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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 유의미한 주요 사료를 소개하고 그 배경과 맥락을 정리해 제공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1988년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이어진 다섯 번의 선거에서 네 번을 떨어졌습니다. 1998년 서울 종로구 재보궐 선거를 통해 전임자의 잔여임기인 2년 동안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지만, 2000년 4월에 열린 제16대 총선에서 부산으로 지역구를 옮겨 다시 낙선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현역 국회의원으로서 당선에 유리한 종로 지역구를 버리고 연패를 거듭해온 부산으로 되돌아간 이유는 ‘지역주의 극복’이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원칙과 소신, 일관된 행보는 제16대 총선에서 최고의 이슈가 됐습니다. 후진적인 정치 행태에 한숨짓던 시민들은 원칙과 소신을 보여준 정치인 노무현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되었고,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을 만들어 인터넷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노사모’는 ‘국내 최초 정치인 팬클럽’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주권자들이 정치인을 통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새로운 정치를 구현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원칙과 소신을 지켜온 한 정치인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만나 노무현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노사모를 통해 미래지향적인 시민참여 민주주의의 모습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국정치를 바꾼 ‘깨어 있는 시민의 힘’

자발적·능동적 정치 참여로 ‘시민주권 시대’의 문을 연 노사모

 
 

[제9회 노사모 전국총회에서 축사하는 노무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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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노사모 전국총회에서 축사하는 노무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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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 완성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끊임없이 진보합니다. 우리 민주주의도 선진국 수준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뤄 가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인 대화와 타협, 관용, 통합을 실천해야 합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민주주의의 완전한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야 합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 2007년 6월 16일, 제8회 노사모 총회 축하 메시지

‘시민주권’은 노무현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온 민주주의의 원칙이었다.

“민주주의 최후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한 해 전에 열린 제8차 노사모 총회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영상으로 축하 메시지만 보냈다. 임기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던 대통령의 축하 메시지에는 노사모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참여정부의 성과에 대한 설명, 그리고 노사모를 통해 확인한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제8회 노사모 총회 축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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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의 장벽에 거듭된 낙선 … ‘바보 노무현’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

노사모는 ‘노무현 팬클럽’을 표방하며 출발했지만, 단순한 팬덤(fandom)의 수준이 아니었다. 기성 정치권의 합종연횡과 편가르기 등 구태 정치를 바로잡으려는 한 정치인의 끊임없는 도전을 계기로 시민들의 실망과 불만이 발화(發火)된 것이었다. 노사모와 정치인 노무현은 이른바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이끌려온 민주주의를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여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희망을 함께 키웠다. 물론, 시작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노사모의 출발은 다소 돌발적인 울분이 인터넷 공간을 통해 결집되면서부터였다.

2000년 4월 13일, 제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한 노무현 의원은 네 번째 낙선을 경험한다. 2년 전 보궐선거를 통해 당선된 종로 지역구를 버리고 다시 한번 지역주의를 무너뜨려 보겠다고 부산에서 치른 선거였다. 선거 초반의 흐름은 좋았지만 또 한 번 장벽을 넘지 못했다. 특히, 제16대 총선은 지역 편중이 강하게 나타난 선거였다. 한나라당은 ‘호남 대통령’에 대한 반감과 지역감정을 한껏 부추겼다.

“쓰라린 마음을 다독이며 잠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내 홈페이지 ‘노하우’를 찾아와 밤새 울분에 찬 글을 소나기처럼 쏟아 놓았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어떤 당선자도 그렇게 뜨거운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인터넷에는 부산 시민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글이 많았고, 기자들도 부산 시민이 원망스럽지 않으냐고 물었다. 나는 홈페이지에 감사의 글을 올리면서 부산 시민들을 비난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이 아픔을 잊는 데는 시간이 약이겠지요. 또 털고 일어나야지요.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라더니, 그렇게 또 새로운 날들을 맞이했다. (중략) ‘바보 노무현’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총선에서 진 날 밤, ‘노하우’ 홈페이지에 글잔치가 벌어졌을 때 누가 제안을 했다. ‘우리 따로 모이자!’ 2000년 6월 6일 대전대학교 앞 조그만 pc방에 60명이 모였다. 여기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노사모 창립총회를 했다.
- 자서전 <운명이다>, 161·163쪽

지역주의 선거 결과에 참담함을 느낀 사람들은 노무현 의원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모여들었다. 5공 청문회 이후 일관된 정치행보를 통해 전국적 지명도가 높았던 노 의원의 낙선을 아쉬워하며 후진적인 정치행태, 지역감정에 대한 한탄을 토로하다가가 힘을 모아보기로 했다.

온라인을 통해 의기투합한 사람들은 가까운 지역에서 따로따로 모였고, 각 지역의 의견들은 다시 온라인에서 취합, 정리, 논의되었다. 각자 역할을 나누고 회비를 걷어 활동 중심 공간인 홈페이지도 만들었다. 그 결과물로 2000년 6월 6일 창립총회를 열었다. 모임을 만들어 보자는 의견이 나온지 불과 한 달이 조금 지난 뒤였다. 회원 대부분이 직장인이거나 학생이기에 공휴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비록 회원은 수백 명 수준이었지만 전국에 흩어져 있어 이동 편의와 온라인 참여를 고려해 중간지점인 대전의 PC방을 선택했다. 총회 날자와 일시도 홈페이지를 활용한 전자투표로 결정했다. 

약속 하나 - ‘나는 노무현과 함께 왜곡된 지역감정 극복에 동참한다

당내 계파도, 자금 동원력이 없었던 낙선한 국회의원에게 자발적으로 생겨난 팬클럽은 반가운 단비와 같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에는 노사모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총회에서는 전자투표를 통해 ‘노사모의 약속’이라는 일종의 규약을 추인했다. 일반적인 모임들에서 만드는 조문 형태의 정관, 규약, 회칙과 달리 단 세 가지 조항만으로 이뤄졌다. “1) 나는 노무현과 함께 우리나라의 왜곡된 지역감정의 극복에 동참한다. 2) 참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하여 우리 노사모 회원들과 함께 결정한 활동에 자발적으로 동참한다. 3) 노사모의 약속과 노사모의 활동이 기록된 관례가 회칙을 대신하며, 이 약속과 관례는 노사모의 전자투표만으로 바꿀 수 있다.”

“노무현을 대통령 만드는 것이 노사모의 목표라고 했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그동안 정치권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민들이었다. 회원이 몇 천 명 수준으로 늘어나면서 노사모는 정말 큰 힘이 되었다. 거대 보수언론과 싸울 때 이 사람들이 종횡무진 인터넷을 누비면서 사이버 여론을 만들어 나갔다. 소액이지만 여러 사람이 후원금을 보내 주었다. 모임을 하면 십시일반 돈을 걷어서 스스로 모든 비용을 치렀다. 늘 돈에 쪼들리던 나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중략) 노사모는 좌절감에 빠졌던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내가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시민들 스스로 노무현을 지지하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조금도 생색을 내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의 성원을 받는 것은 행복한 특권이었다. 2001년 5월 기자간담회에서 차기 대통령 선거에 나갈 뜻을 밝혔을 때 내가 마음으로 기댄 것은 바로 노사모의 성원이었다.”
- 자서전 <운명이다>, 163·165쪽

총회를 마친 노사모는 2000년 7월,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으로 가입해 있던 배우 명계남 씨를 대표회장으로 선출하고 전국적 모임의 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8월에는 명계남 회장이 관여하고 있던 영화인회의 사무실 한켠에 공간도 얻었다.

노사모는 ‘번개’모임 등을 통해 ‘노짱’(노무현 대통령 지칭)과 만났다. 2001년 9월 21일 광주 방문 때 광주 노사모 회원들이 마련해 준 생일파티와 9월 18일 전북 노사모 초청강연 후 뒷풀이 자리


온라인을 기반으로 생겨난 모임답게 초청강연을 청해 듣거나 ‘번개’ 모임을 통해 지역을 방문하는 노무현 상임고문과 즉석 만남을 갖기도 했다. 이따금씩은 톨게이트를 지나는 시간에 맞춰 현수막을 들고 환영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언론과의 전쟁 불사발언’ 으로 조중동과 긴장이 높아졌을 때는 온라인 공간을 누비며 노 장관이 설파하는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알리는 ‘사이버 전사’로 역할했고, 언론개혁 관련 시민단체에도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조금 규모가 큰 인터넷 동호회’, ‘새로운 정치 형태’ 정도의 평가를 받던 노사모가 2002년 대선정국에서 놀라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2001년 11월 10일,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이 대권 도전을 선언하고 노사모 회원들과 함께 한 무주단합대회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국민경선 … ‘노무현 바람’의 진원지는 노사모

노무현 고문은 2001년 9월 6일 후원회에서 대권 도전 의사를 처음 밝힌 후 11월 10일 무주단합대회에서 지지자들과 결속을 다지고, 2002년 2월 24일 기자회견을 통해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민주당이 국내 정당사상 최초로 당내 대의원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까지 후보 경선에 참여시키로 한 ‘국민 경선제’는 당내 조직기반이 취약한 노 고문에게는 기회였다. 본격적인 경선에 돌입하면서 노사모는 단순한 동호회에서 적극적 지지모임으로 활동했다. 창립 당시 600여 명이었던 회원 수도 급격히 늘어 경선이 한창이던 2002년 3월 말에는 2만 명을 넘어섰고, 대선에 임박해서는 8만여 명에 달했다. 노사모는 경선 기간 동안 온라인을 통한 홍보활동에 그치지 않고 선거인단을 모집하고 대의원들에게 노 후보 지지를 부탁하는 등 적극 나섰다. 또한 경선 현장에 직접 참여해 바람을 일으켰다.

울산 지역 경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1위를 한 이후 광주에서까지 1위를 차지하자 당 안팎에서는 노사모를 둘러싸고 음모론까지 난무했다. 심지어 “노사모와 한총련이 연계되어 있다”거나 “과격 노조원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는 경선에서 경쟁하고 있던 후보들의 위기의식의 반증이었다. 결국 노사모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로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로 노무현 상임고문이 선출됐고, 노사모는 더 많은 회원과 탄탄한 자신감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했다.

국민경선을 통해 ‘바람’을 일으키며 선출된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는 경선 직후 지지율이 50%를 넘나들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해 5월로 접어들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지지도 하락, 민주당의 6·3 지방선거와 8·8 재보궐 선거 패배 등 악재가 겹치면서 지지율이 급락했다. 민주당에서는 대선 후보 교체 요구가 나왔고, 한일 월드컵 이후 정몽준 의원이 선거전에 뛰어들면서 상황은 더 어렵게 흘러갔다. 그리고 선관위는 노사모의 활동은 불법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려놓고, 인터넷에 홍보글을 퍼나르는 행위도 못하게 했다.

일부 노사모 회원들은 민주당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후보 흔들기에 대해 거세게 항의했다. 항의를 받은 의원들은 다시 노 후보를 비난했다. 

“며칠 전 민주당 중앙당사 앞 시위를 멈추어 달라는 저의 호소를 기꺼이 받아들여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다시 이런 글을 올리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어제 있었던 전북 노사모의 고창지구당 항의방문으로 제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거듭 호소드립니다. 감정이나 자존심을 누그러뜨리고 역지사지하는 자세로 상대방을 존중해주셨으면 합니다. 저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일이라고 해도 그렇게 잘 믿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규탄 방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감정이 상하면 쉽게 풀릴 문제도 오히려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대화와 타협으로 설득을 해나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충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저와 여러분들이 뜻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정의를 외치는 몇몇 사람이 나머지 모든 사람을 꾸짖어 가면서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 2002년 8월 19일 노사모에 보낸 편지 중에서

2002년 8월 25일, 김해의 수해 복구 활에 참여한 노무현 후보와 노사모 회원들. 이날 노 후보는 “내가 노사모를 데려온 게 아니라 노사모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 왔다”고 말했다.


노 후보는 우여곡절 끝에 9월 30일 선대위 출정식을 갖고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몇몇 의원들은 10월 4일 ‘후보 단일화 추진협의회(후단협)’를 발족했고, 10월 17일에는 김민석 의원이 탈당해 정몽준 의원의 국민통합21에 합류했다. 노사모는 온라인 상에서 ‘노무현 일병 구하기’를 펼치며 전국을 순회하는 ‘희망 포장마차’와 ‘희망돼지 저금통’ 모금을 통해 노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희망돼지 저금통 분양사업의 주체는 ‘국민참여운동본부(국참)’와 민주당의 백만서포터즈 사업단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노사모가 중심이었다. 선관위의 명령으로 선거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서 노사모 홈페이지를 폐쇄해야 했지만, 노사모는 이에 굴하지 않고 거리로 나섰다. 

희망돼지. 2002년 대선을 역동적으로 만들어 위기에 빠진 노무현 후보의 승리를 끌어냈다. 

 
새로운 정치와 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향해 다시 꾸는 꿈

국민참여 경선과 후보 단일화 등 난관을 극복하고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노사모는 선거가 끝나고 존폐를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안착시켜 정치개혁을 일구기 위한 역할이 남아있다”며 존속했다. 2003년 1월 11일, 참여정부 출범을 앞두고 150여 명의 노사모 회원들과 만난 노무현 당선인은 “나와 함께 사고를 친 공범이니 앞으로도 그 책임을 같이 나눠야 할 것”이라며 지속적인 역할을 부탁했다.

선거가 끝나고 노사모에 대한 회원들이 관심이 줄어들고, 참여정부 출범 초 불거진 대북송금 특검, 이라크 파병 등을 놓고 내부에서 의견이 갈리기도 했다. 하지만, 대선자금 공개와 재신임 선언이 나오자 노사모는 재결집했고, 탄핵정국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지켜내는 중심 역할을 했다. 

2004년 3월, 국회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의결은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시민들은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기각 결정이 나올 때까지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다.
 
 퇴임 후 고향 봉하마을로 돌아가 생태 농업과 마을 가꾸기 활동을 벌인 대통령의 곁에서 노사모 회원들은 자원봉사자로 나서 함께 했다. 
 

2008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고향 봉하마을로 내려갔다. 대통령은 고향에서도 할일이 많았고, 이 일에도 노사모 회원들이 함께 했다. 노사모 회원들은 자원봉사를 통해 대통령의 생태농업과 화포천 살리기, 마을 숲 가꾸기에 참여했다.  

“노사모는 내가 검찰에 소환되어 봉하 집을 나설 때 버스 앞에서 노란 국화 꽃잎을 뿌려 주었다. 피의자로 조사를 받은 그 긴 시간 내내 검찰청사 앞에서 노란 풍선을 들고 기다려 주었다. 노무현을 버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끝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내 말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그것이 노사모였다.” - 자서전 <운명이다>, 167쪽

노사모는 정치인 노무현을 통해 새로운 정치와 살기 좋은 미래를 꿈꿨던 시민들의 모임이었다. 대통령은 떠났지만, 노사모는 남아 있다. 2008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은 노사모 자원봉사센터 개소식에 참석해 방명록에 이렇게 남겼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강물처럼!”  

 2008년 4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이 노사모 자원봉사센터 개소식에 참석해 방명록에 남긴 문구

 

  • 김경태/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2.12.10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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