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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 유의미한 주요 사료를 소개하고 그 배경과 맥락을 정리해 제공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었다. 대선 승리를 위해 단일화 요구를 받아들였고, 단일후보 선출 방식을 놓고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도 상대방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선대위에 참여했던 관계자들과 참모들의 구술 증언과 기록으로 엮은 2002년 대선 후보 단일화 이야기다.

16대 대선 그 숨막힌 싸움..
노무현의 선택과 국민의 선택이 만났다

2002년 단일화의 승리, 노무현은 어떻게 만들어냈나(상)



2002년 16대 대선을 두 달 남짓 남겨둔 11월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6·13 지방선거, 8·8 재보선에서 여당인 민주당은 연전연패했고 9월 들어 정몽준 의원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다음 달인 10월 민주당 의원 34명은 ‘대통령후보 단일화 추진협의회’(후단협)를 만들었다.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선거 전망은 여전히 비관적이었다. 정몽준 후보를 턱밑까지 추격했더니, 그 사이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야금야금 올라가 40%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 자서전 <운명이다> 195쪽

당 안팎에서 후보 단일화 요구가 거셌다. 단일화하면 노무현 후보가 진다는 게 ‘정설’인 상황이었다. 사실상의 후보 교체 요구로 받아들여졌다. 외면할 것인가, 부딪힐 것인가. 노무현 후보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2002년 11월 3일 노 후보는 서울국민참여운동본부 발대식 연설에서 국민통합21 정몽준 의원에게 단일화를 공식 제안했다.

"이회창 후보를 두려워하는 많은 국민들이 '단일화 안하고 이기겠냐' 이렇게 걱정하고 제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정책이 다 다른데 어떻게 단일화를 할 것이냐, 이것이 제 고민이고 많은 국민들은 그렇게 해야만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감이 떨어져서, 이 패배주의 때문에 힘이 보이지 않습니다. … 여러분, 원칙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정책이 같은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원칙이냐 하는 것을 또한 국민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국민들 앞에 TV토론을 통해서 확실하게 검증을 거치고 그리고 당원들끼리의 경선이 아니라 100% 국민경선을 통해서 후보를 결정하자,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저 또한 이 자리에서 이 결정을 수락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용납해 주십시오."


선대위도 몰랐던 여론조사 수용 발표

박수도 나왔으나 환호가 일지는 않았다.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당시 민주당 선거대책위 기획본부장)는 "환호가 아니라 싸늘한, 그런 분위기였다"고 발대식 현장을 기억한다. 결과를 예상이나 하듯 다음날인 11월 4일 후단협 소속 의원 11명이 민주당을 탈당했다. 11월 5일 국민통합21은 창당대회를 열고 정몽준 의원을 당 대표와 대선 후보로 추대했다. 양당은 협상을시작했으나 단일화 방법을 놓고 답보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11월 10일 저녁 민주당 선대위에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노무현 후보로부터였다. 전남지역을 방문 중이던 노 후보가 "전국 8개 권역에서 TV토론을 거친 뒤 25일까지 권위 있는 여론조사기관 4∼5개를 통해 여론조사를 실시해 그 결과에 승복하겠다"고 밝혔다는 것. 노 후보를 수행하던 김경재 홍보본부장의 기자브리핑이었으나 정작 선대위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해찬 대표의 말이다.

"단일화를 어떻게 할 거냐, 협상에 들어갔는데 두 당간에 후보 단일화라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니까 방식이 없어요. 해본 경험이 없으니까. 근데 당원투표로 하면 우리가 이기는 상황이고 여론조사로 하면 우리가 지는 상황이거든. 그러니까 우리는 여론조사를 받아들이기 곤란한 입장이고 정몽준 후보 쪽은 당원투표는 안 된다는 거고. 그래가지고 한참 실랑이를 했었는데 후보가 ‘여론조사 방식을 받아들이겠다’고 해버린 거예요. 선대위하고 상의도 없이 그렇게 해버린 거야. 선대위에선 여론조사 방식 갖곤 안 되겠다 이렇게 대책을 세우고 있는데."

다음날 노무현 후보는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 방식 수용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정몽준 후보가 원하는 여론조사 단일화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민주당 후보라는 작은 기득권에 집착하는 것은 떳떳한 선택이 될 수 없었다. 11월 11일 순천 로얄 호텔에서 전남지역 종교지도자들과 조찬간담회를 했다. 여기서 후보 단일화를 바라는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에 응하겠다고 선언했다. - <운명이다> 195-196쪽

캠프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애초 단일화 요구도 그러했지만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는 십중팔구 노무현에서 정몽준으로 후보 교체를 예고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선대위 유세본부장을 맡았던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의 말이다.

"내부에서는 '여론조사를 할 바에야 단일화는 없던 일로 하고 가자'는 게 대세였습니다. 몇몇 사람은 여당이 선거도 못해보고 이렇게 물러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역사의 죄인이 되는 거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요. 근데 노무현 후보께서 ‘단일화는 국민과의 약속이다, 단일화를 안 하고 당선되는 것보다 단일화를 하고 떨어지는 편을 택하겠다’고 한 것이죠. 그땐 참 비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해찬 대표도 "당시 후보는 '내가 져도 좋다, 이회창 후보한테 정권을 넘겨줄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여론조사 방식을 받아버린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이후 협상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국민통합21 측은 '대의원 경선형 전화여론조사', '대의원 50%+국민 50% 절충형 여론조사' 등을 수정 제안해왔다. 양당 협상단이 합의한 사안까지 재협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11월 20일 협상단이 재구성되는 진통 끝에 11월 22일 밤 단일화 방안이 타결됐다. 두 후보의 토론은 당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KBS․MBC․SBS․YTN 생중계로 진행됐다. 11월 24일 일요일. 두 여론조사기관의 여론조사가 이어졌다. 샘플 수는 각 2000명. 질문방식은 출마 선언자 6명 가운데 누구에게 투표할 지 먼저 묻고, 이회창 후보를 택하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와 경쟁할 단일후보로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재정 전 장관의 회고다.

‘눈물의 기도’가 환호로…단일후보 확정

"여론조사 전날 예상결과가 보고되는데 우리가 지는 겁니다. 근데 방법이 있나요? 조사대상이 전국에서 2천 샘플이잖아요? 어디서 선거운동을 하고 누구한테 전화를 걸어서 지지 호소를 한들 의미가 있겠어요? 사람들이 다 그렇게 힘이 빠져가지고 있는데 내가 제안을 했죠. '오늘 주일날이니까 예배라도 봅시다.' 그래서 회의실에 모여가지고 제가 성경 한 구절 읽고 설교의 얘기도 좀 하고 기도를 했는데. 하여튼 그때 저로선 상당히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얘기를 하고 기도를 하는데 한 사람이 훌쩍 거리기 시작하더니 모두가 우는 겁니다, 거기서. 정말 눈물의 기도가 됐어요. 그 현장이."

11월 25일 새벽 0시 15분경.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한 조사기관 결과는 노무현 후보 46.8%, 정몽준 후보 42.2%로 노 후보가 높게 나왔다. 다른 한 기관의 결과는 이회창 후보 지지도가 28.7%로, 지난 2주간 이 후보의 최저 지지도(30.4%)보다 낮게 나와 무효처리. 노무현 후보가 단일후보 확정됐다. '눈물의 기도'로 채워졌던 선거캠프가 환호로 뒤덮였다. 정작 그 순간, 노 후보는 캠프에 없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인터뷰를 정리한 책 <안희정과 이광재>의 한 대목이다.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날 이광재와 안희정은 노무현 후보와 함께 서울 도심의 한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초조해하는 순간 노무현 후보가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한잠 잘 테니 결과가 나오면 깨워주게." 이런 황당할 데가. 대체 이런 상황에서 잠이 온단 말인가. 노무현 후보는 실제로 잠이 들었다. 원래 코를 잘 안 고는데 잠시 뒤 코까지 골며 주무시기 시작했다. 결과는 예상 밖 승리. 후보 멘트도 졌을 경우만 준비해뒀는데. 이광재가 노무현 후보를 흔들어 깨웠다. "후보가 되셨습니다." "가보세." 미소만 지을 뿐 담담한 표정이었던 노무현 후보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는 순간 옆에 있는 수행비서를 와락 껴안았다. "아이, 또 선거운동 하러 가야 되네." 활짝 웃는 노무현 후보의 첫 승리 소감에 이광재와 안희정은 폭소를 터뜨렸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 제16대 대선은 본격적인 양자대결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단일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정몽준 대표는 한동안 노무현 후보의 유세에 동참하지 않았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 김상철/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
  • 2012.11.05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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