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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이야기 유의미한 주요 사료를 소개하고 그 배경과 맥락을 정리해 제공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1978년 변호사 개업을 하고 ‘그 사건’을 맡기 전까지 “적당히 돈을 밝히고 인생을 즐기는, 그저 그런 변호사였다”고 회고합니다. ‘그 사건’, 바로 1981년 9월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노 대통령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변호사’에서 ‘변호인’으로,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열정의 시기”를 관통합니다. 이어 1987년 첫 구속되고 1988년 제13대 총선에 첫 출마하기까지 자서전 <운명이다>를 기반으로 노무현의 80년대를 정리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열정의 시기를 맞았다"

사료로 보는 노무현의 80년대...부림사건 전과 후 '변호사'에서 '변호인'으로

 

1978년 5월 변호사 개업을 했다. … 혼자 개업을 하고 보니 하루하루 사건에 쫓겨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 직원 몇을 데리고 당시 사법서사들이 하던 부동산 등기업무에 손을 대기도 했다. (67~68쪽)

1. '변호사 노무현' 자개명패가 놓인 책상에 앉은 노무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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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개명패가 놓인 책상에 앉은 노무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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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료읽기에 집중하는 노무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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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하여 자료를 읽는 노무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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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틀에서 보면 나는 적당히 돈을 밝히고 인생을 즐기는, 그저 그런 변호사였다. … 출세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던 어린 시절의 꿈은 어느새 슬며시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68~69쪽)

1981.1.21 부산일보 법률상담(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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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을 바꾸었던 ‘그 사건’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판사로 변호사로 사는 동안 애써 억눌러왔던 내면의 소리를 진지하게 듣게 되었다. (71쪽)

1981년 9월 전두환 정권이 소위 ‘부림사건’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이것이 내 삶을 바꾸었던 바로 ‘그 사건’이다. …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일단 구치소로 피고인 접견을 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상상치도 못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고문을 받았는지 초췌한 몰골을 한 청년들은, 변호사인 내가 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들은 모두 영장 없이 체포되었고 짧게는 20일, 길게는 두 달 넘게 불법 구금되어 있으면서 몽둥이찜질과 물고문을 당했다. (77~78쪽)

[부림사건] 통닭구이가 만든 공산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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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림사건] 호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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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졌다. 사실과 법리를 따지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법정에서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변론을 하기가 어려웠다.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처참한 고통을 거론하면서 공안기관의 불법 행위를 폭로하고 비판했다. (78쪽)

고호석 구술영상1 부림사건 재판과 노무현 변호사의 변모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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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호석 구술영상2 부림사건 재판과 노무현 변호사의 변모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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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민주여, 사람사는 세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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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민주여, 사람사는 세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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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월과 8월 전국을 휩쓸었던 ‘노동자대투쟁’ … 그런 상황에서 거제도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거리시위를 하던 중 이석규 씨가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온 나라의 시선이 거제도로 쏠렸다. 나는 노조 결정 방법과 회사 측의 방해에 대한 대응 방법, 효과적인 조합 운영법을 자문해주는 데 힘썼다. … 그런데 검찰이 우리가 노동자를 선동한다면서 ‘제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 혐의를 걸었다. … 나는 일이 있어서 부산으로 돌아왔다가 붙잡혔는데, 부산 변호사들이 대거 참여해 힘을 쓴 덕분인지 구속적부심을 통해 23일 만에 풀려났다. (93쪽)

1988년 초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한테서 영입 제안이 왔다. 대선에서 패배한 ‘양김’이 재야 민주화운동 출신 인사를 다투어 영입하던 때였다. (96쪽)
어쨌든 나는 김영삼 총재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소박하게 판단했다. “국회의원이 되면 노동자들을 돕는 데 유리할 것이다.” …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 동구를 선택했다. 상대가 모두들 기피하던 전두환 정권의 실세 허삼수 씨였기에 거기에는 지원자가 없었다. 이왕이면 센 상대와 대결하고 싶기도 했고, 그가 전두환 대통령의 왼팔로 통한 5공화국 독재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민주화운동 세력을 대표해서 이기고 싶었다. (98쪽)

[꽃목걸이를 걸고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노무현 국회의원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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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목걸이를 걸고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노무현 국회의원 당선자]
[꽃목걸이를 걸고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노무현 국회의원 당선자]
[꽃목걸이를 걸고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노무현 국회의원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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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철/ 노무현사료연구센터
  • 2014.04.22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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