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제헌의회 때입니다. 하지만, 이승만 독재정권은 지방자치를 정권의 편의에 따라 파행적으로 운영했습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잠깐 동안 지방자치가 실시됐으나,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61년 지방의회를 해산하고 자치단체장 선출을 임명제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 후 긴 시간 동면에 들어간 이 땅의 지방자치는 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 요구가 높아지면서 91년 지방의회 선거와 95년 6·27 첫 전국 동시 지방자치 선거를 통해 온전히 부활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원외 정치인 시절인 93년 8월에 다가올 지방화 시대를 준비하면서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었습니다. 당시 연구소 설립에 관계했던 사람들은 “노 대통령이 지방자치가 분권과 자율을 토대로 시민이 주인되는 공동체를 살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1993년 9월 18일, 노무현 민주당 최고위원은 ‘참여시대를 여는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었다. 사진은 연구소 창립총회와 연구소 관계자들(오른쪽 두 번째는 김병준 교수)과 환담을 나누는 노무현 최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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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3월, 민주당은 김대중 총재가 정계 은퇴를 선언한 이후 집단 지도체제를 꾸렸다. 이때 전당대회 한 해 전 재선에 실패한 정치인 노무현도 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당내 계파도 없고 조직도 없는 원외 정치인 노무현 최고위원이 정치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당원들과 접촉할 수 있는 사무실이 필요했고, 마침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어 9월 18일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문을 연다.
“1993년 9월, 연구소를 설립했다. 원외 최고위원으로서 정치 활동을 하려다 보니 사무실이 필요했다. 최고위원 선거를 하면서 지방의원들뿐만 아니라 일반 당원들과도 교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정당 민주화를 하려면 당헌을 연구하고 대의원을 조직해야 했다. 중진 정치인들은 대의원들을 계보로 관리했지만, 나는 돈도 없고, 실세도 아니어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치 발전과 개혁이라는 과제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엮어 보기로 했다. 마침 지방자치와 분권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어서 이것을 중심으로 지방의원들을 조직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향식 공천시대를 대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참여시대를 여는 지방자치실무연구소’라고 이름을 지었다. 연구할 역량이 신통치 않은데 그냥 ‘연구소’라고 하려니 남을 속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굳이 ‘실무’라는 두 글자를 넣었다.” - <운명이다> 130쪽
연구소 이름에 ‘실무’를 넣은 까닭
당시 노무현 최고위원을 보좌했던 서갑원 전 의원은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설립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 (원외) 최고위원이 되셨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떤 공간을 가지고, 어떤 형태로 무엇을 가지고 국민을 상대로 또 정치를 할 것이냐. 중요하잖아요, 뭘 할까? 95년 지방자치 선거가 이제 지방자치를 완성, 즉 자치단체장을 국민들이 선출해서 지방자치제도가 이 대한민국에서 완성되는 해인데 지방자치밖에 더 있냐? 최고의, 앞으로 이, 삼년 사이에 가장 큰 중심 이슈는, 중요한 과제는 지방자치다. 그래서 ‘그래? 그거 해야지 뭐’, 간단해요. ‘그거 해야지 뭐.’ ‘지방자치연구소 만들자’ 그래서 만듭니다. (중략) 우리 연구소는, 우리가 지방자치 의원들 훈련하고 그 다음에 자료 제공해주고 그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 그 사람들이 부족, 혹시나 실무적으로 어려운 것들 우리가 해서 도와주고 서포트 해주고 또 같이 팀 짜서 같이 할 수 있는 것들, 실무적으로 예산분석이나 또 시정, 의정활동 하는데 그런 것들 실무적으로 서포트 해줄 수 있고 또 같이 프로젝트 만들어서 그런 것들 도와주는, 말 그대로 우리는 실무를 지원해주는 연구소다. 그러니 실무라고 그래야지 왜 불분명하게 그걸 뺄라 그러냐. 괜찮다. 좀, 남들이 보기에 좀 그러면 어떠냐. 그 무슨 상관이냐. 명실상부하게 그리 가야지. 결국 보좌진들이 포기해야지 어쩌겠어요.” (서갑원 구술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설립과정' 중에서)
지방자치실무연구소는 당내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조세형 의원을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국민대 김병준 교수를 연구소장으로 영입한다. 노무현 최고위원이 현역 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회원 가입을 권유해 매달 2만 원에서 3만 원 내외의 회비를 걷어 운영자금을 충당했다. 현역 의원들이 참여하고, 지방선거 출마를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95년에는 현직 자치단체장 20명, 광역의원 70명, 기초의원 250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 홍보 팜플릿(왼쪽)과 연구서에서 펴낸 책 |
“시민들의 참여가 민주주의 수준 결정할 것”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설립은 원외 정치인으로서 활동 근거지와 당원과의 원활한 교류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노무현 최고위원의 지방자치에 대한 뚜렷한 소신과 기대의 산물이었다. 당시 정치인 노무현은 지방자치가 시민 참여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킬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민주주의의, 선진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수준 차이는 시민들의 참여의 수준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에 행태로서의 참여, 참여시대, 그것이 민주주의의 과제다. 한국은 소위 자유, 평등의 이념이라든지 자유, 평등, 국민 주권사상이라든지 이념의 시대, 이념은 이미 정립된 것 같고. 제도에 있어서의 구도도 어느 정도 갖추어진 것 같고. 앞으로 남은 과제는 시민적 참여의 수준이다, 참여 운동이 일어나야 된다, 이런 것이 화두가 되어 있을 때인데요. 참여의 제도적 토대로서의 지방자치, 이것을 우리 민주주의의 희망으로 본 것이죠.”
(노무현 대통령 2001년 자전구술 육성 ② ‘풀뿌리 정치인 조직화로 새로운 정치실험’)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초대 소장이자 참여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 정책실장과 교육 부총리를 지낸 김병준 교수의 증언에서도 당시 정치인 노무현의 지방자치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지방자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이야기를 하는 거야. 정치인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통 정치인하면 그냥 피상적인 이야기나 하고 뭐 그런 걸로 알았는데 지방자치 이야기를 하는데 이 양반, 공동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공동체 이야기를. 깜짝 놀랬거든. 지금도 지방자치 하자는 사람들이 보면 공동체 개념이 지방자치에서 왜 중요한지를 잘 몰라요. 근데 뭐라 그러는가 하면 ‘중앙집권체제 가지고는 앞으로 우리 국가 안 됩니다’ 자긴 그렇게 생각한다 이거에요, 대통령이. 그러면서 왜 그러냐 하면 중앙집권체제가 들어있는 바람에 한국의, 한국사회 공동체를 다 붕괴시켜버렸다는 거예요. 국민을 전부 피지배자, 피치자(被治者)로 만들어놨다는 거예요. 내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다닐 때거든(요).”
(김병준 구술, ‘첫 만남과 지방자치실무연구소 활동’ 중에서)
지방자치학교 통해 풀뿌리 정치인들 배출
지방자치실무연구소는 안희정, 이광재, 서갑원, 정윤재 등을 중심으로 10여 명의 연구원이 한 달에 한 차례 이상 세미나를 열고, 각종 정책과 현안을 연구했다. 자치단체장반과 지방의회반 두 개 강좌로 지방자치학교를 운영했고, 전국 주요도시를 돌며 순회학교도 열었다. 이 강좌에는 300명에서 500명씩 모여들었다. 월간 ‘자치시대’(처음 발간 때는 ‘참여사회’)를 발간했고, 지자체 관련 소식을 묶은 팩스통신 ‘자치속보’도 냈다. 독일 에베르트 재단과 미국 델라웨어 주립대학의 지방자치 연구과정으로 연수를 보내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 지방자치실무연구소가 개설한 자치단체장반 강좌(왼쪽) 에베르트 재단과 공동 주최 강좌(오른쪽) |
“지방자치실무연구소는 1995년 6·27 전국 동시 지방자치 선거 때 큰 활약을 했다. 당시 민주당은 심각한 내분으로 완전 마비 상태에 빠져 후보들에게 지방자치 이론이나 선거 실무교육 등 필수 서비스를 전혀 제공하지 못했다. 우리 연구소가 나서서 선거 준비, 선거 전략과 선거운동에 관한 교육을 대신 맡았다. 중앙당 교육연수위원회 수준의 기여를 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제 최고위원 경선을 하면 나도 조직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았다. 계보정치가 아니라 정책 활동을 통해 조직을 만들었다는 자부심도 느꼈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는 이렇게 축적한 역량을 바탕으로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 선거캠프 역할을 제대로 했다.”
- <운명이다>, 133쪽
1995년 6월 27일 열린 첫 전국 동시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활발하게 움직였던 지방자치실무연구소는 노무현 최고위원이 부산시장 선거에서 낙선하면서 잠시 문을 닫았다가 99년 1월 자치경영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자치경영연구원은 2002년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의 캠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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