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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 유의미한 주요 사료를 소개하고 그 배경과 맥락을 정리해 제공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개혁과 변화를 통해 새 시대를 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 야대여소 정국 속 야당의 정치공세, 국책사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의 갈등, 북핵 위기와 이라크전 등 국제정세가 그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새 시대의 첫차가 되고자 했으나 구시대의 청소부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태와 잘못된 관행에 눈감고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참여정부 출범① : 권력기관 개혁과 변화의 물결


 

2003년 2월 25일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제16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취임식장에는 전직 대통령들과 3부요인, 각계인사, 외국 축하사절단, 그리고 추첨으로 뽑힌 일반 축하객 4만 5천여 명이 참석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새 정부는 개혁과 통합을 바탕으로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를 열어나갈 것”이라면서 “이러한 목표로 가기 위해 원칙과 신뢰, 공정과 투명, 대화와 타협, 분권과 자율을 국정 운영의 좌표로 삼겠다”고 밝혔다.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 취임 선서
 
취임식 후 국민들에게 손 흔들어 인사하는 노무현 대통령


개혁 대통령과 책임총리제

취임 이틀 후 참여정부의 첫 내각 진용이 발표됐다. 한 달 전 내정 발표한 고건 총리를 비롯해 강금실 여성 법무장관과 40대 군수 출신 김두관 행자부 장관의 발탁이 눈길을 끌었다. 노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에 “개혁 대통령, 안정과 균형 총리”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국무총리에게 헌법이 보장한 각료 임명제청권 등 실질적 권한을 부여하는 책임총리제의 실현 의지를 밝힌 바 있었다.

내각 발표 날, 대통령은 신임 각료들과 함께 청와대 기자실이 있는 ‘춘추관’에 나타나 직접 인선 배경을 설명했다. 과거엔 볼 수 없던 광경이었다. 

2월 27일 신임 국무위원들과 함께 내각 인선 발표를 위해 춘추관 가는 길


참여정부 첫 내각에 대해 언론들은 ‘개혁과 안정의 조화’로 평가했다. 하지만, 개혁 인사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법무부의 검찰 인사안을 두고 검사들이 집단 반발했다. 대통령은 평검사들에게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토론에 나온 검사들은 검찰총장에게 검사 인사권 이양을 요구하며 대통령의 말꼬리를 잡았다. 이를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국민들은 과거 정권에서 권력의 시녀로 지탄받던 검사들이 조직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태도를 빗대 ‘검새스럽다’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검사들은 토론 후 자신들의 요구를 철회했고, 법무부에 검찰 제도개혁 방안 마련을 위한 추진단이 설치됐다.

국정원에 ‘국내 정치 개입 금지령’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초 4대 권력기관이라 불리던 검찰, 국가정보원, 국세청, 감사원 개혁에 나섰다. 국가정보원에 대해서는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대통령 스스로 “국내 정치 관련 보고는 일절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참여정부 초대 국정원장에 개혁 성향의 고영구 변호사가 기용됐고, 조직개편과 인사혁신이 단행됐다. 대공정책실 등이 폐지 됐고, 동북아 경제 중심 프로젝트 지원부서 등 해외 역량이 강화됐다. 또한 기관원들의 사찰성 정보 수집 업무와 정부부처 및 언론사 상시 출입도 못 하게 했다.

4월 25일 고영구 국정원장 임명 뒤 청와대 접견실에서 환담


권력기관 개혁의 핵심은 정치적 중립이었다. 과거 대통령들은 재임기간 동안 권력기관을 사유화해 정권 유지에 이용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기관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았고, 내부의 특권 청산을 요구했다. 탈 권위와 권력 분산은 시대적 요구였다. 노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이길 거부했다. 그런 철학은 선거 과정에서 던진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메시지에 잘 녹아 있다.

브리핑제 도입과 기자실 개방

참여정부 출범 후 정부와 언론 간의 관계도 변화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3월 4일 KBS 창사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공영방송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언론과의 밀월관계에 기대지 않고 관계 정립에 나섰다. 청와대에 정례 브리핑제를 도입해 출입기자단 중심의 폐쇄적인 기자실 운영 대신 보다 많은 언론사에게 기자실을 개방했다. 브리핑제는 각 부처로 파급됐다. 정부부처의 가판신문 구독도 중단시켰다. 정부 관계자들이 1쇄로 발행되던 가판신문에서 관련 유·불리 기사를 파악해 언론사에 기사를 넣고 빼는 청탁 행위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다. 반면, 오보에 대해서는 언론중재 및 법적 구제절차에 따라 정정과 반론보도를 활용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 충북 청원군 문의면 소재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를 주민들에게 돌려줬다.
사진은 4월 18일 청남대에서 자전거 타는 노 대통령


정당과의 관계에서는 당정 분리를 실현했다. 과거 대통령들은 여당의 총재로서 공천권과 인사권을 쥐고 소속 의원들을 통제했다. 당정 분리는 정당 민주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국정 운영에 부담이었으나 후보 시절에 했던 약속이기에 지켰다.

국회는 야당인 한나라당이 과반을 장악하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 직후 한나라당은 선거결과에 불복해 당선무효소송까지 냈다. 대법원 결정으로 전국 80개 개표구 투표지에 대한 재검표가 실시됐으나 무책임한 정치공세로 드러났다.

취임 다음날 국회가 보낸 대북송금 특검법안

2월 4일 한나라당은 국회에 대북송금 특검법안을 제출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남북 정상회담 때 정부가 현대상선을 통해 북한에 보낸 4억 달러를 놓고 정치공세를 이어갔다. 대북 송금 의혹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2월 14일 담화를 통해 국민들에게 사과했고, “그 돈이 남북경협에 사용됐다면 남북관계와 국가 이익을 위해 사법심사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다음날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대북송금 특검법안을 단독 처리해 청와대로 보내왔다. 이제 막 출범한 정부 안에서는 특검 수용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3월 14일 대통령은 대북송금 특검법안에 서명했다. 당시 특검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자서전 <운명이다>는 이렇게 적고 있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특검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까지 막기는 어려웠다. 검찰 수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논거는 ‘통치행위론’이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몰랐다고 했으니 그것을 내세우는 데 필요한 논거가 사라져 버렸다. …(중략)… 어차피 수사를 막을 수 없다면 검찰보다 특검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누가 수사하든 대북송금 절차의 위법성을 밝히는 데 그쳐야지 남북관계의 근간을 해치는 데로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 검찰보다는 인력과 활동 범위가 법으로 제한된 특검에 맡기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운명이다> 231~233쪽

노 대통령은 특검에 송두환 변호사를 임명했고, 송 특검은 법이 정한 대로 수사했다. 수사결과가 발표되자 한나라당은 불만을 표시하며 6월 25일 재특검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이 특검법안도 7월 15일 국회에서 단독 통과시켰다. 하지만, 재특검법안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특검 수사로 국민의 정부 관련자들에게 유죄가 선고됐고, 이들은 나중에 모두 사면됐다. 대통령은 취임 후 대국회 관계를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가려 했으나 바람처럼 되진 않았다. “대화하자”는 대통령을 향해 한나라당은 공공연하게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다. (다음에 계속)

 

  • 권영준/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3.01.14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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