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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 유의미한 주요 사료를 소개하고 그 배경과 맥락을 정리해 제공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개혁과 변화를 통해 새 시대를 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 야대여소 정국 속 야당의 정치공세, 국책사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의 갈등, 북핵 위기와 이라크전 등 국제정세가 그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새 시대의 첫차가 되고자 했으나 구시대의 청소부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태와 잘못된 관행에 눈감고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시대 청산 나선 대통령의 결단

참여정부 출범② : 이라크 파병과 대선자금 수사

 
 

노무현 대통령 취임 첫 해는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정세도 어려웠다. 2003년 1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북핵 위기가 고조됐다. 부시 정부는 북한 봉쇄와 제재로 맞섰고, 핵시설 폭격까지 거론됐다. 그리고 북핵 문제는 유엔 안보리에 회부됐다.

 

북핵 위기와 이라크 파병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북핵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북한 무력 공격은 한반도 전쟁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검토 자체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 와중에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한국에 이라크 공격 지지와 전투병 파병을 요청했다. 노 대통령은 3월 20일 담화를 통해 “이라크 전쟁이 북핵문제 등 남북관계 현안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미국과 협의 끝에 5~600명 규모의 공병단과 150명 규모의 야전 의무부대 파병을 결정했다.

파병 결정과정에서 시민단체들의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정부여당 안에서도 의견이 갈렸고, 국가인권위원회는 파병 반대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하지만, 대통령은 북핵 사태 속 한미공조가 절실한 상황에서 미국의 파병 요청을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비전투병 파병을 관철시켰고, 파병 동의안은 국회에서 4월 2일 가결됐다. 파병이 결정된 국군 건설공병단은 서희부대, 의료지원단은 제마부대로 이름 붙여졌다.

비전투병 파병으로 논란이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미국이 전투병 추가 파병을 다시 요청해 왔다. 대통령은 10월 8일 청와대에서 이라크 파병 반대 시민단체 대표들을 만났다. 추가 파병 소식이 알려지면서 파병 반대운동은 더 거세게 전개됐다. 결국, 미국이 요청한 전투병 1만 명 대신 평화 재건 임무 지원병력 3천명으로 절충했다.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당시 파병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대통령의 고뇌를 잘 읽을 수 있다.

“이라크 파병은 옳지 않은 선택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서 파병한 것이다. 때로는 뻔히 알면서도 오류의 기록을 역사에 남겨야 하는 대통령의 자리, 참으로 어렵고 무거웠다.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어쩔 수 없이 보내기는 했지만 최선을 다해 효과적인 외교를 했다.” <운명이다> 245쪽

 

미래 한미관계 향한 첫 발

미국의 파병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지만, 그런 한편 노 대통령은 집권 초반부터 한미관계에서 과거의 대미 의존적 자세에서 벗어나 미래를 위한 동반자라는 새로운 관계 정립에 나섰다. 보수세력들은 노 대통령을 반미 대통령으로 몰아세우며 한미간 갈등을 호도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에 굴하지 않았고, 주저앉지도 않았다.

4월 8일 한미 간에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 첫 회의가 열렸다. 50년 만에 미국과의 동맹관계 재조정의 첫발이었고, 여기서 미군기지 이전, 전시 작전통제권 이양, 소파 개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북핵 해결을 위한 정상외교도 숨 가쁘게 진행됐다. 노 대통령은 5월 11일 6박 7일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14일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북핵의 평화적 제거와 동반자 관계 지향’에 합의했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북핵 문제는 대화를 통해 해결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5월 11일 취임 후 첫 미국 방문 차 뉴욕 존F. 케네디공항에 도착한 대통령 내외
 
방미 첫날 뉴욕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재미동포 간담회


6월에는 일본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만났다. 북핵문제를 놓고 노무현 대통령은 “계속 대화”, 고이즈미 총리는 “엄정한 단속” 등 이견이 있었으나 6월 8일 “한국의 평화번영 정책과 일본의 북일 국교 정상화를 상호 지지한다”는 합의에 이르러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9일에는 일본 국회에서 과거사와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구축에 주력하자”고 연설했다. 7월 7일부터는 나흘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 주석과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등을 내용으로 한 한중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런 가운데 남북대화는 중단없이 이어갔다. 남북 간에 장관급회담과 철도-도로 연결 등 경제협력 사업들이 추진됐다. 그리고 북핵 사태 해결을 위한 다자간 논의 틀이 구성됐고, 8월 27일 베이징에서 남북한과 미·중·일·러가 참여하는 첫 6자회담이 열렸다. 첫 6자회담에서 북한의 핵 폐기 의사를 확인했다.

 

경제운용 기조는 체질 개선

북핵 위기와 이라크전 발발로 불안 심리가 확산되면서 외국 투자자들의 국내 투자도 위축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투자 활성화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대두된 카드채 부실과 가계부도 위기로 경제가 흔들거렸다.

과거 외환위기 속 집권했던 국민의 정부는 국민들과 혹독한 대가를 치르며 나락으로 떨어지던 경제를 살려 놓았다. 김영삼 대통령 임기 말 36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고는 국민의 정부에서 1,234억 달러로 늘었고, 2002년 1인당 국민소득이 외환위기 후 5년 만에 1만 달러를 넘었다. 참여정부는 집권 초반부터 경제의 체질 개선과 경쟁력 강화를 경제정책 운용기조로 삼아 시장개혁에 나섰다.

하지만, 여건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리한 경기부양책을 쓰지 않았다. 경기부양책은 나중에 부담으로 돌아오고 그 피해를 서민들이 떠안는다. 카드채 부실도 무리한 경기부양책이 낳은 결과였다. 노 대통령은 9월 18일 중소 벤처 기업 대표들과 가진 오찬에서 “경기 부양이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성장 잠재력에 부담을 주는 경기부양책은 절대로 쓰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런 한편으로 경제 불균형 해소와 부동산 값 하향 안정화에 주력했다. 부동산 시장은 2001년 86조 원에 달했던 가계의 주택담보대출액이 2002년 132조 원으로 한 해 동안에만 무려 50조 원 정도가 늘어나는 등 과열양상을 띠고 있었다. 5월 23일 주거복지 로드맵이 마련됐고, 10월 29일 주택시장 안정 종합대책이 발표됐다. 부동산 투기 억제를 위한 주택거래 신고제 도입과 2채 이상 대주택 보유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인상이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부동산 시장이 일시적 침체를 겪으면서 금융권과 건설업계가 강하게 반발했다.

 

제주 4·3사건 정부 최초 사과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임기 첫 해 해결해야 할 국가과제들도 많았다. 노 대통령은 4월 15일 국무회의에서 24개 핵심 갈등과제를 선정하여 해당부처들이 적극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또한 갈등을 합리적으로 풀기 위해 자료 공개와 전문가 토론 등 공론조사 제도를 도입했다. 이해관계자들이 대립하고 있던 사안 중 원자력발전소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건립은 해묵은 과제였다.

전북 부안군 위도에 건립을 추진하기로 했으나,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가 반대하고 나섰다. 산업자원부가 8월 3일 위도 부지 평가 정보를 공개하여 주민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부안군수 폭행 사태가 벌어지는 등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주민투표로 해법을 찾았고, 11월 21일 위도 건립은 백지화됐다. 이후 방폐장은 2005년 주민들의 찬성이 높은 경북 경주시로 유치가 결정됐다.

 
12월 22일 경남 합천 해인사를 방문한 대통령 내외. 대통령은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과 총무원장 법장 스님 등 불교계 원로들과 만나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사패산 터널 공사 등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불교계와 환경단체의 반대로 공사가 중단된 서울외곽순환도로 사패산 터널 공사도 난제였다. 사패산 터널은 대통령이 후보 시절 ‘백지화’를 약속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건설교통부에서는 공사가 많이 진척되어 노선 변경이 어렵다는 거였다. 결국 대통령이 불교계를 직접 설득하기 위해 나섰다. 12월 22일 경남 합천 해인사를 방문하여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과 총무원장 법장 스님 등을 만나 양해를 구했다.

참여정부에서는 과거사 진실 규명 작업이 시작되어 5월 6일 제주 4·3사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보고서가 공개됐다. 보고서는 “4·3사건 강경진압의 최종 책임은 이를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으며, 사건 발발과 진압 과정에서 미군정과 미국 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를 중심으로 일제 강점 하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위원회,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등이 활동했고, 군·국정원·경찰에 과거사위원회가 설치됐다.

 

대선자금 수사와 정계개편

한편, 대선정국에서 제기됐던 나라종금 퇴출저지 정치권 로비 의혹이 다시 불거져 불법 정치자금 조성 논란으로 옮겨 붙었다. 논란이 일자 노무현 대통령은 여야 대선자금 공개를 제안했다. 대통령의 제안을 한나라당은 거부했다.

노 대통령은 7월 21일 기자회견을 열어 “여야가 중앙선관위에 신고한 법정 선거자금과 함께 선거에 사용한 각종 정치자금과 정당의 활동자금, 잔여금을 모두 공개하고, 특검이든 검찰이든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절차를 통해 검증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23일 민주당이 대선자금 세부내역을 먼저 공개했다.

 
 7월 21일 청와대 춘추관 여야 대선자금 공개 촉구 특별 기자회견


그런 가운데 정계개편 움직임도 가시화됐다. 선거 당시 ‘후단협’ 갈등을 빚었던 민주당에 내분이 일어나 9월 4일 당내 신당추진모임이 만들어졌고, 20일에는 신당 추진파 의원 37명이 탈당했다. 그리고 7월에 한나라당을 탈당해 있던 이부영·이우재·김부겸·안영근·김영춘 의원들과 함께 ‘국민참여통합신당’이 국회 교섭단체로 등록했다. 노 대통령은 9월 29일 민주당적을 포기했다. 신당은 유시민·김원웅 의원 등 개혁당까지 참여해 47석의 열린우리당으로 창당했다.

10월 10일 대통령은 측근비리 및 대선자금 논란과 관련해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13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재신임 선언 배경에 대해 “정치권의 일상화된 부정·부패 사슬을 끊고 도덕적 불감증을 치유하기 위해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는 것”이라며, “국민투표를 실시하자”고 밝혔다.

재신임 논란 속 대통령은 11월 5일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등 원로들을 청와대에 초청해 의견을 나눴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새 시대를 열어가는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내 노릇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며, “구태와 잘못된 관행을 깨끗이 청산해 다음 후배들이 다시는 흙탕길을 걷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11월 5일 청와대 원로지식인 초청 간담회. 이날 간담회에는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배경숙 인하대 명예교수, 백낙청 시민방송 이사장, 이돈명 변호사, 김윤환 민화협 범국민협의회 고문, 강만길 상지대 총장, 송기숙 전남대 명예교수, 홍창의 서울의대 명예교수, 이인호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한완상 한성대 총장, 유창우 영남대 명예교수, 박성래 한국외대 교수, 장회익 녹색대학 총장이 참석했다.


11월 28일 헌법재판소는 이만섭 전 국회의장 등이 제기한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발언 헌법소원’에 대해 “헌법소원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각하 결정을 내렸다. 이에 정치권은 대통령에게 재신임 발언 철회를 요구했다. 노 대통령은 “국민투표가 불가능하면 철회하겠다”며, “다만 책임정치를 위해 수사가 마무리되어 진상이 밝혀지면 국민의 뜻을 살펴 최종 결단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대선 불법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로 대통령 주변 사람들과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의 측근들이 구속 기소됐다. 수사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엘지·삼성·SK 등 5대기업에서만 ‘차떼기’로 거액의 불법 대선자금을 모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듬해 검찰이 밝혀낸 불법 대선자금은 민주당 119억 원, 한나라당 823억 원이었고, 정치인 13명 구속, 19명 불구속, 그리고 기업인 13명이 형사 처벌됐다. 

 

  • 권영준/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3.01.16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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