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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2000년 8월 7일부터 2001년 3월 26일까지 8개월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통령이 되기 전 국무위원으로서 국가 행정을 경험한 시간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해양수산부 장관 재임시절 활동과 일지입니다.

민주적 리더십으로 공무원 사회 바꾸다

국민의 정부 해양수산부 장관 재임

 


2000년 4·13총선에서 지역주의에 낙선한 노무현 의원은 ‘소신 있는 정치인’ 이미지로 국민의 마음을 얻어 인기가 치솟았다. 총선이 끝나고 석 달여 뒤인 8월 7일 국민의 정부 개각이 단행됐다. 여권 내 차기 주자 중 한 명으로 부상한 정치인 노무현도 행자부·노동부·통일부 장관의 하마평에 오르내리다가 해양수산부 장관에 낙점됐다. 당시 언론들은 입각 배경을 놓고 해양수산부가 부산 경남 지역의 관심 부처란 점에서 지역적 배려란 분석을 내놓았다.

그즈음 해양수산부는 지방으로 이전이 거론되고 있었다. 부산에서는 지역출신 정치인이 장관에 임명되자 부산 이전을 기대했다. 부산지역 한나라당 의원들과 시민단체들까지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타당성이 없었다. 청와대와 정부부처들이 서울에 ‘전부’ 모여 있어 업무 효율도 떨어지고 이전에 따른 실익이 없었다. 인기에 영합해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노무현 장관은 부산 시민들과 수차례 토론을 거쳐 이전 논의를 백지화시켰다. 인천 해양경찰청사가 비좁고 낡아 대전으로 옮기려던 계획도 직원들의 의견을 다시 수렴해 송도 신도시에 신축을 확정했다.

장관에 대한 특별 대접 중단장관직은 정치인 노무현에게 공무원 조직을 경험하며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였다. 공무원들은 정치인 출신 장관이 임명되자 부처에 새 바람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런 한편 장관직이 경력 쌓기용 정거장이 되지 않겠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도 있었다.

장관 취임 당시 해양수산부는 조직 축소로 침체 분위기였다. 노 장관은 취임 메시지에서 해양수산부의 비전을 강조하며, “앞으로 야당 의원처럼 꼬치꼬치 캐묻고 든든한 바람막이가 될 테니 소신을 갖고 일해 달라”고 주문했다.

“많은 일을 하고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러분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해양수산부는 현재보다 미래가 있는 부처입니다. 우리 어깨 위에 한국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감히 다시 한 번 저와 함께 노력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쏟아지는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일하십시오. 자신 있게 일하십시오. 일을 추진하다 생긴 실수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모든 책임은 여러분이 져야 할 것입니다. 진실을 이야기하십시오. 반대의견이 있으면 직을 걸고 반대하십시오. 현장에 가서 보고 판단하십시오. 이제부터 여러분과 저는 한 팀입니다”
- 2000년 8월 7일, 해양수산부 장관 취임사

 
1. 2000년 8월 7일 서울 서대문 충정로 해양수산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장관 취임식
2. 장관 취임 직후 8월 12일과 13일 이틀간 부산을 찾아 부산공동어시장 등을 방문했다. 


여러 변화들이 뒤따랐다. 장관이 장관실에 앉아 실·국장으로부터 의례적인 업무보고를 받는 대신 실국을 찾아 담당 사무관들과도 의견을 나누며 업무를 파악했다. 장관 집무실의 문턱을 낮추고 간부에서 말단 직원까지 이메일로 소통했다.

장관에게 주어지는 특별 대접도 없앴다. 장관 출근시간에 맞춰 현관에 수위장과 비서진이 대기하고 있다가 관용차가 도착하면 수위장이 거수경례를 하고 차 문을 열어주던 의식(?)을 중단시켰다. 또한 지방 출장에서 지역공관장이 좋은 차를 빌려 마중 나오던 관행도 못하게 했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공무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노무현 장관은 직원들과 인사할 때도 고개를 90도로 숙이는 등 권위를 내세우는 장관들과 달랐다”며, “현안이 있으면 장관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는 등 열정을 보여 주었다”고 말한다. 일례로 부처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노 장관이 재경부 담당 과장을 직접 찾아가 예산안을 설명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노무현 장관의 평소 지론은 “스스로 낮추는 데서 권위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장관 스스로 직원들과 관계를 상-하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지향했고, 이런 ‘탈권위’는 나중에 대통령이 돼서도 계속됐다.


2000년 10월 8일 KBS-1TV '체험 삶의 현장' 촬영. 유명 인사들이 노동 현장을 체험하고 받은 수고비를 불우이웃에게 기부하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노무현 장관은 부산 남항 수중침적 폐기물 정화사업장에서 바다 청소를 체험했다.

2000년 10월 31일 국회 농림해양수산위 해양수산부 국정감사


당시 장관직 수행 경험을 정리한 책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2002년 10월 발간)에 나와 있듯, 노무현 장관은 공무원들을 신뢰했다. “의심 많은 리더는 조직을 제대로 이끌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직원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해 자율성을 갖고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논란이 있고 장관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담당자의 소신이 확고하면 그 의견을 존중했다.

‘책임은 장관이’ … 복지부동은 없다공무원 사회는 외부 평가에 민감하다. 정책을 결정하거나 집행하는 데 있어 국회에서 잘못을 지적받기도 있고, 언론의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장관이 국무회의나 국정감사에서 질책당하면 담당 실국장과 과장들은 초비상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늘 일 처리에서 책임 소재에 신경을 쓴다. 윗사람이 책임질 일을 미루면 아랫사람은 ‘복지부동’하게 된다. 

부산 신항만 민자개발 사업이 좋은 사례였다. 사업시행자(부산신항만주식회사)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사업에 착수하지 못하다가 노 장관 취임 즈음 사업자에게 적정 수익률 보장을 위한 정부 지원금 제공이 협상되고 있었다. 애초 협상에서 가이드라인으로 수익률 2% 보장이 정해졌는데, 수익률 규모를 놓고 정부와 사업자 간에 줄다리기를 했다. 사업자는 정부가 정한 수익률에서 0.3% 인상을 요구했으나, 공무원들은 규정을 어기면서 사업자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검토 결과 협상 결렬 시 사업 지연에 따른 더 큰 경제적 손실이 예상됐다. “장관이 책임지겠으니 소신대로 협상해서 매듭지으라”는 결정을 내려주자 일은 일사천리로 풀려갔고, 사업은 2000년 12월에 기공식을 가질 수 있었다.

1. 2000년 12월 20일 경남 진해시 안골동 부산신항만 민자사업 기공식 축사
2. 2001년 3월 14일 포항지방해양수산청 순시 


결정권자가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관련 업무에 정통해야 한다. 노무현 장관은 현안이 생기면 담당자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리적 대안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소신 있고 논리를 갖춘 공무원들은 “당시엔 정말 일할 맛났다”고 기억한다. 노 장관은 부처 사무관이나 과장들에게도 일방적인 지시보다 서로 설득되고 이해될 때까지 계속 의견을 나눈다. 장관 재임 시 불거진 중국산 냉동 납꽃게 사건, 수협 부실과 정상화, 불법 저인망 어업 등 골칫거리 현안들도 이런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아나갔다.

신뢰·책임·공정, 국정운영 원칙들장관 취임 후 얼마 있다가 시중에 유통된 중국산 냉동 꽃게에서 납덩이가 발견되어 나라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언론은 ‘구멍 뚫린 검사망’이라고 비판하며 담당자 문책과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하지만, 노 장관이 판단하기에 문책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납꽃게는 전례도 없었고, 수입수산물에 대한 전량검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국민건강 안전대책이었다. 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수산물검사소뿐 아니라 부처 일반 직원들까지 동원해 중국산 꽃게 전량에 대한 금속탐지 검사를 단행했다. 이어 중국과 수산물 검사협정을 맺어 사전 예방 검사시스템을 구축해 사태를 수습했다.

수협 부실 해결과 정상화 문제도 장관이 풀었다. 당시 수협은 IMF 이후 다른 시중은행들처럼 공적자금 투입이 시급했다. 재정경제부는 공적자금 투입 조건으로 “수협의 신용사업 분리”를 주장했고, 해양수산부는 “분리는 안 된다”는 거였다. 재경부는 공적자금 투입에 따른 자구노력과 이후 수협중앙회의 부실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고, 해수부는 수협에서 신용사업을 분리시키면 대외신용도 하락과 예금인출 사태, 일선조합의 붕괴를 걱정하고 있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장관이 나서 재경부 담당자를 설득한 끝에 “수협 신용사업을 독립법인으로 분리하지 않되 독자적 운영체제를 만들겠다”는 방안을 도출해 1조 2천억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시켰다.

한편, 불법 저인망 어업은 해묵은 과제였다. 8톤 이하 동력선으로 해저면 부근에서 저인망을 사용해 조업하는 ‘소형기선 저인망 어업’은 어업자원의 씨를 말리는 폐해 때문에 법적으로도 규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 단속에 대해 어민들이 강하게 저항하면서 효과가 없었다. 어민들 스스로가 남획을 자제하고 어자원을 관리하겠다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했다. 장관이 전국을 다니며 어민들을 만나 대화를 통해 ‘자율관리형 어업’을 유도해 나갔다.

노무현 장관은 2001년 3월 26일 퇴임했다. 8개월여의 장관 재임기간 동안 정치를 하면서 가졌던 원칙들을 정부 운영에 적용해 본 시간이었다. 이때 참여정부의 국정운영 원칙이 된  ‘신뢰와 책임’, ‘공정과 투명’, ‘분권과 자율’, ‘대화와 타협’ 등이 다듬어졌다. 그렇게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이 준비되고 있었다.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 재임 일지 

2000년

- 8월 7일 해양수산부 장관 취임
- 8월 8일 해양수산부 출범 4주년 기념식
- 8월 11일~12일 부산 신항만·부산항 여객터미널·부산공동어시장·부산지방해양수산청·부산해양경찰청 순시
- 8월 14일 해양수산부 소속기관장 회의
- 8월 16일 수협 경영 정상화 위한 전문가 초청 간담회
- 8월 23일 인천지방해양수산청 순시
- 8월 27일 인천해양경찰청 순시(수입 수산물 실태 점검 차 인천SK 냉동창고 방문)
- 9월 4일 수협중앙회 신용사업 운영방안 토론회
- 9월 7일 직원들과의 대화
- 9월 18일 중국산 냉동 납꽃게 관련 천롄쩡(陳連增) 중국 국가해양국 부국장 면담
- 9월 21일 여수지방해양수산청·광양항만 순시
- 9월 22일 드 브리스 주한 네덜란드 대사 면담
- 9월 25일 토롤프 로 주한 노르웨이 대사 면담
- 9월 28일 역대 장차관 초청 간담회
- 10월 5일 부산 국립수산진흥원 순시
- 10월 8일 KBS 1TV ‘체험 삶의 현장’ 부산 남항 바다 청소 체험 촬영
- 10월 11일 국제증권회장요시다카 마츠다니 면담
- 10월 11일 어업인 후계자 대표 간담회
- 10월 18일 해운·항만·수산업 단체 공동주관 해양수산 경제간담회
- 10월 31일 국회 농림해양수산위 국정감사
- 11월 1일 테라다 테루스케 주한 일본대사 면담
- 11월 3일 일본 농림수산대신 면담
- 11월 10일 한국해양연구소 체육대회 참석
- 12월 9일 목포 신외항 민간투자사업 실시 협약 서명식
- 12월 13일 부산 감천항 수산시장 방문
- 12월 14일 부산 신항 민간투자사업 실시 협약 서명식
- 12월 14~15일 목포 신외항 착공 및 진입도록 준공식 / 목포지방해양수산청 등 순시
- 12월 18일 폰 모르 주한 독일대사 면담
- 12월 20일 진해 부산신항만 민자사업 기공식 / 부산 어업지도선 관리사무소 순시 

2001년

- 1월 3일 해양수산부 신년 인사회
- 1월 12일 해양수산부 소속기관장 회의
- 1월 17일 노량진수산시장 설 물가 점검 
- 1월 30일 토롤프 로 주한 노르웨이 대사 면담
- 2월 2일 전국 수산관계자 회의
- 2월 8일 해양수산부, 대통령에게 업무보고
- 3월 7일 군산지방해양수산청·군산해양경찰청청 순시(자율관리형 어업 실시방안 설명회)
- 3월 14일 포항지방해양수산청·포항해양경찰청 순시
- 3월 16일 국립수산진흥원 강원 양양 내수면연구소 연어 치어 방류 행사
- 3월 17일 울산지방해양수산청·울산해양경찰청청 순시(자율관리형 어업 실시방안 설명회)
- 3월 21일 제주지방해양수산청·제주해양경찰청청 순시
                (제주대 해양과학대학 두뇌한국21사업단 초청 ‘21세기 해양수산정책의 방향’ 강연)
- 3월 26일 해양수산부 장관 이임 

* 해양수산부는 1996년 8월 8일 정부부처 해양 업무의 일원화 목적 아래 발족했고, 2008년 2월 그 기능이 농수산식품부와 국토해양부로 다시 분산, 해체됐다.

 

  • 권영준/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2.11.12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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