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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 유의미한 주요 사료를 소개하고 그 배경과 맥락을 정리해 제공합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상을 알리기 위해 건네는 명함. 한 개인이 사용했던 명함들을 모아놓으면 그 사람의 역사가 되기도 합니다.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에서는 사료로 수집한 대통령·정치인·법조인 노무현의 명함을 소개합니다. ‘사람사는 세상’ 회원이나 독자분들이 간직하고 계신 노무현 명함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받았는지 등 간단한 사연과 함께 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전화 070-7931-0551,3)에 보내주십시오. 기증하신 명함은 귀중한 사료로 보존될 것입니다. 

명함으로 본 노무현 대통령 발자취

대통령·정치인·법조인 노무현 명함을 찾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대통령의 첫 명함은 고교 졸업 후 1966년 입사한 어망회사 ‘삼해공업’이 아닐까 싶다. 지금이야 누구든 손쉽게 명함을 만들어 갖고 다닌다지만, 1960년대는 인쇄기가 흔치 않은 시절이라 명함 소지가 보편화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단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명함은 오늘날 사회생활에서 자기를 알리거나 또는 비즈니스 목적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명함을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본다. 고대 중국에서는 주인 없는 집을 방문했을 때 이름을 적어두고 나왔다는데, 그것을 명함의 유래로 보기도 한다. 또 역사에는 춘추전국시대에 공자도 명함을 사용했고, 명-청 시대 학자들이 종이나 비단에 이름을 써 명첩(名帖)을 주고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서양에서는 루이 14세 때부터 사교 목적으로 명함이 사용됐고, 우리나라에는 구한말 개화파 지식인들이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오늘날 명함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부류는 기업의 영업사원이나 정치인일 것이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 유권자들에게 돌리는 명함에는 그 시대의 자신의 정치 슬로건이나 약력 등이 상세히 실려 있다.

88년 13대 총선 통일민주당 부산 동구 후보. 명함 1 (원문보기)   명함 2  (원문보기)

명함 1, 2는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대통령께서 사용한 선거용 명함이다. 명함 1의 앞면은 브라운 컬러의 필기체로 ‘노무현’ 이름과 선거구였던 부산 동구를 배경으로 촬영한 정장 차림에 주름 선명한 얼굴로 웃고 있는 40대 초반의 대통령 흑백 인물사진, 선거사무실 전화번호와 위치가 인쇄되어 있다. 뒷면엔 ‘부산의 자부심, 인권변호사 노무현’ 타이틀 아래 87년 6월항쟁 당시 시위에 참여한 바탕 사진과 함께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약력에는 △대전지법 판사(77년)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78년) △부림사건 및 학생 노동 인권 사건 변론(81년 이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85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87~88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공정선거 감시 부산본부장(87년) △노동법률상담소장 등이 적혀 있다. 선거용으로 사용된 또 다른 명함(명함 2)에는 ‘인권변호사 노무현’, ‘6월항쟁의 야전사령관’으로 소개하고 있다.

당시 부산지역에서 인권·노동 변호사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제안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정치 입문 동기는 “국회의원 신분이 되면 노동자들을 돕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선거결과 연고도 없던 부산 동구에서 전두환 정권의 실세였던 민정당 허삼수 후보를 누르고 국회의원이 된다.

88년, 통일민주당 국회의원 노무현13대 국회에 들어간 대통령은 노동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당 노사특위위원장을 맡아 전국의 노사분규 현상을 누빈다. 이때 수많은 노동자들을 만나 건넸을 ‘통일민주당 국회의원 노무현’의 명함은 아직 미수집 상태다. 그리고 그해 가을, 국회 5공비리특위 위원으로 ‘5공 청문회’에 나서고, 89년 국회 노동위 간사를 맡는다.

이후 어지러운 한국 정당사를 반영하듯 대통령이 정치를 하는 동안 소속 정당도 계속 바뀌었다. 90년 1월엔 한국 정치사에 전무후무한 여야간 합당이 발표된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세 사람의 밀실야합을 통해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합쳐 거대여당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다. 당시 일사천리로 합당 결의가 진행되던 통일민주당 대회장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이견 있습니다. 반대 토론합시다”고 외치던 대통령의 결기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3당합당은 한국 정치사에서 20년 동안 돌이킬 수 없는 폐해를 끼친다. 영-호남 지역주의의 고착과 기회주의 정치의 만연이다.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밝혔듯 정치하는 내내 이 두 한국의 정치 괴물과 싸운다. “대선 후보시절 구호였던 ‘원칙과 통합’은 바로 이 기나긴 싸움의 핵심을 압축한 것”이었다. 그리고 3당합당은 노무현 정치가 시작되는 기점이기도 하다.

대통령을 비롯해 통일민주당에서 민자당 합류를 거부한 국회의원들은 정통야당의 법통을 계승한 민주당(이른바 작은 민주당)을 창당하고, 야권통합에 나선다.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은 91년 재야인사를 영입하여 신민주연합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그해 9월 작은 민주당과 신민주연합당이 통합한다.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체제의 민주당이다. 이때 대통령은 민주당의 대변인을 맡는다.

그리고 92년 3월 24일 14대 국회의원선거 부산 동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민자당 허삼수와 재격돌한다. 92년 선거는 대통령이 ‘영남의 야당 복원’이란 뜻을 갖고 임한 선거였다. 선거구호는 백범 김구 선생의 어록에서 인용한 ‘대붕역풍비 생어역수영’(大鵬逆風飛 生魚逆水泳,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산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헤엄친다)이었다. 하지만 그해 연말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 당선을 바랬던 부산 민심은 민자당 후보들에 대한 몰표로 나타났고, 대통령도 ‘김영삼 바람’을 거슬러 날지 못하고 재선에 실패한다.

원내 진출에 실패한 정치인은 정치 야인이나 다름없다. 대통령은 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 청년위원장과 물결유세단장을 맡아 김대중 후보의 부산 선거운동을 도왔다. 민자당-민주당-정주영 후보의 국민당 3자 구도로 치러진 92년 대선의 승자는 김영삼 후보였다. 제14대 대선 직후 대통령은 93년 3월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연소 최고위원에 당선된다. 당 주류도 아니고, 돈과 조직도 없이 단기필마로 거둔 성과였다. 그리고 원외 당 최고위원으로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 여의도에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연다. 지방자치와 분권이 시대적 과제로 대두되던 때에 연구소는 현역 의원들과 교수 등 전문가그룹, 정치지망생 등을 묶는 싱크탱크였다.

명함 3. 지방자치실무연구소, 민주당 동구지구당 명함

명함 3은 그 시절 명함이다. 명함 하단 왼편엔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 사무실을 둔 지방자치실무연구소와 법무법인 해마루, 오른편엔 민주당 동구지구당과 부산시지부, 부산지역정책연구소 주소와 연락처가 명기되어 있다.

95년, 민주당 부총재 노무현대통령은 95년 2월, 민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부총재로 선출된다. 그리고 6월27일 치러진 지방선거에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한다. 당시 대통령은 젊은 층들의 지지를 받아 경기도지사 선거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었고,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정무부시장 러닝메이트로 거론되고 있었으나 동서분할 구도의 극복이란 대의 앞에 결정한 선택이었다. 선거 초반에는 여론이 좋았으나 대선 패배 후 정계를 은퇴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의 전북 지원 유세에서 지역등권론 발언에 유탄을 맞고 부동층이 신한국당에 몰리면서 또 한 번 낙선한다.

95년 지방선거 이후 당내에서 이기택 대표와 갈등을 빚었던 호남 출신 의원들과 원외 지구당 위원장들은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그리고 민주당에는 재야 출신 개혁신당 추진그룹이 수혈되어 그해 12월 통합민주당으로 개편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이철, 제정구, 김정길, 김근태, 유인태 등 개혁소장파 그룹과 호남 출신 김원기 의원 등은 ‘구당(救黨)’ 모임을 만들어 활동한다.

그 이듬해엔 96년 4월에는 15대 국회의원선거가 있었다. 대통령은 정치1번지인 종로에 출마한다. 당시 선거구호는 ‘3김청산’과 ‘세대교체’였다. 대통령은 그해 2월 10일 통합민주당 종로지구당 사무실을 연다. 명함 4와 5는 15대 총선 때 사용한 명함들이다. 정치 슬로건은 ‘3김 정치, 종로에서 끝냅시다!’이다. 사무소는 종로1가 종각 맞은편 보신빌딩 4층이었고, 명함엔 PC통신 하이텔과 천리안 아이디가 명기되어 있다.

명함 4. 96년 15대 총선 민주당 종로지구당 위원장(원문보기)

명함 5.

15대 총선에 임하는 통합민주당 후보들의 심정은 비장함 자체였다. 선거판도는 선거를 앞두고 민자당에서 당명을 바꿔단 신한국당이 경상도, 국민회의가 전라도, 자민련이 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지역분할 구도 아래 통합민주당은 힘겨운 싸움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 선거에 출마한 통합민주당 후보들의 인사는 “살아서 다시 만납시다”였다. 대통령도 지역주의 구도를 넘지 못했다. 대통령은 서울 종로에서 신한국당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후보와 맞붙은 결과 또 다시 낙선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당시 총선에서 통합민주당의 성적표는 참담했다. 대통령을 비롯해 서울에서 홍성우, 이철, 유인태, 성유보, 부산에서 이기택, 호남 김원기 의원 등이 줄줄이 낙선했다. 지역구 9명과 비례득표까지 15명이 원내에 진출했으나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5석이 모자란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대통령은 “15대 총선 이후 3김 청산과 지역주의 타파는 논리가 아니라 영호남에서 신뢰받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나오는 계기가 있어야 풀릴 문제이고, 제3당으로는 지역당을 타파할 수 없다는 경험적 인식을 얻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기회주의 정치 역사를 마감하고, 양심과 신념으로 시비를 따지는 세상을 만들려면 정권교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96년 총선 이후 민주당 내에선 당권투쟁이 격화됐다. 그해 11월 대통령은 ‘개혁과 통합을 위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에 참여하는데, 통추 소속 정치인들은 당권에서 밀려난다. 그후 대통령은 통추 소속 몇몇 사람들과 서울 강남에 ‘하로동선’이란 한우불고기 식당을 차려 일일 주방장(주방장 모자를 쓴 대통령 사진이 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도 하고, SBS 라디오 뉴스대행진의 진행도 맡는다. 명함 6은 96년 총선 후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대통령의 해마루 법률사무소 명함이고, 명함 7은 97년 광화문 도렴빌딩 사무실 명함이다.

명함 6. 96년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명함 7. 97년 종로 도렴빌딩 변호사 사무실 

98년,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 노무현97년엔 15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신한국당은 경선을 통해 이회창 씨가 주자로 나섰고, 국민회의에서는 김종필 씨와 연합한 김대중 총재가, 그리고 신한국당 경선 결과에 불복한 이인제 씨가 국민신당을 차려 출마한다. 민주당에서는 조순 서울시장을 후보로 추대했다. 그리고 얼마 후 민주당은 신한국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탄생했고, 조순 씨는 한나라당 총재가 된다.

그 와중에 통추 소속 정치인들은 한나라당과 국민회의로 찢어졌다. 대통령은 15대 대선 한 달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한다. 그리고 부산 경남 울산 선거대책위원장과 수도권 특별유세단을 맡아 선거운동에 나선다. 김대중 총재가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그 이듬해인 98년 7월 21일에는 서울 종로 보궐선거가 있었다. 이명박 의원이 96년 당시 부정선거로 인한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자 당선 무효 확정 판결을 앞두고 의원직을 사퇴해 치른 선거였다. 종로 보궐선거에서 대통령은 6년 만에 다시 국회의원이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대통령은 99년 2월에 종로 보궐선거로 당선된 지 반년, 그리고 16대 총선을 1년여 앞두고 ‘16대 총선 부산 출마’를 선언한다. 정권은 교체됐으나, 이른바 DJP 분점정부의 한계와 여야 간 극심한 정쟁 속에 영-호남 지역주의가 강고해져 가는 정치상황에서 내린 결단이었다. 당시 대통령은 “지역분열을 더 이상 부추겨선 안 됩니다, 동서통합을 이뤄냅시다”고 호소한다. 그리고 당 경남지부장과 동남지역정책특별위원장을 맡는다.

한편, 2000년 1월, 새정치국민회의는 개혁정당으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지역당의 한계를 넘는 전국정당화를 위해 새천년민주당으로 탈바꿈하고, ‘젊은 피’(386세대) 등을 수혈해 16대 총선에 임한다.

대통령은 민주당 간판으로 부산 북·강서을 선거에 나선다. 명함 8은 새천년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16대 총선에 나섰을 때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과 화면동, 덕천2동 연락사무소가 명기된 명함이다. 뒷면은 후원회 연락처가 적혀 있다.

명함 8. 2000년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원문보기)

하지만, 또 낙선한다. 역시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었다. 비록 또다시 낙선했으나 전국의 수많은 시민들로부터 격려가 이어졌고,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다. 대통령은 기득권이 있던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가서 떨어진 정치인으로 ‘바보 노무현’의 별명을 얻는다. ‘바보 노무현’을 좋아하게 된 시민들은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든다.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대통령은 2000년 8월 7일 해양수산부 장관에 취임하여 2001년 3월 26일 퇴임한다. 이어 그해 3월에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과 최고위원을 역임하고, 16대 대통령선거에 도전한다. 그리고 한국 정치사상 초유의 정치실험인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을 거쳐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선거혁명을 통해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다(명함 9).

명함 9.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
  • 권영준/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1.12.13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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