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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 유의미한 주요 사료를 소개하고 그 배경과 맥락을 정리해 제공합니다.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이나 정당, 정부는 언론과 긴밀한 관계를 맺길 원합니다. 정치권력은 할 수만 있다면 언론을 통제하거나 장악하려 합니다. 과거 군사독재정권 때는 물리력을 동원해 언론과 언론인들을 직간접 통제했었습니다. 

이 땅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보수언론들은 친일이란 오욕의 굴레를 쓰고,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에 굴종해 나팔수 노릇을 한 전력이 있습니다. 뜻있는 기자들의 언론자유 요구는 창살 아래 갇히거나 거리로 내몰렸습니다. 
한국 언론은 민주화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전처럼 정치권력의 강압에 의한 통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언론은 시장권력과 결탁해 자본을 축적하며 스스로 권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언론은 여론 형성과 사회적 의제 설정을 통해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그 영향력으로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으로부터 시민의 권리가 침해받지 않도록 감시하고, 견제합니다. 언론이 시민의 권력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보수언론들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편파적으로 보도해 반대세력을 공격해 왔습니다. 거기에는 사실과 진실 추구보다 다분히 정파성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정치권력과 언론의 관계는 불가근불가원이 답입니다. 과거의 보수언론들은 독재권력과 유착한 대가로 특혜를 받아 성장했습니다. 요즘에도 권력화한 언론과 정치권력 간엔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정치인으로서는 언론사와 그 경영진이나 간부, 기자들과 합법적 수단보다 ‘캐시 앤 위스키’를 통한 유착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정치인이 언론과 싸워 득 될 게 없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의 잘못된 보도와 부당한 횡포에 맞선 정치인이었습니다. 언론과 갈등이 표출된 사건을 통해 노 대통령의 언론관을 돌아봅니다. 

“조선일보 횡포를 두고
정치를 어떻게 바로 할 수 있겠는가”

91년 조선일보 명예훼손 소송과 정언유착의 단절

노무현 사료관 :: 사료이야기 :: 언론에 이의있습니다① 91년 조선일보 명예훼손 소송과 정언유착의 단절

2004년 8월 17일 한국기자협회 창립 40주년 기념식.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축사에서 "언론자유에 대한 정치권력의 위협에 맞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젠 언론이 정보라는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 자기절제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방명록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자'는 문구를 남겼다(오른쪽 사진)

  

“내가 정치를 한 것은 강자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조선일보가 한 정치인을 공략해 그 정치인의 정당생활을 어렵게 한다면 그것은 부도덕한 행위다. 조선일보처럼 부도덕한 언론과 아무도 싸우지 않는다면 누구도 정치를 바로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상처를 입을 각오를 하고 이런 악의적인 언론의 횡포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게 된다. 내가 정치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적으로 상처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정치인이라도 이로 인해 조금이라도 피해를 덜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를 하면서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정치인이었다. 초선의원 시절인 91년에는 거대 언론사인 조선일보와 명예회복 소송까지 벌였다. 조선일보 소송은 잘못된 보도로 인한 법적 피해구제 차원을 넘는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작문으로 판정된 문제의 기사90년 3당합당을 거부한 정치인 노무현은 작은 민주당을 꾸려 야권 통합운동에 나선다. 그리고 91년 9월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신민당과 합당하여 출범한 통합 민주당의 첫 대변인을 맡는다. 당시 언론들은 야당 대변인 인선을 알리는 기사를 내보냈다.

헌데 유독 <조선일보>(91년 9월 17일자)에 실린 노무현 의원 인물평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1단의 짤막한 기사에 「고졸 변호사 … 상당한 재산가」란 발문이 뽑혔고, 「의원직 사퇴서 제출 촌극을 빚는 등 지나치게 인기를 의식한다」거나 「개인 요트를 소유하는 등 상당한 재산가」등의 표현을 써서 정치인 프로필 기사치고 이례적으로 부정적 인상을 주는 기사였다.

기사에서 ‘개인 요트 소유’와 ‘상당한 재산가’는 사실이 아니었다. 노무현 의원은 바로 해명서를 만들어 언론사에 돌린다. “82년경 소형 요트를 취미로 탄 적은 있으나 개인 요트를 가지고 있지 않고, 재산가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조선일보는 자매지 <주간조선>(91년 10월 6일자)을 통해 「노무현 의원 과연 상당한 재산가인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싣는다.

<주간조선> 기사는 1년 전부터 떠돌던 악성 루머를 전제로 작성된 것이었다. 기사에는 「노무현 의원이 이재에 밝아 재산이 상당하고, 인권변호사 역할은 과장되어 있으며, 요트 타기를 즐기고, 노사분규 중재과정에서 재미를 보았다」고 되어 있었다. 노무현 의원은 기사 내용을 조목조목 반반했다. 이어 11월 12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조선일보를 상대로 ‘손해배상 및 사죄광고 청구 소송’을 제기한다.

노무현 사료관 :: 사료이야기 :: 언론에 이의있습니다① 91년 조선일보 명예훼손 소송과 정언유착의 단절

91년 11월 12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조선일보를 상대로 낸 소장(왼쪽). 92년 12월 4일 법원 판결문(오른쪽).

[조선일보 소송기록]소장[조선일보사 손해배상(기)청구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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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소송기록]조선일보 소송기록 중 위자료 지급 및 사죄광고 게재를 주문한 법원 판결문[정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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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는 조선일보사와 안병훈 편집인, 문제의 기사를 쓴 우종창 기자였다. 원고 측 소송 대리는 박용일·최일숙 변호사가 맡았다. 소장에는 “조선일보가 취재를 통해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노무현 의원이 마치 상당한 재산가이고, 인권변호사로 알려진 활동이 상당부분 거짓이며, 노사 양측으로부터 돈을 받아먹는 부도덕한 정치인, 심지어 부동산 투기까지 했다는 인상을 주어 정치적 이미지와 명예를 훼손했다”고 소 제기 이유를 밝혔다.

소 제기 1년 뒤인 92년 12월 4일, 법원(재판장 이진영 부장판사)은 “명예훼손이 명백하다”며, “조선일보는 노무현 전 의원에게 2천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한다. 그러면서 조선일보의 “언론자유 보장을 위해 공공의 이익과 관련한 보도는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면책된다” 라는 주장에 대해 “기사 대부분이 진실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진실이라고 믿도록 뒷받침할 만한 자료로 작성됐음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한 마디로 근거 없는 사실들로 나열된 ‘작문’이란 거였다.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왜 이런 악의적인 허위보도를 했을까? 노 대통령은 후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기자에게 조그만 인간적 호의만 있어도 진위를 확인하고 지나친 표현을 삼갔을 것이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배경으로 조선일보에 밉보인 ‘괘씸죄’를 지목했다.

91년 통합야당 민주당 대변인 시절 국회에서
 
조선일보에 밉보인 괘씸죄?소 제기 당시 <월간 말>(91년 12월호)은 이 사건을 취재 보도한 바 있다. <월간 말>은 노무현 의원 인터뷰를 통해 “주간조선 기사는 조선일보가 야권통합 기사 때 낙종한 것과 그해 3월경 조선일보 종로보급소 배달소년들의 권익 싸움에 대해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보복인 것 같다”고 밝혔다.

그게 발단이었을 수 있으나, 조선일보의 행태를 보면 그 이면의 분석도 가능했다.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대중적 인기를 얻어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비주류 정치인을 그대로 두고 볼 조선일보가 아니었다(이런 분석은 <월간 말>이 우종창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조선일보는 ‘색깔론’ 등 안보상업주의를 이용해 신문 부수를 늘리고, 수구보수 이데올로기를 잣대로 ‘검증’ 칼날을 휘둘러왔다. 그리고 선거 때마다 공정한 심판자 역할보다 영향력을 앞세워 킹메이커를 자임하며 정치인들을 줄 세웠고, 엇나가거나 자기편이 아니면 기사로 조졌다.

<월간 말>에 따르면, 소 제기 후 조선일보 측은 민주당 지도부에 ‘노무현 의원을 대변인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압력을 넣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출입기자를 통해 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야권통합을 비판하는 기사로 조지겠다’고 협박했단다. 이제 막 출범한 통합야당이 조선일보와 싸워봤자 손해 볼 게 뻔했다. 그래 당 지도부는 노무현 의원에게 ‘타협’을 권유한다. 이에 대해 당시 노무현 의원이 밝힌 생각이다.

“내가 정치를 한 것은 강자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조선일보가 한 정치인을 공략해 그 정치인의 정당생활을 어렵게 한다면 그것은 부도덕한 행위다. 조선일보처럼 부도덕한 언론과 아무도 싸우지 않는다면 누구도 정치를 바로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상처를 입을 각오를 하고 이런 악의적인 언론의 횡포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게 된다. 내가 정치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적으로 상처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정치인이라도 이로 인해 조금이라도 피해를 덜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노무현 의원은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1심에서 승소했다. 승소 후 조선일보사 사장과 해당 기자가 사과했고, 소는 취하됐다. 하지만 승소 사실을 전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한겨레와 동아일보만 92년 12월 5일자로 단신 보도). 정정과 반론에 인색한 한국 언론계의 단면이었다. 그런 가운데 잘못된 보도로 실추된 이미지나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후 선거 때마다 <주간조선> 기사는 정치인 노무현을 인신공격하는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뒤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에 첫 입성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정치 초년생이 언론의 관심을 받는 것은 더없이 행운이었지만, 초점은 온통 입지전적 성공담뿐이었다. 그 생각을 자전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청문회 이후 신문 잡지 할 것 없이 인터뷰 요청이 봇물 터지듯 들어왔다. 정치인으로는 매우 행복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나의 이야기를 입지전적 성공담으로만 다루고 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 무엇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번번이 외면해 버렸다”
- 노무현 자전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에서

이런 불만이 있었으나, 언론은 민주화운동가로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경력의 정치 초년생에게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편한 사건이 생기기 시작했다. 88년 12월 26일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연설한 내용에 대한 언론의 왜곡보도에 항의하다가 언론으로부터 이지메를 당했다

89년 3월에는 파행을 겪던 청문회에 한계를 느끼고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자 동정적 여론이 일었으나 일부 언론은 ‘소영웅주의’로 몰아갔다. 그해 연말 국회에서 전두환 씨의 청문회 증언 아닌 일장연설에 야당의원들이 거칠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당 지도부의 부당한 지시에 반발해 명패를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언론들은 ‘자질’을 거론하며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정치를 하면서 언론의 생리에 무지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고백했었다. 하지만, 정치권에 들어오기 전부터 언론보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독재정권을 비호하고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제도권언론들의 보도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특히, 언론들이 노사분규 과정에서 자본의 편만 들거나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는 데 분노했다.

민주화운동가 시절 언론에 대한 생각의 편린을 알 수 있는 사료가 있다. 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 진상조사에 관여했다가 구속됐을 당시 검찰이 제기한 범죄사실에 대한 ‘항변서’ 말미에는 언론의 보도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노사분규 현장에는 그 분규의 원인이 제일 첫째의 문제이다. 그 다음은 장차 원만한 수습을 위하여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언론은 어느 것을 했는가? 적어도 공정한 보도라도 했어야 한다. 왜곡보도는 구체적으로 어느 사실의 문제도 그렇거니와 자구 하나씩만 슬쩍슬쩍 끼워 넣어 전체 분위기의 흐름을 왜곡된 방향으로 몰아가는 데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우사건 보도에 갑자기 민민투의 주장까지 갖다 붙였다. 억울하게 사람 죽은 데 대한 안타까움도, 분노도 전혀 표시하지 않고.”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제도권 보수언론들에 대한 문제의식은 계속됐다. 다음은 89년 부산 동의대 사태 당시 <노동문학>(89년 6월호)이란 잡지에 쓴 ‘두려운 것은 패배가 아니라 패배주의이다’라는 칼럼 중 일부다.

“나는 ‘동의대 사태’에 대한 중앙 일간지의 사설을 보며 엄청난 왜곡과 과장을 역겹게 지켜봐야만 했다. 재단의 비리가 문제시되었을 때 문교부에서 충분히 조사할 의무와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방치하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공권력을 동원해 무모하게 진압한 점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도 없고, 심지어 감금된 전경을 태워 죽인 것인 양 써 놓은 작자들까지 있었다. 그 이후 단 한 마디 사과도 없이 말을 바꾸는 이들에게 과연 지식인으로서의 양식이 있는가 조차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론의 왜곡과 진실보도에 대한 외면이 노동 쟁의에 대해선 더더욱 극심하다는 것은 국회 노동위원회에 들어와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언유착 고리를 끊다 그랬다. 초선의원 시절 국회 노동위 소속으로 정치활동의 많은 시간을 노사분규 현장에서 보냈기에 노동쟁의를 전하는 언론들의 왜곡보도와 편파보도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은 이후 언론관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91년 조선 소송은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를 하면서 언론의 잘못된 보도와 부당한 횡포에 맞선 싸움의 시작이었다. 또한, 정치인으로서 언론과의 유착 고리를 스스로 끊어내고, 정-언관계의 정립을 고민하게 한 출발점이었다. (다음에 계속)

 

 

  • 권영준/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2.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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