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노무현 대통령에게 김대중 대통령은 칭찬과 함께 왔습니다. 자전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에서 노 대통령은 당시를 이렇게 술회합니다. ‘청문회가 한창 진행 중일 당시에 우연히 국회 본청의 의원 식당에서 만난 DJ가 나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건넨 말이었다. 항상 멀리서만 보아 왔던 DJ를 처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정황으로 미루어 1988년 12월의 어느 날이었을 겁니다.
나를 보자마자 선뜻 ‘잘했다’는 말과 함께 악수를 청해 온 DJ를 보면서, ‘저 말이 진심일까?’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당시 DJ의 표정은 정말로 후배를 격려하는 어른의 자상한 모습 그대로였었고, 그런 칭찬을 받은 나는 기분이 좋았었다. 어깨가 으쓱했었다.
당선 약 8개월 남짓의 초선의원이 까마득한 정치 선배의 칭찬 앞에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뻐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전부터 노무현 대통령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답은 노무현 대통령의 1988년 7월 10일 연보에 있습니다. 평민당 의원 정책 세미나에 참석한 김대중 당시 총재는 임시국회의 성과와 대정부질의를 평가하면서 ‘노동 문제에 초점을 맞춘 민주당 노무현 의원을 참고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두 대통령은 온라인을 통해 연보를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연보(☞ 바로가기 클릭)에서 ‘노무현’을 입력하면 86건이 검색됩니다. 노무현사료관의 노 대통령 연보(☞ 바로가기 클릭)에서 ‘김대중’을 검색한 결과는 259건입니다. 연보에 나타난 두 사람의 인연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직접적 만남이 처음 등장하는 건 1991년 8월 29일입니다. 신민당과 민주당이 통합을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이후 거듭된 협의 끝에 김대중 당시 신민당 총재가 당 대 당 통합을 수용하면서 민주당이 새로 출범했습니다. 당 대표와 대변인으로서 두 사람의 정치적 동행도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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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민주당 당사 입주 기념 리셉션 | |
부산을 방문한 김대중 민주당 공동대표와 | |
제14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후보 지원유세 | |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물결유세단 | |
영국에 머물던 김대중 전 총재를 만나_캠브리지 대학 교정 | |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사람들 | |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후보 선거운동 | |
제15대 국회의원 종로 보궐선거 공천장 수여 | |
국민의 정부 해양수산부 장관 임명 | |
제16대 대통령 취임식 | |
김대중도서관 개관식 | |
6·15 남북공동선언 4주년 국제학술회의_서울 그랜드 힐튼 호텔 | |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국제학술회의_서울 신라호텔 | |
참여정부 청와대 전직 대통령 오찬 |
이듬해인 1992년, 노무현 대통령은 제14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해 낙선합니다. 3월 30일 연보를 보면 김대중 대통령이 이를 두고 ‘김정길 총무와 노무현 대변인이 지역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한 알의 밀알이 썩듯이 희생된 것이 가슴 아프다‘는 심정을 토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92년은 제14대 대선이 있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당시 청년특위 위원장은 20~30대 유권자를 상대로 김대중 후보 지지 호소에 나섰습니다. 선거 결과는 41%의 지지를 얻은 민자당 김영삼 후보의 당선이었습니다. 패배가 확정되자 김대중 후보는 정계은퇴를 발표하고 1993년 1월 영국으로 출국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해 3월 11일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연소 최고위원에 당선되며 자신의 정치를 계속합니다. 6월에는 영국을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이 다시 당적을 같이 하게 된 건 1997년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에 남아 1995년 부산시장 선거와 1996년 4.11총선에 출마했지만 연달아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개혁을 위한 정권교체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11월 13일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결정이었습니다. 제15대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습니다. 노무현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는 곧바로 김대중 후보의 선거운동에 뛰어듭니다. 12월 3일은 첫 TV찬조 연사로 나섰습니다. ‘정치개혁도 세대교체도 지역감정부터 해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한 이날 연설은 선거 기간 중 여야 후보 찬조 연설원을 통틀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0년, 국민은 김대중과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선택했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승계할 것’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처럼, 참여정부는 생산적 복지, 남북화해와 협력정책, 민주적 시장경제 등 국민의정부가 추구했던 길을 존중하고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선후배 정치인으로, 존경하는 지도자로, 민주주의 동지로 두 사람의 인연도 계속됐습니다. 연보 상 두 대통령의 마지막 만남은 2007년 10월 9일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내외를 청와대로 초청한 오찬 자리였습니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 결과와 앞으로의 추진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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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연보에 김대중 대통령이 등장하는 마지막 대목은 2009년 5월 29일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영결식입니다. 훨체어에 몸을 의지한 김대중 대통령은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오열합니다. 유족의 부탁으로 준비한 김대중 대통령의 추도사는 이날 들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 ‘하지 못한 추도사’의 일부가 김대중 대통령 연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되는 마지막 대목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7주기를 맞아 우리가 바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2009년 07월 03일
6월 27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한 내용이 《오마이뉴스》 오연호(吳連鎬) 대표의 단행본 《노무현(盧武鉉), 마지막 인터뷰》에 추천사로 정리해 실리다. 이 추천사는 정부의 반대로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하지 못한 추도사를 대신한 것이다.
“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노무현 당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 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같이 유쾌하고 용감하고, 그리고 탁월한 식견을 가진 그런 지도자와 한 시대를 같이했던 것을 나는 아주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저승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승이 있다면 거기서도 기어이 만나서 지금까지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동안 부디 저승에서라도 끝까지 국민을 지켜주십시오.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십시오. ”
김대중 대통령 서거7주기 추모 토크쇼
‘김대중 정신,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ㆍ일시: 8월 17일(수) 오후7시-8시30분
ㆍ장소: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컨벤션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