·박태준을 선출했다. 민자당 창당으로 여소야대로 출범했던 13대 국회에 전체의석 2/3을 넘는 216석을 확보한 거대여당이 등장했다.

민주당도 6월 15일 이기택 총재를 선출해 창당했다. 이기택·김정길·노무현·장석화·박찬종·이철·김광일·허탁 의원 8명이 소속된 소수정당이었다. 이른바 ‘꼬마 민주당’(노무현 대통령은 ‘작은 민주당’이라 불렀다)의 탄생이었다. 작은 민주당은 창당과 함께 야권 통합의 추진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평민당과 통합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국회의원 70석을 가진 평민당과 작은 민주당 간의 주장이 평행선을 그었다.

6월 18일 한 달 회기로 임시국회가 열렸다. 현안은 지방자치 선거일정 확정과 광주항쟁 보상법, 방송구조 개편, 그리고 이전 국회에서 여당이 변칙 통과시킨 국군조직법 재개정과 국가보안법과 안기부법 개폐였다. 개원 이틀을 앞두고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총재 간 영수회담이 성사됐으나 입장 차만 확인한 채 건진 게 없었다.

거대여당이 된 노태우 정권은 거칠 게 없었다. 다수 의석을 점한 민자당은 힘으로 밀어 붙였다. 대화나 타협은 실종됐다. 임시국회가 열리고 이문옥 감사관이 폭로한 87년 대선 당시 서울시 예산 불법전용을 놓고 여야가 대립하다가 국회는 공전됐다. 이어 새 민영방송 설립과 교육방송 구조개편 등을 골자로 한 여권의 방송법 추진이 최대 쟁점으로 부상했다.

민자당은 회기 내 쟁점 법안 처리를 선언했고, 평민당과 민주당은 이에 반발했다. 결국 7월 7일에는 방송법을 심의하던 국회 문공위에서 여야 간 유혈까지 동반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7월 9일, 서울 명동 YWCA 대강당에서 야당과 국민연합, 언론노련, 기자협회, 방송노조가 공동 주최한 ‘방송법 개악 저지대회’가 열렸다. KBS노조의 정권 낙하산 서기원 사장 퇴임 및 방송민주화 투쟁이 벌어졌던 상황에서 야당과 언론단체들은 “여권의 방송구조 개편이 권력의 방송 장악 음모”라고 반발했다. 이날 대회에는 노무현 의원도 있었다(사진). 대회 참석자들은 방송법 개정안 전면 백지화, KBS 서기원 사장 퇴진과 구속 방송인 석방, 언론 및 노동운동 탄압 중지 등을 촉구했다.

노무현 사료관 :: 사료이야기 :: 90년 3당합당 반대,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
90년 7월 9일 서울 명동 YWCA '방송법 개악 저지대회'. 노무현 의원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과 재야 및 언론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왼쪽 사진은 대회장에서 정대철 의원과 함께. 


의원직 사퇴로 야권통합 불씨 살려
7월 11일과 12일. 민자당이 상임위에서 방송법과 국군조직법 등 쟁점법안들을 변칙 통과시켰다. 이어 본회의에서 강행 처리가 예고됐다.

7월 13일 오전 8시30분, 국회귀빈식당. 민주당 노무현·김정길·이철 의원과 평민당 이해찬 의원이 의원직 사퇴 성명을 발표했다. 국회의원 배지를 떼고 나타난 네 사람의 목소리는 침통했고, 표정에는 울분과 허탈감이 역력했다.

사퇴 성명은 “민자당 출현 이후 국회가 청산과 개혁의 주체에서 수구와 반동의 들러리로 전락했으며, 지금의 국회는 반민주 악법만을 양산하는 통법부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민자당 정권의 횡포에 항거하기 위해 의원직은 사퇴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13대 국회 해산 및 총선 실시를 위한 여야 의원직 총사퇴, 범민주 야권 통합으로 민자당의 영구집권 음모와 내각제 개헌 저지”를 촉구했다.

회견을 끝낸 네 사람은 국회의장실을 방문해 박준규 의장에게 각자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뼈있는 말들이 오고갔다.

노무현 사료관 :: 사료이야기 :: 90년 3당합당 반대,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
90년 7월 13일 국회에서 이철ㆍ김정길ㆍ노무현ㆍ이해찬 의원(왼쪽부터)이 의원직 사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사퇴 선언 의원들이 박준규 의장을 찾아가 사직서를 제출한 뒤 모습. 

이날 회견장에서 나온 사퇴 선언 의원들의 발언이다.

박준규: 개인적으로는 (사퇴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평소 엘리트 정치인이라고 생각해 왔던 분들인데, 너무 감수성이 빠른 것 같습니다. 본회의에 보고는 하겠으나 처리시한이 없는 만큼 의제 상정 여부는 교섭단체들과 상의하겠습니다.
김정길·이철: 사퇴서는 형식 요건상 의장에게 제출하는 것이고 국민들에게 낸 것입니다.
노무현: 사퇴서를 반려한다는 말은 개혁의 사명을 버린 국회에서 들러리나 서달라는 것입니다.
이해찬: 2년 동안은 국회가 뭔가 해볼 만한 장이었으나 이제 더 이상 국회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의원직 사퇴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네 야당 의원의 사퇴서 제출 다음날 민주당은 소속의원 전원 사퇴를 결의했다. 야당 의원들이 사퇴서까지 제출했으나 14일 국회 본회의에선 민자당이 법안들을 날치기 처리했다. 이어 23일엔 야당 의원 전원이 동반 사직서를 제출했다. 민자당은 사퇴서 처리를 유보했고, 야당 없는 국회에서 정국은 표류했다.

야당 의원들의 의원직 사퇴서 제출을 계기로 평민-민주-재야(통추회의) 간 통합 논의가 재개됐다. 그리고 야당은 장외로 나갔다. 평민-민주당, 통추회의, 국민연합은 21일 서울보라매공원에서 50만 명이 모인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었다.

9월 7일 정기국회 개원을 앞두고 사퇴서가 반려됐으나 야당 의원들은 등원을 거부했다. 그 뒤 11월 19일 평민당에 평민당이 등원을 결정했고, 평민당과 민주당 통합 논의는 해를 넘겼다.

90년 3당합당은 기회주의 정치의 결정판이었다. 야당이 하루아침에 여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정적인 군부독재세력과 손을 잡았다. 3당합당으로 이 땅의 정치는 호남을 고립시킨 채 보수 정치세력이 영남을 장악하여 지역주의가 심화됐으며,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역 분열구도가 재생산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를 하는 내내 이 기회주의 정치와 지역주의에 맞서 싸웠다.

 

  • 권영준/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2.07.05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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