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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 유의미한 주요 사료를 소개하고 그 배경과 맥락을 정리해 제공합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도 정치권에는 ‘대세론’이 횡행했습니다. 한나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이회창 대세론이 일찌감치 자리 잡았고, 집권당 새천년민주당의 주자로는 이인제 대세론이 퍼졌습니다. 그것은 언론과 정치권이 만들어낸 허상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결심하게 된 것도 지역감정 망령과 동서 분열주의가 민심을 흔들고, 기회주의 정치인이 이긴다는 그 허상을 깨기 위함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후보 국민참여 경선에 뛰어들어 2002년 4월 27일 대통령 후보가 되었습니다. 그후 선거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새천년민주당이 6월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면서 당 일각에서 ‘후보 흔들기’와 재경선 요구가 터져 나왔습니다. 노 대통령은 이를 ‘8·8 재보선 뒤 국민경선 방식의 재경선 수용’ 결단으로 돌파했고, 민주당이 재보선에서도 완패해 당내 분란이 격화되자 대선주자로 부상한 ‘정몽준 의원과의 후보 단일화 제의’로 고비를 넘었습니다. 후보 단일화 제의가 나온 때가 11월 3일이었습니다. 이어 단일화 방식을 놓고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도 상대방 요구를 전격 수용했습니다. 

11월 25일 노 대통령은 단일 후보로 결정됩니다. 하지만 막바지 선거운동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투표 전날 밤 국민통합21에서 돌연 ‘지지 철회’란 폭탄선언이 나왔습니다. 선거결과는 예측불허였습니다.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 투표결과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당시 한 언론은 이를 두고 “피 말리는 승부수로 거둔 역전 드라마”라고 썼습니다. 

2002년 12월 18일 투표일 전야 정몽준 씨의 후보 단일화 파기에서 19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까지 상황을 관련 기록과 증언으로 재구성했습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투표일 전야 막전막후

후보 단일화 파기에서 대통령 당선까지

 

2002년 12월 18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서울 전역을 돌며 막판 유세를 하고 있었다. 강행군이었다. 전날에도 유세는 아침부터 서울 강남·북과 경기 일산, 성남, 하남, 구리, 의정부 등을 돌아 오후에 부산으로 이어졌다.

새천년민주당(민주당) 선거대책본부가 예상한 선거판세는 후보 단일화 이후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우세를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접전이었다. 관건은 노무현 후보 지지층의 투표 참여율 제고와 부동표 흡수였다. 당 선거대책본부에서는 표심의 유동성이 남아 있는 수도권 젊은 층과 영남 지역 부동층 공략을 위해 후보의 유세 일정을 맞춰 놓았다.

18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부산 김해공항에서 특별 기자회견을 연다. 기자회견에서 노 후보는 영남의 유권자들을 향해 “이번에야말로 망국적인 지역갈등을 끝내자”고 호소한다. 이어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땀 흘린 만큼 잘 살고, 특권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대한민국 시대를 여는 정치혁명을 이뤄 달라”며 국민들에게 투표참여를 독려했다.

다음은 당시 기자회견 전문이다.


지역주의의 장벽을 허물고 국민통합의 새 시대로 나아갑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제16대 대통령선거의 공식선거운동이 오늘로 끝이 납니다. 저는 지난 20여 일 동안 선거운동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제 겸허한 자세로 국민 여러분의 선택을 기다릴 것입니다.

선거운동기간 동안 그토록 바라던 새로운 정치가 국민 여러분의 힘으로 이미 시작되었음을 저는 확인했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가는 곳마다 돼지 저금통을 들고 나와 성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자발적인 청중들의 눈에서, 저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보았습니다.

낡은 정치의 청산과 새로운 정치의 시작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국민은 더 이상 정치의 관객이 아니라 주역입니다. 진정한 국민참여 정치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흑색선전과 비방 등 구태정치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졌습니다. 돈과 조직을 동원한 낡은 선거 방식도 힘을 잃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우리 정치의 수준을 하루아침에 일류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정치혁명입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반드시 이 정치혁명을 성공시키겠습니다. 우리 정치를 왜곡시켜온 분열의 지역주의를 청산하겠습니다. 제왕적 권위주의정치를 몰아내겠습니다.

부정부패 없는 깨끗한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국민이 주인 되는 국민참여의 정치, 모든 지역과 계층이 화합하는 국민통합의 정치, 원칙과 상식이 지켜지는 신뢰의 정치, 깨끗하고 돈 안 드는 투명한 정치를 실천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정치에 입문한 이후 지금까지 14년 동안 동서화합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 왔습니다. 지역주의의 벽을 넘기 위해 정치생명을 던져 왔습니다. 정치를 지역으로 가른 반민주적 3당합당에 반대했습니다. 탄탄대로의 앞날이 보장되던 종로 지역구를 포기하고 다시 부산 선거에 도전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부산에서 세 차례나 낙선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지금은 서울과 경기, 강원, 호남과 충청, 제주 등 전국 곳곳에서 고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야말로 망국적인 지역갈등을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것입니다. 이제 영남만 도와주시면 제가 전국적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영남은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또 대통령후보가 된 오늘의 저를 키워준 곳입니다. 이제 영남이 앞장서서 국민통합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번 선거는 남북이 냉전과 대결의 역사를 청산하고 평화와 번영으로 나아가는 분수령입니다. 남북의 평화와 협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7천만 민족의 생존이 걸려있는 문제입니다. 사실상 경제교류 중단을 주장하는 무책임한 정략은 한반도에 긴장과 냉전을 불러올 뿐입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끈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를 통해 북한이 핵과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할 것입니다. 경제지원과 교류를 통해 북한이 개혁개방의 길로 나오도록 도울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하루만 지나면 새로운 대한민국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땀 흘린 만큼 잘 사는 나라입니다. 특권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은 여러분의 투표로 완성됩니다. 부디 투표에 참가하시어 위대한 정치혁명을 이루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2년 12월 18일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노 무 현
 

 
노무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후보였던 2002년 12월 18일의 용산전자상가 앞 유세.


타협과 양보, 그러나 원칙 지켜 이끌어낸 후보 단일화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숱한 고비를 넘었다. 노 대통령은 그해 4월 27일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으나, 노무현 후보 지지율은 5월 들어 하강곡선을 그렸다. 50%대를 보였던 지지율이 하락한 데는 이런저런 이유가 지목됐으나, 그 밑바닥엔 민주당에 등 돌린 민심과 일부 보수언론의 ‘노무현 죽이기’가 한몫했다.

2002년 6월 13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하자 민주당 일각에서는 ‘노무현 후보 흔들기’가 본격화됐다. 반한나라당 세력을 모아 신당을 창당하자는 주장과 당시 한일월드컵의 축구 바람을 타고 지지율이 오르던 정몽준 의원을 포함한 재경선 요구가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8·8 재보선 결과 뒤 재경선 수용’이란 카드로 돌파했다. 하지만, 8월 8일 수도권과 영호남, 제주 등 13곳에서 치러진 재보선에서도 민주당은 완패했다. 당내 분란이 계속된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고서도 선거운동다운 선거운동을 해보지 못했다.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지 4개월여가 지났으나 민주당에서는 대통령선거 대책본부조차 꾸려지지 않았다. 상대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는 한나라당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선거운동에 돌입했으나, 노 대통령은 손발이 꽁꽁 묶여 있었다.

2002년 9월 17일 정몽준 의원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 일부 의원들은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를 만들어 후보 교체를 주장했다. 반면, 10월 20일 창당한 개혁국민정당은 인터넷 당원 투표를 통해 노무현 후보 지지를 결의함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에게 큰 힘이 되었다.

선거를 한 달 보름 남짓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은 승부수를 던졌다. 11월 3일 정몽준 의원에게 후보 단일화를 전격 제안한다. 이어 민주당과 새로 창당한 국민통합21은 단일화 방식을 놓고 협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협상은 진전이 없었다. 11월 11일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통합21이 주장한 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 방식을 수용했다. 당시 민주당 고문으로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김원기 전 국회의장의 증언이다.

“단일화 방식을 놓고 양 진영 간에 줄다리기가 끝날 줄 몰랐어요.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 단일화 방식은 우리 쪽에 불리했죠.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하늘에 모든 걸 맡기고 그냥 받읍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내부에선 국민통합21 쪽 요구를 받으면 질 게 뻔하다며 화를 못 참고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대통령 후보를 그냥 정몽준 씨에게 줘버리자는 막말도 나왔어요.” 

결국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 단일화가 결정됐다. 그리고 여론조사 방법과 문항 등을 놓고 협상이 시작됐다. 민주당 쪽 협상단장을 맡았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증언이다.

““설문방향을 지지도에 맞출 것이냐, 후보 적합도에 맞출 것이냐가 논점이었죠. 정 후보쪽에서는 당시 여론조사들에서 지지율이 앞서고 있어 지지도 방식에 초점을 맞춘 설문을 짜갖고 왔어요. 우리 내부적으로도 새로 창당한 국민통합21보다는 결속된 당원도 있고 하니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죠. 그래 제가 반대하는 척 하다가 우리가 포기하고 받아들이겠다고 합의했어요. 그런데 합의내용 발표를 앞둔 직전에 신문사 여론조사들이 나왔는데, 정몽준 후보 지지율이 떨어져 있었어요. 그러자 정 후보 쪽에서 다시 합의하자고 했으나 안 받아들였죠”

11월 25일, 후보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는 노무현 후보의 승리였다. 국민들은 노무현 후보를 지켰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과 개혁성향 민주당 지지자들은 단일화 여론조사 며칠 전부터 집 전화를 핸드폰으로 돌려놓고 신호만 울리면 전화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노무현 대통령이 단일 후보가 되자 지지율은 단박에 뛰어 올랐다.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를 앞서기 시작했다. 극적인 역전이었다.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은 후보단일화 정신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 정권을 함께 운영하기로 했다. 그것은 원칙적이고 추상적인 합의였다.

그런데 정몽준 대표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유세장에 나오지 않았다. 김원기 고문과 이해찬 의원이 동분서주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정몽준 쪽은 권력분점을 확실하게 보장받으려 했다. 국무총리를 비롯해 외교, 안보, 국방, 경제부서 등 내각 인사권의 절반을 문서로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실질적 단일화가 깨지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다시 김원기 전 의장의 증언이다. 

“모두들 지칠 대로 지쳐 있었어요. 일부에선 ‘대통령만 빼고 정몽준 쪽 요구를 다 들어줘서라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 했죠. 그러던 중 정 대표 쪽에서 제게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했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 어떤 자리를 배려하겠다는 걸 서면은 아니더라도 말로 약속해주면 좋겠다’고 했죠. 이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했더니 대통령은 ‘자리를 갖고 뒷거래할 수는 없다, 그런 식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소신을 지키다가 실패한 대통령 후보로 남아 정치발전에 기여하겠다’며 거절했어요. 노 대통령이 워낙 완강해 정 대표 쪽에 그대로 통보했습니다.” 

그리고 이해찬 전 총리의 증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리를 갖고 약속이나 거래를 해선 안 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정 후보 쪽에 신의를 갖고 예우를 하겠다는 말만 전하라고 했죠. 그래 정 후보를 만나 ‘특정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지 말고 노 후보를 믿고 선거를 끝내자’고 설득했어요. 그리고 ‘국민들 앞에서 약속하고 단일화를 통해 집권했는데 만약 모른 척하면 누가 욕을 먹겠는가? 신의를 지킬 것이다’고 말했죠. 그 때만 해도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이기는 흐름이었어요. 후원금도 밀려들 때고…. 결국 정몽준 후보가 선거운동에 합류했죠.”

12월 13일,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에서 정몽준 대표를 만나 “단일화 정신에 따라 당선되면 국정동반자로서 함께 국가를 운영하고 국민통합과 정치개혁을 추진하기로 합의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선거 닷새 남겨두고 14일 부산 유세에 정몽준 대표가 나섰다.

2002년 12월 18일 명동 거리유세. 명동 유세 후 정몽준 씨는 '공조 파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18일 저녁 명동-종로 유세와 단일화 파기18일 아침 부산에서 상경한 노무현 대통령은 아침 10시 화곡역 사거리 유세를 시작으로 신정사거리(10:40) → 용산전자상가(12:00) → 성산시장(12:40) → 연신내역(13:20) → 미아삼거리 현대백화점 앞(14:10) → 수유시장(14:50) → 상봉터미널(15:40) → 테크노마트(16:20) → 금남시장(17:00)에서 유세를 이어갔다.

그리고 저녁에는 퇴근길 시민들을 상대로 명동과 종로에서 유세를 했다. 명동과 종로(제일은행 본점 앞) 유세장 단상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정몽준 대표가 나란히 있었다. 정 대표와 종로 유세를 마치고, 다음 유세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정 대표는 밤 9시30분경 공동 유세를 하기로 한 동대문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투표를 불과 8시간 앞둔 밤 10시경 정 대표 쪽에서 ‘지지 철회’를 일방 통보했고, 30분 뒤 국민통합21 대변인이 이를 공식화했다. 국민통합21에서 지지 철회 이유로 밝힌 것은 “북미 간에 핵 위기로 싸움이 나면 전쟁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아내야 한다, 한국이 중심을 잡고 끌려 다녀선 안 된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유세장 발언이었다. 그것이 ‘정책 공조 정신과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명동과 종로 유세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명동 유세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정몽준 대표를 향해 “대통령에 당선되면 재벌개혁을 할 건데 도와주실 거죠”라고 말해 정 대표의 심기가 불편해졌고, 단상 아래 있던 민주당 정동영 의원을 단상에 오르도록 해서 반발을 샀다는 것이다. 또 종로 유세장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정몽준 대표의 지지자가 든 ‘다음 대통령 정몽준’이란 피켓을 보고 선거운동을 도왔던 민주당 정동영·추미애 의원을 추켜세운 것이 발단이 됐다는 것이다.

종로 유세 후 정몽준 대표 쪽에서 지지 철회가 거론됐고, 국민과의 약속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 민주당은 발칵 뒤집어졌다. 당직자들과 지지자들은 허탈감과 충격에 빠졌다. 한나라당 쪽은 ‘승기를 잡았다’며 희희낙락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밤 유세를 중단하고 당사로 돌아왔다. 이해찬 전 총리의 증언이다. 

“신림동 유세가 끝나고 후보와 헤어졌는데, 당 대변인실에서 전화가 왔어요. 정몽준 의원이 지지 철회를 말했다며, 기자들이 확인을 요구한다는 거예요. 9시 뉴스에 나가면 야단나겠더라고요. 그래 우린 들은 바 없으니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죠. 밤 10시쯤 당사에 들어가니 정몽준 의원 쪽에서 단일화 파기를 통보했는데, 이유도 없어요. 정몽준 후보 하고는 연락도 안 되고….”“

밤 10시25분경, 정대철 선거대책위원장, 이해찬 기획본부장, 이상수 총무본부장, 이재정 유세본부장, 신계륜 후보비서실장 등 참모들과 한화갑 대표 등 10여명이 모인 가운데 회의가 열렸다. 참모들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정몽준 씨를 찾아가 사태 수습을 주문했다. 노 대통령은 내키지 않았으나 참모들의 뜻에 따랐다. 이어지는 이해찬 전 총리의 증언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정몽준 후보를 찾아가 번복하도록 설득하라고 했죠. 그런데 노 대통령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그러면 안 된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거다’고 언성을 높였어요. 그래 결국 노 후보가 정몽준 후보 집을 찾아갔는데, 문 앞에서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죠. 단일화가 깨졌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쪽 빠지더라고요.”

다음은 당시 선거운동을 도왔던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인터넷방송인 <라디오21> 인터뷰(2011년 5월)에서 밝힌 내용이다.

“부산에서 선거운동을 마치고 마지막 비행기로 서울에 올라왔어요. 그런데 김원기 고문이 전화를 해서 ‘선거 다 끝났다’고 하는 거예요. 부랴부랴 당사로 갔더니 노 대통령이 씩씩거리며 들어오더라고요. 그런 노 대통령에게 정대철 위원장이 ‘정몽준 씨 집을 찾아가는 게 좋겠다’고 하자, 노 대통령은 화를 내셨어요. 참모들이 ‘국민들 생각해 설득해 보자’고 계속 강권하니까, 노 대통령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시더니 ‘갑시다’ 하는 거예요.”

이어지는 김원기 전 의장의 증언이다. 

“저는 그날 밤 호남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전주에 있었어요. 정몽준 씨의 지지 철회 전언을 받고 급히 올라왔죠. 그래 노 대통령의 등을 강제로 떠다밀다시피 해서 정 대표 집으로 가게 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한 거죠. 그리고 이 모든 게 전화위복이 되었죠.”

밤 11시 5분, 노무현 대통령은 정대철 위원장, 이재정 본부장과 함께 평창동 정몽준 씨의 집을 찾는다. 겨울 밤 찬바람을 맞아가며 정몽준 씨 집 대문이 열리길 기다렸으나, 노 대통령은 정 대표를 만나지도 못한 채 명륜동 집으로 돌아온다. 민주당사에 있던 참모들은 마라톤 회의를 가졌다. 하지만 사태 수습을 위한 뾰족 수는 없었다. 김정길 전 장관의 기억이다.

“당에서 사후대책을 논의했는데, 시간만 흘렀죠. 그러다가 제가 옵서버 자격으로 안을 냈어요.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씨 간 후보 단일화를 통한 공조는 두 사람이 국민 앞에 한 약속이다, 정몽준 씨는 국민에게 한 약속을 버린 것이고, 노무현 후보가 약속을 깬 것은 아니지 않느냐, 따라서 노 후보의 약속은 유효하다’, 이런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하자고 했죠. 모두들 좋은 생각이라고 했어요. 이를 후보에게 전달해야 했는데, 밤 12시가 넘어 전화를 안 받는 거예요. 부산 선거사무실에 있던 문재인 변호사와 이호철씨는 전화를 걸어 나보고 직접 대통령을 만나 설득해 달라고 했죠.” 

정대철 선대위원장과 여럿이 밤 1시가 넘어 노무현 후보 집으로 가니 노 대통령이 자다가 잠옷 입은 채로 나왔어요. 기자회견 이야기를 꺼내자 한동안 묵묵부답이었어요. 그러더니 대통령이 ‘알았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가 2시쯤이었나. 새벽 3시가 넘어 귀가해 잠깐 눈을 붙였는데 일어나니 6시였어요. 티브이를 켰죠. 정대철 위원장이 후보님 모시고 가서 기자회견을 했더군요.”

정몽준 집앞 문전박대…지지자들 핸드폰으로 투표 독려투표 시작 30분 전인 19일 새벽 5시30분 민주당사 기자실.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단일화는 지켜져야 한다”라는 취지의 기자회견문을 발표한다. 하지만 전날 밤 방송들은 이미 긴급뉴스로 ‘단일화 파기’를 내보냈고, 19일자 조간신문들도 ‘정몽준 지지 철회’를 1면 톱기사에 올려놓았다. 당시 <조선일보> 사설 제목이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였다. 전날 밤 뉴스를 접한 노사모 회원들과 지지자들은 동 트기 전 동네 아파트 단지를 돌며 가정에 배달된 조선일보를 몰래 치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지자들은 분노했다. 19일 투표가 시작되고 선거본부에서는 하루종일 전화통을 붙들고 다른 지지자들에게 투표 참여를 호소했다. 노사모 회원들과 지지자들도 주변 지인들에게 핸드폰으로 투표 상황을 전하며 투표를 독려했다.

당 상황실로 시시각각 출구조사 결과가 들어왔다. 오전까지만 해도 밀리고 있다가 오후 3시 넘어 역전했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이해찬 전 총리의 증언이다. 

“아침 10시에 출구조사 결과를 보고받았는데, 지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12시쯤 지나자 분위기가 바뀌었죠. 젊은 층이 투표장에 나오고, 인터넷과 핸드폰 문자로 투표 참여 글들이 떴죠. KT 집계로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전화 통화량이 엄청 폭주했다고 해요. 오후 4시가 되니까 이길 거라는 느낌이 왔어요. 단일화 파기만 아니었으면 훨씬 많이 이겼겠죠. 그날 국민들의 자발적인 투표 참여 전화로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대선을 치러보니 ‘대통령이 되는 길은 정해져 있구나, 그 길은 운명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에 투표를 끝내고 경남 진영 선산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


오후 6시 투표가 끝나고, 방송3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근소한 차이지만 이회창 후보를 앞선 것으로 나왔다.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서울에선 투표 마감시간을 앞두고 광화문으로 몰려나온 노사모 회원들과 지지자들이 노란풍선을 들고,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개표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후 6시50분부터 시작된 개표 초반에는 이회창 후보가 앞서갔다. 모두 초조해 했다. 오후 8시40분 개표율이 35%를 넘어서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득표율이 앞섰다. 그리고 밤 10시 방송사들은 ‘노무현 당선 확실’을 내보냈다.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오 필승 노무현>과 <아침이슬>을 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광주에서도 시민들이 금남로에 모여 ‘노무현 대통령’을 환호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서면 거리에도 축제의 밤이 연출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19일 오전에 투표를 마치고 오후에 부모님 묘소가 있는 진영을 찾았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제16대 대통령선거의 투표율은 70.8%였고, 노무현 대통령이 얻은 표는 1,201만 2,945표(48.9%)였다. 이회창 후보와는 57만 1,829표(2.3%) 차이였다. 당선이 확정되고, 노 대통령의 마음에는 그간의 선거과정이 강물처럼 흘렀을 것이다. 언론이야 한 편의 역전 선거드라마라고 썼지만, 그것은 ‘새로운 정치’를 갈구한 노무현 대통령과 국민들이 역경을 딛고 함께 거둔 위대한 승리였다.

다음은 19일 밤, 노무현 대통령이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된 뒤 국민들에게 전한 인사말이다.

2002년 12월 19일 민주당사에서 제16대 대통령선거 당선 확정 뒤 기자회견을 하는 노무현 대통령. 



국민들께 드리는 인사말씀 


국민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당선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주신 민주당 당원동지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민주당 당원동지 여러분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저의 당선을 위해서 땀 흘리고 노력해주셨습니다. 개혁국민정당 당원동지 여러분들, 그리고 노사모 회원, 그 밖의 많은 국민 여러분, 정말 거듭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의 당선을 위해서 뛰어주시지 않으셨지만 혹은 이번 선거에서 저를 반대하신 많은 국민 여러분께도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저를 지지한 분들만의 대통령이 아닌 저를 반대하신 분까지 포함한 모든 국민들의 대통령으로서, 또 심부름꾼으로 최선을 다할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을 드립니다. 

아울러서 저와 맞서서 열심히 노력하시고 또 애석하게 패배하신 우리 이회창 후보님의 노고에 대해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아울러 드립니다. 특히, 이제 새로운 진보의 기치를 내걸고 열심히 뛰신 우리 권영길 후보님이 선전을 하신 데 대해 축하드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큰 발전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당을 달리하고,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 맞서서 치열하게 싸우신 많은 의원님들, 또 정치하시는 분들, 앞으로 대화와 타협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가도록 언제든지 대화를 제의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항시 대화하면서 국민을 위해서 함께 힘을 모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 16대 대통령 당선자 노무현

 

  • 권영준/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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